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독립영화 《어른도감》 《살아남은 아이》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9.01 10:56
  • 호수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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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빛나는 발견, 독립영화 필견작 2편

 

부의 양극화 사회라고들 한다. 영화계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진 않다. 상업영화 안에서도 거대 투자배급사의 손을 잡은 특정 작품들의 제작비는 날로 치솟는 중이다. 상영관 독점 이슈는 비단 하루 이틀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제작비와 개봉 규모 같은 외적인 덩치가 그 영화의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극장가를 자세히 살펴보면 빛나는 문제의식과 야무진 만듦새로 똘똘 뭉친 독립영화들도 여럿이다. 

 

최근 개봉한 독립영화 두 편은 올해의 ‘빛나는 발견’으로 꼽을 만한 필견작이다. 이미 각각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살아남은 아이》),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어른도감》)에서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은 작품들이다. 극의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지만 상실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 위로와 희망을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느슨한 연결점을 가지기도 한다.  

 

영화 《어른도감》 © 영화사 진진 제공

 

어른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 모두의 성장을 이야기하는 《어른도감》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걸까. 아이와는 다른 무엇이 어른의 삶을 만드는 것일까. 어른이라고 해서 외로움이 없고, 상처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것일까. 성인(成人)이라는 건 일정 나이가 되면 거저 주어지는 사회적 위치지만, 어쩐지 우리 모두는 ‘어른’이라는 알 수 없는 단계를 향해 평생 나아가야 하는 존재 같다. 성장에는 나이가 없다.

 

8월23일 개봉한 《어른도감》은 중학생 경언(이재인)을 통해 이 같은 고민들을 하나하나 짚어본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면서 경언은 혼자가 됐다. 엄마는 어릴 적에 집을 나간 지 오래다. 이런 경언 앞에 느닷없이 생면부지의 삼촌 재민(엄태구)이 나타난다. 삼촌은 어릴 적 가족들과 크게 싸운 뒤 집을 나갔던 터다. 법적 후견인 자격으로 경언과 함께 살게 된 재민이 형의 사망보험금 8000만원을 날리면서, 경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삼촌과의 ‘패밀리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유부녀에게 접근해 돈을 얻어내는 재민이 약사 점희(서정연)에게 접근하는 동안, 경언은 재민의 딸인 척 연기하며 점희의 마음을 얻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경언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야무진 소녀와 철없는 삼촌이 투닥거리며 정을 쌓아가는 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인물의 구석구석을 매만져 탄생한 디테일과 천연덕스러운 배우들의 연기가 보는 내내 기분 좋은 웃음을 안긴다. 코믹하게 포장된 결을 한 겹 들추면, 각 인물들이 마음에 안고 있던 상처와 외로움이 웅크리고 있다. 가족들을 떠나 살 수밖에 없었던 재민의 사정, 엄마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안고 있는 경언, 아무에게도 고백할 수 없던 점희의 과거까지. 각 인물들은 외톨이로 살았지만 어느덧 서로에게 의지하고 위로받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어른도감》은 어른이라는 존재의 해부도감이 아니다. 다만 어른의 조건을 고민해 보려는 영화다. “누군가에게 시간을 들인다는 건, 다신 돌려받지 못할 삶의 일부를 주는 거야”라는 대사는 영화의 마음을 거르고 걸러 축약한 한마디다. 돌려받지 못할 삶의 일부를 타인에게 주고 또 받으면서 우리 모두는 성장하며 어른이 돼 가는 것이다. 

 

이 작품은 김인선 감독이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제작 과정(10기)을 통해 처음으로 만든 장편영화다. 그간 감독은 단편 《아빠의 맛》 《수요기도회》 등을 통해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따뜻한 드라마의 화법으로 풀어내는 영화들을 선보여 왔다. 장르적 성격이 두드러져 첫눈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뷔작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감독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화법으로 차근차근 완성한 영화라는 감흥을 남긴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 © CGV아트하우스 제공


 

상실 이후의 애도 그리고 용서에 관하여, 《살아남은 아이》 

 

8월30일 개봉한 신동석 감독의 《살아남은 아이》는 제목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안긴다. 이 제목은 자동적으로 또 하나의 존재를 연상케 한다. 살아남은 아이가 있다면, 살아남지 못한 아이도 있을 것이다. 

 

인테리어 가게를 운영하는 부부 성철(최무성)과 미숙(김여진)은 몇 개월 전 아들을 잃었다. 아들 은찬은 함께 물놀이를 갔다가 물에 빠진 친구 기현(성유빈)을 구하고 대신 숨졌다. 이런 아들의 희생을 기려 의사자(義死者) 지정을 진행하던 성철은, 기현이 사건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철은 기현을 데려다 인테리어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기현을 보며 아들의 죽음을 떠올리고 괴로워했던 미숙 역시 차츰 기현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세 사람이 점차 유사 가족의 모습을 이뤄가던 어느 날, 기현은 은찬의 죽음에 얽힌 뜻밖의 고백을 털어놓는다.

 

영화의 초반은 애도의 정서로 가득하다. 성철과 미숙은 아들을 잃은 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아들을 애도하는 중이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상실 후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느냐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현재는 애도 그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감독이 과감하리만치 과거를 제하고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은 그런 의도로 보인다. 이 영화에서 부부의 죽은 아들 은찬의 생전 모습은 거의 지워져 있다. 그 흔한 플래시백 장면 하나 없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 © CGV아트하우스 제공


 

성철에서 미숙으로, 다시 기현을 조명하는 카메라는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을 짊어지고 가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이후 기현의 고백을 기점으로 영화의 질문은 방향을 조금 바꾸어 ‘용서’를 향해 나아간다. 애도 이후에는 어떤 과정이 기다리고 있는가. 남은 숙제가 용서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살아남은 아이》는 아들을 잃은 남자의 사연을 그린 다르덴 형제 감독의 《아들》(2002)이 제기한 문제들과 맞닿은 구석도 있다. 그보다 차별화돼 짙게 느껴지는 건 세월호의 흔적이다. 감독이 의도한 것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그 국가적 아픔을 떠올리게 한다. 부부의 아들 은찬이 익사했다는 설정이 우선 그렇다. 유가족에게 “(보상금도 받았다면서)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소리치며 냉대하는 이웃들, 아이가 죽은 진짜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인 부모의 절규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애도와 용서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영화는 특정 사건의 범주를 넘어 훨씬 폭넓은 것을 조망하고 있다. 삶은 상실이 있기에 고통의 과정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기에 기적의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 말이다.

 

여기에는 사회가 온전히 전하지 못했던 위로와 조심스러운 희망이 있다. 어떻게 보면 《살아남은 아이》는 우리에겐 상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했다는 진단에서 나온 작품으로도 읽힌다. 치유가 불가능할 것 같은 상처를 안고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살아남은 아이》는 이들을 껴안으려는 영화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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