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할 땐 언제고, 교황 마케팅 나선 北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0.29 11:20
  • 호수 151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영종의 평양인사이트] 종교 자유 없는 北의 교황 초청 속내…‘평화의 사도’ 활용 ‘脫불량국가’

“로마 교황이 어떤 위치에서 세상 사람들을 위해, 더욱이 우리 민족과 겨레를 위해 무슨 일을 해 왔는지 알지 못한다.”

4년 전인 2014년 8월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맹비난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중앙통신은 교황의 서울 방문과 관련해 “그(교황)가 무슨 목적으로 남조선을 행각하며 괴뢰들과 마주 앉아 어떤 문제를 논의하려 하는지 알지 못하고 관심도 두지 않고 있다”면서도 비방의 목소리를 높였다. “로마 교황이 하필이면 일 년 열두 달 소털같이 하고많은 날들 중에 굳이 골라 골라 우리의 정상적인 계획에 따라 진행된 최신 전술로켓 시험발사 날에 남조선 행각길에 올랐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북한의 이 같은 비방은 교황의 서울 도착 당일 북한이 300㎜ 방사포로 추정되는 로켓 발사를 강행하자 국제사회가 비판을 쏟아낸 데 대해 반박 입장을 밝히던 중 나왔다.

교황에 대해서까지 무차별적인 비난 공세를 퍼붓던 북한이 로마 교황청을 향해 유화 제스처를 취하고 나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교황의 평양 방문 초청 의사를 밝히고 나선 것이다. 교황 방북 초청 의사를 밝힌 건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서다. 문재인 대통령의 권유에 김정은이 교황 초청의 뜻을 밝히고, 이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월18일(현지 시각) 바티칸 교황청을 방문해 프란치스코 교황과 면담했다. 문 대통령이 김정은의 초청 의사를 전달하자 교황은 “문 대통령이 전한 말씀으로도 충분하지만, 공식 초청장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방북 제안을 사실상 수락한 것이란 게 청와대의 해석이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 당시 맹비난했던 북한의 태도가 달라졌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교황 초청의 뜻을 밝힌 것이다. ⓒ EPA 연합


4년 전 교황 서울 방문 때 방사포 발사

교황의 평양 방문 프로젝트는 문재인 대통령이 오랫동안 공들여 온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취임 직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를 교황청 특사로 파견했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교황의 역할을 요청하는 친서를 전달했다. 당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로 인해 대북 선제 타격론까지 나오던 시점이다. 교황청은 전쟁이 아닌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강조했고, 올 들어서는 평창동계올림픽 단일팀 구성과 남북한 및 북·미 회담 성공을 지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문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 “한반도에서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 중인 한국 정부의 노력을 강력히 지지한다”며 힘을 실어줬다.

교황 방북 추진과 관련해 북한의 종교 실태도 주목받고 있다. 북한도 명목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내세운다. 1972년 개정 북한헌법에서 김일성은 ‘신앙의 자유’를 명시했다. 평양에는 칠골교회와 장충성당을 비롯한 종교 시설도 있고, 방북 인사들에게 신도들이 예배를 보는 장면을 공개하기도 한다. 해방 직후 북한에 5만5000여 명 수준의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북한 유일의 평양 장충성당에는 주일이면 70〜80명, 규모가 큰 축일 때는 200명 안팎의 천주교 신자가 모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면 이곳에서 미사를 집전할 공산이 크다. 하지만 북한 지역에는 교황청이 공인한 사제가 없기 때문에 평신도끼리 집전하는 공소 예절만 이뤄진다.

북한은 종교 문제에 대해 양날의 칼을 휘둘러왔다. 1972년 헌법의 경우 언뜻 보면 여느 자유국가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듯 밝히고 있지만, 동시에 종교 활동을 억압하고 법률적 제재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반종교 선전의 자유’에 무게를 두고 있다. 북한 지역이 원래부터 이처럼 종교의 사막지대였던 것은 아니다. 1948년 김일성 정권이 수립되기 이전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기독교가 번창한 곳으로 꼽혔다. 기독교와 천주교도 남한보다 먼저 전파돼 곳곳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북한 정권 수립 이후 김일성은 “종교는 아편”(1972년 발행 김일성저작선집)이라며 지속적인 탄압정책을 폈다.

김정은 위원장의 할아버지 김일성 집안은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평양 만경대구역의 이전 지명인 평남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마을에 있던 하리교회 장로였다. 또 그의 둘째 딸이자 김일성의 생모인 강반석은 이 교회 집사였다. 6·25 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된 하리교회는 1992년 칠골교회로 거듭났다. 1989년 김일성이 광복거리 건설현장에 나왔다가 “다시 교회를 세우라”로 지시한 데 따른 조치였다. 김일성은 박정희 정권 때 외무장관을 지내다 월북한 최덕신을 만난 자리에서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교회 다니던 일이 떠오른다”고 회상한 뒤 그 교회를 재건하기로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이 교회가 반석교회란 별칭으로 불린 것도 김일성의 생모와 관련이 있다고 탈북 인사들은 전하고 있다.

북한 최고 권력자인 김정은이 종교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는 아직 드러난 적이 없다. 그렇지만 10대 시절 스위스 조기유학 기간에 서방세계의 종교에 대해 충분히 접하고 생각할 기회를 가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인터넷 등을 통해 지금도 해외 동향에 밝은 편일 것이란 점에서 기독교 등 종교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 정권 등장 이후 그가 참석한 송년 행사 등에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장식물이나 인형 등이 등장하고 있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월18일 바티칸 교황청을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의 초청 의사를 전달했다. ⓒ AP 연합


교황 방북하면 김정은 체제 면죄부 받게 돼

앞으로 문제는 교황의 방북 여정을 어떻게 짤 것인가 하는 문제다. 교황청에 구두 초청 의사를 밝히긴 했지만 북한 당국의 고민은 깊을 수밖에 없다. 교황이 평양 방문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북한 체제와 주민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에서다. 태영호 전 런던 주재 북한 공사는 자신의 책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1991년 북한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북을 추진했던 뒷얘기를 전하고 있다. 교황청은 당시 ‘진짜 신자를 데려오라’는 방북 조건을 북측에 제시한 것으로 태 전 공사는 전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어렵게 찾은 ‘진짜 신자’가 “한번 마음속에 들어온 하느님은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토로하자 교황을 초청하려던 계획을 접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만큼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거나 교황 같은 상징적 인물의 평양 방문이 체제 균열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교황이 한반도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에 방점을 둔다면 김정은 체제는 사실상 면죄부를 받는 효과를 노릴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 등을 염두에 둔 비판 메시지를 낼 경우 북한의 심기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김정은이 교황 방북 초청장 발송 외에도 실제로 교황이 평양을 방문하도록 하기 위해 종교와 관련한 전향적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