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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영화 전성시대에 되새겨지는 ‘독립군 감독’의 말

[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13화 - 카메라를 든 독립 전사들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前 KBS PD)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8.29(Wed)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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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인도네시아 민족운동에 영향을 미친 《프리다》라는 영화가 있다.  네덜란드에 저항한 인도네시아인들의 투쟁을 그린 1948년 작품이다. 이 영화는 지난 8월12일에 막을 연 ‘독립운동 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의 주목을 적잖이 받았다. 영화제에 참가한 인도네시아의 ‘국민 배우’ 야띠 수라흐만은 “이 영화를 만든 ‘후융’이란 감독은 지금도 독립운동가로 기억되고 있다”면서 《프리다》가 감독의 조국에서 상영된 의미를 강조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한국인이며, 더욱이 그가 남의 나라 독립을 도왔다는 사실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후융은 허영이란 이름을 인도네시아식으로 발음한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히나츠 에이타로’라는 일본 이름으로도 불리었다고 하니, 이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진다. 허영(1908~52)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의 점령지 인도네시아에 선전대원으로 파견되었다가 종전 후 귀국을 포기하고 그곳에 눌러앉았다.

 

그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료에 드러난 그의 행적은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살아온 삶이었다. 허영은 16살 때 일본으로 밀항해 영화사에서 조감독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에이타로란 가명을 쓰며 일본인 행세를 했고 일본 여인과 결혼도 했다. 한데 1937년 봄 히메지궁 앞에서 영화를 찍다가 얄궂은 운명을 맞게 되었다. 폭발 장면에 쓰인 화약량을 잘못 계산한 탓에 궁궐의 일부를 훼손시키는 사고를 낸 것이다. 이 사건으로 경찰 심문을 받다가 조선인임이 들통이 나서 한동안 구금되는 시련을 겪었다.

 

 

영화 보다 더 영화 같은 삶, 세 얼굴의 카메라를 든 전사 ‘허영’

 

다시 한국으로 쫓겨난 그는 1941년 일제의 선전영화 《그대와 나》를 만들게 되는데, 이 영화는 한인 청년들을 전장에 내몰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막대한 제작비를 지원한 대작이었다. 당시 인기 절정의 친일 여배우 문예봉이 주요 배역을 맡았고, 남인수가 부른 군국가요인 영화 주제곡은 당시로는 드물게 음반으로 출시될 정도였다. 이 공로로 허영은 일본 군부의 요청을 받아 인도네시아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일본군 수용소에 억류된 연합군 포로들의 ‘안락한’ 생활을 다룬 《콜링 오스트레일리아》라는 다큐영화를 찍었다. 

 

아무리 선전용이라지만 이 영화는 일본 군인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포로들을 배우로 썼는데, 이들이 수용소에서 한가하게 스포츠를 즐기는가 하면 어느 여자 포로는 “너무 잘 먹어 살이 쪘다”며 다이어트 하는 코미디 같은 장면도 연출됐다. ‘도가 지나치면 화(禍)를 부른다’란 말마따나 일제에 대한 과잉 충성은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았다. 포로들의 실상을 ‘조작’한 이 영화는 종전 후 열린 도쿄 전범재판에서 되레 포로 학대를 입증하는 증거로 채택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허영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다. 맥아더가 점령한 일본에서는 연합군 포로를 기망한 ‘전쟁범죄 가담자’로 여겨질 테고, 해방된 한국에서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한 ‘친일 영화인’으로 낙인찍힌 터라 두 나라 어디에서도 그를 반겨줄 리가 없었다. 인도네시아 자료에는 그가 주변 한인들에게 “나는 한국말이나 역사도 잘 모른다. 한국에 가봐야 일본사람으로 취급받을 거다”라며 귀국을 단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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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에 자리 잡은 ‘일본인’ 허영은 다시 한인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현지 여성과 결혼도 했다. 그런데 1946년 식민종주국이던 네덜란드가 영유권을 내세우며 인도네시아를 침략하자 이에 맞선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 허영은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전선을 누비며 항쟁의 역사를 뉴스와 기록영상으로 담아냈다. 여기에다 영화 《프리다》를 제작해서 민중들의 항쟁 의지를 북돋아 주는데 큰 몫을 했다. 그는 ‘독립 인도네시아’를 꿈꾸는 투사로 또 한 번 인생을 갈아 탄 셈이었다.

