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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적인 스릴러 영화 화법 거부한 《암수살인》

《암수살인》, 한국 스릴러 영화의 맹점을 피하다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0.05(Fri) 16:50:00 | 15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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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 가장 사랑받는 직업군 중 하나는 단연 형사다. 그러나 장르적 재미를 위한 형사나 가장으로서의 형사,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형사가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형사가 등장한 사례는 쉽게 발견하기 힘들다.

 

그나마 떠올릴 수 있는 건 대중의 추억 속에 남아 있는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송강호) 정도다. 박두만이 인상적이었던 건 ‘널(살인마)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공적 분노가 사적인 감정을 앞섰기 때문이다. 《암수살인》의 형사 김형민(김윤석)은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과 DNA가 비슷한 인물이다. ‘직업윤리’에 있어서만큼은 한발 더 앞서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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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석의 관록, 주지훈의 패기


《암수살인》에서 김형민과 대립 각을 이루는 또 하나의 인물, 사이코패스적인 살인범은 어떤가. 한국영화계에서 살인범은 형사만큼이나 지분이 넓다. 그러나 자신의 이득을 위해 추가 살인을 자랑하듯 자백하는 살인범 역시 드물다. 이 경우엔 《추격자》의 지영민(하정우)을 잠시 호출할 수 있겠다. 

 

경찰서에 끌려간 지영민은 그 스스로 범행을 여러 번 자백했지만 시스템의 무능을 틈타 두 발로 경찰서를 걸어 나왔고, 슈퍼로 가서 기어코 여자들을 죽였다. 《암수살인》의 살인범 강태오(주지훈)는 지영민의 변종이다. 1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간 강태오는 자신의 형량을 낮추기 위해 추가 범행을 털어놓는다. 법을 역이용하는 강태오는 단순히 악마여서가 아니라, 지능까지 갖춘 악마여서 ‘감정불가’인 인물이다. 


흥미롭게도 김형민의 직업윤리는 강태오가 게임을 벌일 수 있는 판을 깔아준다. 《암수살인》이 인상적인 건, 형사와 살인범 사이에 형성되는 ‘기이한 믿음’이다. 강태오에겐 김형민이 자신의 말에 관심을 가지고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살인 사건을 파 줄 것이란, 그럼에도 완벽한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하리란 ‘믿음’이 있다. 

 

김형민에겐 강태오가 자신의 패를 모두 보여주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서 진실의 부스러기를 찾아낼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다. 이러한 일말의 믿음이 없었다면 성사 자체가 애초에 되지 않았을 게임. 그 믿음이 형성되는 순간, 《암수살인》의 방향은 명확해진다. 믿음을 가장한 강력한 목적성. 팽팽한 심리 싸움이 스크린에 차오른다. 


피해자는 있지만 신고도, 시체도, 수사도 없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건인 암수(暗數)범죄를 다룬 《암수살인》에는 장르적으로 없는 것들이 많다. 이 영화엔 ‘형사 vs 범인’ 구도에서 응당 그려지는 액션이 없고, 그 흔한 추격전도 없다. 무엇보다 범인의 체포 장면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만든 이들의 대담함이 읽힌다. 스릴러 장르의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인 ‘범인 찾기’의 스릴을 초반에 과감하게 공개·포기하고도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설정이기 때문이다. 


추격과 액션이 빠진 자리에 들어서 있는 것은 말과 말의 부딪침, 상대의 의중을 탐색하고 교란시키는 고도의 심리전이다. 이들의 두뇌 싸움이 이뤄지는 ‘4각의 접견실’은 그러니까 하나의 포커판이 된다. 강태오는 김형민이 조금 더 많은 판돈(영치금과 수사)을 걸도록 힌트는 주되, 정보를 모두 줘서는 안 된다. 그런 강태오에게 김형민은 적당한 채찍과 당근을 안기며 그가 조금 더 많은 정보를 흘리도록 유도해야 한다. 강태오가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미스터리다. 이에 대응하는 김형민의 말 하나하나가 스릴이다. 섬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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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배우들이 1대 1로 독대하는 접견실 장면들은 중요할 수밖에 없고, 이를 이끌어가는 배우들의 농밀한 연기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김윤석은 역시 김윤석이다. 《타짜》 《추격자》 《1987》 등을 통해 이미 여러 번 연기의 깊은 골짜기를 접수했던 김윤석은 이젠 힘주지 않고도 극의 공기를 낚아채는 방법을 터득한 듯하다. 연기가 매우 담백하다. 담백함은 자칫 비어 보이기 쉽지만 김윤석의 담백함은 잔여물이 없어서 오히려 긴 잔상을 남긴다. 


《암수살인》을 보기 전부터 이 영화는 김윤석의 관록에 맞서는 주지훈의 패기가 얼마나 발휘되는가에 따라 극적 긴장감이 좌우될 수밖에 없다고 봤다. 주지훈은 그 기대를 뛰어넘는다. 영화에는 강태오 악마성의 기원이 플래시백으로 등장한다. 이는 자칫 살인마의 악마성에 해명과 이유를 달아준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범죄자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켜 사건의 온도를 낮출 수 있다는 함정도 있다. 이 측은지심을 방어해 내는 건 주지훈의 연기다. 주지훈은 관객이 살인범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부분을 그 스스로가 완강하게 버티며 막아낸다. 주지훈이 인상적인 건, 이물감 없이 소화한 사투리 때문만이 아니다. 시선 처리부터 걸음걸이 등 미세한 부분까지 조율해 캐릭터에 살을 입혔다. 

 


끝까지 흥분하지 않는다


“어데 있노, 니….” 김형민은 세상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이들을 향해 묻는다. 《암수살인》을 대표할 수 있는 대사다. 보통의 스릴러 영화들과 달리 《암수살인》에서 형사가 바라보는 종착지는 범죄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쉽게 발견하기 힘든 드문 자세다.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게다가 누구 하나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암수범죄는 ‘가시적인 성과’가 중요시되는 현실에서 뒤로 밀려나기 쉬운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형민은 매달린다. 사비로 영치금을 내면서도 매달린다. 파출소로 좌천을 당하면서도 매달린다. 김형민의 직업윤리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더 예민하게 작용하는 게 분명하다. 우리가 잊고 지내던 가치다. 김형민 물음의 방향은 그래서 어느 순간 ‘우리’ 혹은 ‘잊힌 가치’를 향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암수살인》에도 허들은 존재한다. 건조한 톤이다. 다큐멘터리적인 수법으로 사건을 추격하기에 장르 영화 특유의 쾌감이 덜하다. 약점으로 지적될 공산이 큰 부분이다. 흥미롭게도 그래서 《암수살인》은 기억될 만하다. 범죄물이라는 장르가 허용한 여러 영화적 유혹에도 불구하고 《암수살인》은 끝까지 흥분하지 않는다. 자극적으로 관객의 감정에 동요를 이끌어 내려고도, 신파를 통해 울음을 유인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보기 드문 캐릭터인 김형민만큼이나, 보기 드문 접근 자세다. 《추격자》의 성공 이후, 관성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엇비슷한 한국 스릴러물 사이에서 《암수살인》이 단연 돋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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