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살아 있는 ‘진시황 퍼즐’
  • 박승준 아시아리스크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8.17 14:31
  • 호수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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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진짜중국 이야기] 진시황 사후 15년 만에 망한 진(秦)왕조 미스터리

 

진시황(秦始皇)을 서양 사람들은 ‘최초의 황제(First Emperor)’라 부른다. ‘마지막 황제(Last Emperor)’는 청(淸) 최후의 황제 푸이(賻儀)를 가리킨다. 진시황이 즉위한 것은 기원전 247년이었고, 푸이를 마지막 황제로 청이 망한 것은 1912년이었으니 진(秦)에서 시작해 한(漢), 수(隋), 당(唐), 원(元), 명(明), 청으로 이어진 중국 왕조의 역사는 2359년 동안 계속돼 왔다.

 

진시황은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불리던 진, 한(韓), 위(魏), 조(趙), 제(齊), 초(楚), 연(燕) 가운데 조나라에서 출생한 인물이다. 성(姓)은 영(?), 씨(氏)는 조(趙), 이름은 정(政)이었다. 2002년에 장이모(張藝謨)가 감독을 해서 만든 영화 《영웅》에 보면 황제에 오르기 전의 진왕 정을 살해하려던 ‘무명(無名)’이라는 자객 이야기가 나온다. 천하통일의 야망을 가진 진왕 정이 너무 포악한 것으로 소문나 천하의 자객들이 진왕 정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다. 

 

중국 추이톈카이 외교부 차관이 2010년 6월 베이징을 방문한 천영우 당시 외교통상부 2차관에게 선물한 문인 소동파의 유후론(留后論) © 연합뉴스



영화 《영웅》과 장이모의 거짓말

 

무명이라는 자객은 평소 진나라의 협객 행세를 했으나 실제로는 조나라에서 파견한 자객이었다. 멋진 홍콩 배우 이연걸(李連杰)이 분장한 무명은 진에서 10년을 생활하면서 자신의 자객 신분을 세탁했다. 영화에 나오는 세 명의 다른 자객들은 무명의 그런 신분을 알고 일부러 무명과 대결을 벌여 모두 죽는다. 무명은 자신이 자객 세 명을 죽인 공을 앞세워 진왕 정에게 접근한다. 무명은 열 걸음 이내의 인물은 단칼에 죽일 수 있는 ‘십보일살(十步一殺)’이라는 필살기를 익혀두고 있었다. 

 

진왕 정은 자신을 죽이려는 자객들을 모두 죽였다는 무명의 이야기에 넘어가 무명을 열 걸음 안까지 접근하게 허용한다. 무명에게는 십보일살의 필살기로 진왕 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나 무명은 진왕 정의 암살을 포기한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진왕 정이야말로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큰 인물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무명은 일부러 암살을 포기하고 진왕 정의 호위병들이 쏜 화살 세례를 받고 죽는다.

 

영화 《영웅》의 이야기는 중국 최고의 감독 장이모가 만들어낸 애국적 거짓말이다. 영화 속 자객 ‘무명’의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자객열전에 나오는 형가(荊軻)의 이야기를 슬쩍 왜곡해 버린 것이다. 사마천은 자객열전 형가편에서 형가가 진왕 정에게 접근한 순간을 다이내믹한 문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진왕이 지도를 다 펼치자 그 끝에서 단검이 나왔다. 형가는 재빨리 왼손으로 진왕 정의 소매를 움켜쥐고, 오른손으로 단검을 집어 들고 진왕 정을 찔렀다. 그러나 칼이 짧아 진왕 정을 찌르지 못했고, 진왕은 형가가 움켜쥐었던 소매를 뿌리치고 궁궐 기둥 사이로 요리조리 달아났다. 진왕은 신하들이 외치는 ‘허리의 칼을 뽑으라’는 말에 정신을 차려 장검을 뽑아 형가의 왼팔을 내리친다. 형가는 진왕 정이 잇달아 여덟 차례를 찌르자 기둥에 기대어 웃으면서 숨을 거둔다.” 

