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방아쇠를 당기다(2)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8.24 09:54
  • 호수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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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여성의 신비에서 피해자다움의 신비로

지난주에 안희정 무죄 판결의 판결문이 지닌 문제로 전문직 여성의 노동에 대한 부정을 이야기했다. 특히 아직 여성에겐 충분히 열려 있지 않은 대표적 영역인 정치 분야에서 여성노동에 대한 몰이해를 재판부는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베티의 《여성의 신비》를 읽지 않아도 《여성의 신비》를 둘러싼 문제들을 남김없이 파악하게 해 주는 김진희의 저술에 힘입어, 여성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묶어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국가와 자본의 책략인가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단일한 정체성은 지금 이 순간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이다.

 

‘한국 인형’ 속 여성의 이미지는 늘 ‘현모양처’형이다. 내재화된 이미지는 오히려 피해자를 양산한다. © 시사저널 고성준


 

나는 우리 사회를 가끔 ‘성폭력 권하는 사회’라고 부르는데, 엄청난 규모의 성 산업이 존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는 본질적으로 성폭력에 기반하여 유지되며 남성연대의 심리적 바탕 역시 성폭력적 공모라고 하는 뜻이다. 그랬을 때, 성폭력 가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기제 없이는 이 공모가 견고해지지 않는다. 

 

전쟁 뒤 귀향한 남성노동자를 위해 필요했던 것이 생산자 남성산업노동과 소비자 여성가사노동이라는 성별분업화였다면, 고도성장이 끝나고 고용이 줄어드는 시기에는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진다. 이 때문에 기득권에 속한 남성과 탈락자가 된 남성 사이에는 다른 종류의 평화협정이 필요하다. 고용이 정체되고 노동의 가치가 절하되는 대신 허용되는 해피드럭(마약)이 성폭력이라고 말하면 심한 이야기가 될까. 아니 심하지 않다. 좀 더 강력하게 말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일상생활의 안전 자체를 위협하는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만연하는데, 실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한 공권력의 관대함은 도가 지나친 느낌을 준다. 여성들이 사법부라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성차별적인 성폭력 판결에 분노하는 것이 과연 오해 때문이기만 할까. 각종 판결에 세부적인 타당함이 혹시 있다 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가해에 대한 관대함과 피해에 대한 무감각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답지 않은 피해자’가 점점 늘고 있는 지금, ‘피해자다움’이라는 통념은 고발하는 여성의 피해자 정체성을 문제 삼음으로써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소외시키고 은폐한다. 심지어 몰카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여성이 몰카 구멍마다 틀어막아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가해자들을 처벌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간단해지는 해결을 말이다. 

 

반복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 50년대 미국이 성별분업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모양처 신드롬이라는 ‘여성의 신비’를 만들어냈듯, 2000년대 한국에선 순결한 피해자라는 ‘피해자의 신비’를 만들어내는 중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여성의 신비’와 ‘피해자의 신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여성의 신비’가 요구하는 여성성의 특성인 수동적이고 여성다운 태도를 내면화하거나, 성폭력의 희생물이 되어 피해자다움을 내면화하거나 양자택일을 해야 사회 내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이러한 통념, 많은 여성들도 지니고 있는 통념이, 매스컴과 사회 유력 인사들인 변호사니, 판사니 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케이블TV들의 시사토론 프로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고, 이를 변화시켜야 할 정치권은 수상한 침묵에 빠져 있다. 만일 이 피해자다움을 거부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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