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 정보 필요한 여행자에겐 전혀 쓸모없는 여행서
  • 신수경 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8.24 09:57
  • 호수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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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의 《언젠가, 아마도》, 담백해도 너무 담백한 58편의 여행 이야기

 

학창 시절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다.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건너가면서 호되게 몸살감기를 앓았다. 뜨거운 한여름이었지만 그야말로 몸은 한겨울처럼 추웠다. 로마에서 피렌체로 가는 도중 기차에서 열이 펄펄 끓어올랐고, 피렌체역에 도착했지만 역에서 도저히 한 발자국도 움직일 자신이 없어 피렌체역만 찍고 다시 로마로 돌아온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 년 후 직장에 들어가 출장으로 다시 피렌체에 갈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필자가 다시 만난 피렌체란 도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그런 도시였다. 세월이 흘렀지만 피렌체가 필자에게 준 그때의 첫인상, 그 이국적인 풍경은 지금도 엊그제 처음 본 것처럼 생생하다. 그 도시에 있으면서도 한없이 그 도시를 꿈꾸고 있었다. 핑크빛 노을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그때 느꼈던 감성을 글로 자세히 옮겨 두었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도시의 모습은 그대로지만 그때의 첫 감정은 그때뿐이기 때문이다. 이후 다시 찾은 피렌체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때와 다를 테니까 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경험이다. 

 

김연수 지음 | 컬처그라퍼 펴냄 | 264쪽 | 1만4000원

 

여행자란 멍청하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견뎌내는 사람

 

작가 김연수는 《언젠가, 아마도》를 통해 여행지에서의 단순한 묘사가 아닌 감정, 느낌 등의 서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한다. 여행을 즐기지만 관광을 좋아하지 않는 작가는 낯선 곳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저녁에 술 한잔 기울이며 함께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듯 솔직 담백하게 풀어간다. 아니, 담백해도 너무 담백하다. 그래서 작가가 여행한 곳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이 책은 전혀 쓸모가 없다. 여행지, 즉 관광지에 대한 세밀한 서술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관광지에 대한 정보도, 세밀한 묘사도 없는데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작가가 이야기하는 수많은 그곳에 절로 가고 싶어지고, 꼭 그곳이 아니더라도 어디론가 막연히 떠나고 싶어진다. 유명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묘사도 없는데, 왜 그런 마음이 들까? 바로 작가의 글이 주는 힘일 것이다. 화려한 표현법이나 미사여구가 전혀 없는 그의 이야기들이 오히려 글을 읽고 나서도 계속 곱씹어보게 한다. 

 

여행을 하려면 리스트로 정리할 만큼 다양한 멍청한 짓을 해결해야 하는 정신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버젓이 저지르는 자신을 견뎌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여행 중에 ‘집에 그냥 편하게 있을걸, 내가 왜 이곳에서 사서 고생하고 있나’ 싶을 때가 있다. 그걸 알면서도 여행을 하고 싶은 이유는 뭘까. 작가는 이런 실수를 참아내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건강한 젊은이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단순히 체력이 좋다고 견뎌낼 수 있을까. 

 

작가가 말하는 여행에 적합한 젊은이란 단순히 나이가 젊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실수에도 끄떡없는 정신력을 소유한 나이와 상관없는 모든 여행자를 말한다. 독일 바이에른주의 작은 도시 밤베르크에서 석 달 동안 머물며 유유자적 소설을 쓰며 시간을 보내고자 했던 작가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하고 빵이 동나기 전인 오전 8시 전에 동네 빵집에 가서 빵을 사야 하고, 슈퍼마켓이 문 닫기 전인 오후 4시에 장을 보고 저녁 먹고 설거지를 하는 등 뜻밖에도 한국보다 더 생활인이 되어 버린 현실에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밤마다 혼자 리슬링을 마시며 외로움을 달래다 보니 어느새 인생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어 있었고, 오히려 외로움을 즐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듯 낯선 곳에서의 여정은 서투른 자신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한다. 작가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관광지에서 느낄 수 없는 그곳에서의 정취, 깊이를 리슬링과 함께 충분히 느꼈으리라. 

 

 

여행의 끝, 하지만 이제부터 여행 시작

 

작가는 58편의 여행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원초적인 고독·외로움·낯섦·그리움 등의 느낌과 아울러 행복·안도·희망·위안 등에 대한 솔직한 감정들을 들여다본다. 물론 이런 것들이 작가만 경험하는 뭔가 특별하거나 과장되거나 하는 감정들은 아니다. 그저 우리 모두가 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감정들이다. 작가는 우리가 바쁜 일상 속에 잊고 살았던 감정들을 여행을 통해 그 감정들을 함께 공유하고 찬찬히 들여다보기를 희망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숨 막힐 만큼 지루한 일상생활을 하며 늘 어딘가를 떠나길 꿈꾼다. 우리가 여행을 꿈꾸는 건 그저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는 아닐 것이다. 여행은 모르던 세상을 알게 하고 다르게 보게 만든다. 여행이 끝나고 입국장을 빠져나오면 일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지만, 어느새 여행 전의 나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뀔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내 자신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행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여행을 시작하면 어느새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지만 그 일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여행이 만들어준다. 지금 당장 여러 이유로 일상을 탈피하기 어렵다면, ‘언젠가, 아마도’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어보면 어떨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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