 

역사적 사실은 자객 형가가 진왕 정을 살해하려다 칼이 짧아 실패에 그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한창 애국주의를 고취하던 2002년에 만들어진 장이모의 영화는 사실을 왜곡해 무명이라는 자객이 진왕 정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영웅이라고 판단하고 살해를 포기하는 것으로 그려놓았다. 

 

진시황은 13세에 진왕으로 책봉돼 39세 때인 기원전 221년 전국 7웅을 모두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한다. 진시황은 하(夏), 은(殷), 주(周) 3대의 고대왕조에 걸쳐 실시되던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국 근대까지 이어진 군현(郡縣)제를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제를 확립한다. 그는 전국 7웅 일곱 나라가 다 다르게 쓰던 도량형을 통일하고, 한자를 일원화시켰으며, 전국에서 운행되던 마차의 폭을 표준화하는 일들을 해냈다.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건설한 것은 온 세계가 아는 일이다. 그가 진을 통치한 사상은 법가(法家)사상이었고, 이사(李斯)를 비롯한 법가의 인재들을 등용해 진을 통치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진시황은 기원전 210년 세 번째의 지방 시찰을 하다가 과로로 마차 위에서 죽는다. 천년왕국처럼 보이던 진은 불과 14년간 지속되다 기원전 207년 모자라는 아들 호해(胡亥)의 실정(失政)으로 멸망한다. 중국 천하는 5년간의 천하대란 끝에 초한(楚漢)전쟁에서 승리한 유방(劉邦)이 한(漢)왕조를 세움으로써 이후 200여 년 지속되는 새로운 통일왕국이 건설된다. 

 

중국 산시성 시안의 진시황 동상 © 연합뉴스


 

천안함과 진을 멸망시킨 장량 이야기

 

진의 빠른 멸망에는 진시황의 아들 호해의 어리석음도 컸지만 유방의 책사 장량(張良)의 병법도 큰 역할을 했다. 장량은 진왕 정이 멸망시킨 한(韓)나라 출신으로 나라가 망한 분을 참지 못하고 기원전 218년 진시황이 지방 순시를 할 때 무게 60kg의 철퇴로 진시황 살해를 시도했다가 마차를 오인해서 실패하고 중국 동쪽 지방으로 달아나 숨어 살았다. 숨어 다니던 장량은 어느 날 다리 위에서 한 노인을 만났는데 노인이 짚신을 다리 아래로 벗어던지면서 “주워서 신겨 달라”는 억지를 부린다. 장량이 억지를 받아주자 노인은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장량의 인내를 시험하다가 장량이 끝내 참아내자 병법이 담긴 책을 건네준다. 장량은 그 병서를 열심히 읽고 유방의 책사가 되어 진나라를 무너뜨림으로써 끝내 자신의 조국 한(韓) 멸망의 분풀이를 한다.

 

진나라 멸망의 원인을 장량의 우수한 책략 덕분이라고 평가한 사람은 진 멸망 1200여 년 뒤의 북송(北宋)의 문인 소동파(蘇東坡)였다. 소동파는 ‘유후론(留后論)’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이 글에서 장량에 관해 “天下有大勇者 卒然臨之而不驚 無故加之而不怒 此其所挾持者甚大 而其志甚遠也(세상에 큰 용기를 지닌 이로, 돌연한 일을 당해도 놀라거나 성내지 않으니, 그가 가슴에 품은 바가 매우 크고 그 뜻은 매우 원대하다)”고 묘사했다. 소동파가 유후론을 남기고 다시 1000여 년 가까이 흐른 2010년 6월8일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천영우 당시 외교통상부 2차관은 카운터파트인 추이톈카이(崔天凱) 중국 외교부 차관으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된다. 그 선물은 바로 소동파의 유후론을 붓글씨로 쓴 액자였다. 당시 우리 외교 당국은 그 글귀가 무슨 뜻인지, 또 그 액자를 선물한 추이톈카이의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충의 뜻은 석 달 전 발생한 천안함 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가 인내를 하라는 뜻이라고는 짐작했으나, 진시황이 멸망시킨 한(韓)나라의 사대부였던 장량이 분노를 잘 조절해서 마침내 유방이 진을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야기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중국과 외교를 하려면 진나라의 멸망을 가져온 장량의 인내가 무엇인지까지 이해해야 한다는 선례를 남긴 일화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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