 

1949년 네덜란드군이 물러간 뒤 허영은 3편의 영화를 더 만들어 이 나라 영화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병으로 42년의 길지 않은 삶을 마감한 허영은 이처럼 자신이 몸담은 체제와 현실 속에서 ‘기막힌’ 처세술을 발휘한 식민지 영화인이었다. 허나 그에게 독립운동이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 일지언정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이 아니란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반면에 침략과 폭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스크린에 옮긴 ‘레지스탕스 영화인’도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질로 폰테코르보(1919~2006) 감독은 정치 영화의 ‘고전’으로 불리는 《알제리 전투》를 만들어 1966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명장이다. 1941년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반파시즘 저항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서 ‘가리발디 여단’의 사령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폰테코르보는 1956년 구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공산당을 탈퇴하여 침략에 저항하는 자신의 신념을 이어갔다.

 

영화 《알제리 전투》의 무대가 된 알제리는 132년 동안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1962년 대규모 민중 봉기를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알제리 신정부는 이 같은 항쟁 기록을 영화로 남기기 위해 ‘저항의 아이콘’인 그를 감독으로 영입했다. 이 영화는 실제 전투현장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참전용사들이 직접 출연하는 등 마치 기록영화 찍듯이 실감나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민중 항쟁을 소재로 한 탓에 우리나라에서는 군사독재 시절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폰테코르보 얘기를 하다 보니 문득 영화감독 윤봉춘(1902~75)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독립군 영화인’이자 작년에 사망한 배우 윤소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윤봉춘은 3·1운동 때 옥고를 치른 뒤 1920년 만주에서 항일 비밀결사대에 입단해 무력항쟁에 나섰다. 이때 국내 진격을 위해 일제의 터널 폭파, 통신시설 파괴를 모의한 것이 발각되어 또 다시 일경에 붙잡혔다. 1년 6개월 만에 풀려난 그는 고향친구 나운규의 권유로 영화계에 발을 들였고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들을 주로 만들었다. 또 1940년대 들어 많은 영화인들이 일제의 선전용 영화제작에 동원됐지만 그는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은둔하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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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자 윤봉춘은 《윤봉길 의사》 《한말풍운과 민충정공》 《백범국민장》 등 독립투사들의 삶과 저항정신을 다룬 ‘광복영화’를 여러 편 찍었고, 특히 《유관순》은 3편이나 만들었다. 그는 “우리 영화계에 이러한 인물들을 내세워서 한국 영화에 빛나는 칠을 하고 싶다”라는 말을 남겼다. 올곧은 항쟁의 삶을 ‘온전히’ 스크린에 옮기는 것이 한국 영화의 정신적 맥을 세우는 일임을 강조한 것이다.

 

 

윤봉춘 “한국 영화에 빛나는 칠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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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스터 선샤인》이란 드라마가 또 다시 역사 왜곡과 친일 미화 논란에 휩싸였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왜곡 사실에 대해 강력하게 조치해 달라는 글에 3만 명 가량이 동의할 정도다. 영화 《덕혜옹주》 《군함도》의 왜곡 시비가 엊그제 같은데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일까? 시청률이나 흥행을 쫒다보니 역사적 사실을 허구로 포장하려는 ‘달콤한 유혹’에 빠지게 되는 걸까. 

 

세계 영화계에서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흥행에 성공한 역사 영화가 셀 수 없이 많다. 제국주의 시대만 봐도 《간디》 《아라비아의 로렌스》 《마지막 황제》 등 실존 인물을 실감나게 다룬 작품들이 즐비하다. 더군다나 우리 항쟁의 역사에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인물이나 사건들이 차고 넘친다. 때문에 역사를 허구로 ‘덧칠’하기보다 이런 ‘꺼리’들을 찾아내서 사실적으로 담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해방기 이후 근 70년 만에 제2의 광복영화 전성시대를 맞은 지금이야 말로 우리 영화의 정신적 맥을 강조한 ‘독립군 감독’의 말을 되새겨야 할 때다. 불쑥 한국 영화 역사에 ‘빛나는 칠’을 할 누군가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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