페미니즘의 방아쇠를 당기다(1)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8.17 13:49
  • 호수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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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피해자에 대한 통념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최초의 ‘미투’ 재판이라 함 직한 안희정 사건에 1심 무죄선고가 내려지면서 많은 여성들의 마음이 끓어오르고 있다. 다양한 관심법과 하느님놀이스러운 지레짐작은 빼고 이 판결요지를 말하라면, “김지은씨가 피해자처럼 보이지 않는다”가 남는다. 

 

남녀를 불문하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에 빠져 있다. 가해자 측에서 제공하는 스토리는 사람들의 통념에 부합하(다고 여겨지)고, 피해자가 내놓은 이야기는 잘 납득하려 하지 않거나 다양한 의심을 하려 든다. 가해자의 스토리에 이상한 점이 있음을 깨닫고 느끼는 사람의 수는 적고,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그 스토리를 자신의 통념과 상상력으로 메우며 실패한 연애 사건으로 인식하려는 사람의 수는 많다.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접근해야 할 재판부조차 통념적 사고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아니 적극적으로 부자유하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 시사저널 고성준

 

마침 읽고 있는 책에서 두 가지 정도의 답안을 얻는다. 한 가지는 여성에 대한 통념은 자연스럽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구성된다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통제는 노동과 긴밀하게 연관된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의 방아쇠를 당기다-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의 사회사》가 그 책이다. 

 

《여성의 신비》는 우리나라 여성들에게도 퍼져 있는 여성다움이라는 신화, 주부 신드롬 등의 비밀을 알려주는 책이다.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는 여성은 아내가 되고 여성다운 여성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회적 통념이 지배했다. 그래서 수많은 여성들이 고등교육을 포기하고 가정에 안착했지만, 이 여성들은 뜻밖에도 공허함, 정체성 혼란 등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로 힘들어했다. 

 

베티 프리단은 인터뷰와 연구를 통해 이 문제들이 여성을 가정에 묶어두는 지배담론에 순응한 결과임을 밝히고 이를 ‘여성의 신비’라 이름 지었다. ‘여성의 신비’, 명료하게 말하면 여성성을 신비화하는 일이 시대정신이 되는 과정과 그에 공모하는 남성권력에 대한 베티의 통찰을 김진희의 서술을 따라가며 읽는 동안, 왜 이런 판결이 등장했는지를 알 것 같아졌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비슷하게 벌어지는 일들.

 

우선 주목할 부분은 정치와 사회와 언론과 자본이 여성을 가정 내에 묶어두고자 공모하면서 베티를 비롯한 고급 여성노동자들의 노동권이 점차 박탈되어 가는 모습이다. 이번 판결에서 내가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여성의 사회적 노동에 대한 몰이해와 부정이었다. 정치인 수행비서의 임무가 원래 무엇이었든 아무 상관없이 일종의 여성서비스노동처럼 간주되었으며, 사회에서 여성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감당해야 하고, 이상적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노동대열에서 이탈할 정도의 적극적 저항이 필요하다는 판결을 했다는 점이다. 

 

김진희 교수는 ‘여성의 신비’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재편되는 경제질서 속에서 남성의 일자리를 위해 여성들을 희생시키는 정교하게 조작된 성별분업담론이라는 점을 베티의 생애를 추적하면서 보여준다. 여성은 전문가 노동자가 되는 대신 가정을 경영하는 우수한 소비자가 되는 것을 이상적 모습으로 여기게끔 조작된다. 바로 그것이 ‘여성의 신비’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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