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류관 냉면 말고 '북한사람'도 좀 봐 달라”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18.11.08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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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국면 속 北 인권 관심 없는 南…탈북민 허영희씨의 절규

 

"북한과의 교류·협력 강화가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에 실효성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인권 개선 문제에 관해 전하고 있는 메시지다. 북한과 국제사회 모두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한반도 평화 모멘텀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면, 두루뭉술하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 같은 희소한 이벤트에서 '비핵화' '경제' 등만 언급되자 의문은 점점 커졌다. '김정은 정권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할 수 있는 장(場)이 사라지고 나서 과연 북한 인권 개선을 이루겠는가.'


남편·아들 강제북송 “인권 논의 왜 없나”

남한에서는 정부, 언론, 학계를 막론하고 북한 인권 논의를 등한시 혹은 터부시하는 분위기다. 반면 미국, 유럽 등 해외에선 진지하고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 왔다.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을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북한 인권 실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탈북민들을 남한 매스컴 대부분은 흥미 위주나 비주류 프레임으로 다룬다. 특히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탈북민들의 우려와 호소는 철저히 묻혀버렸다. 2014년 12월 월남해 제주도에 정착한 허영희씨는 답답한 심정을 토로할 길이 없어 발만 동동 굴리다, 손을 건네온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지난 6월 처음 인터뷰했다. 그 뒤로도 남한은 허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북한 혜산시 예술대 성악과 교수로 있다가 체제에 환멸을 느껴 2014년 12월 월남한 허영희씨. 제주도의 한 리조트에서 청소 일을 하는 허씨는 북한 인권 관련 행사에서 성악 공연을 하기 위해 서울을 찾았다가 시사저널과 만났다. 앞서 익명성을 포기하고 미국 워싱턴포스트와도 인터뷰했지만, 남한에서 자신의 답답함과 우려를 토로할 곳은 거의 없었다고 허씨는 말했다. ⓒ 시사저널 오종탁


 

허씨는 "남한사람들이 전쟁 위험에 떨다가 (대화 국면을 맞아) 북한과 말이라도 주고받으니 잘 됐다고 하는 가운데 속마음을 털어놓질 못하겠더라"며 "북한 인권을 외국에서는 좀 말하는데, 남한에선 주목하는 이가 거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허씨는 제주도의 한 리조트에서 청소 일을 한다. 북한에 있을 땐 함경도 혜산시 예술대 성악과 교수로 재직했다. 남편 최성가씨는 양강공연악단의 트롬본 연주자였다. 아울러 중국 국경 근처의 혜산시는 대중(對中) 거래로 북한 여타 지역보다 경제 사정이 나았다. 그곳에서 허씨는 '중산층'에 속했다. 다 내던지고 남한에 와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고 허씨는 회상했다.

요즘은 북한에 있는 남편과 아들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앞서 허씨는 먼저 탈북하며 '남한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나라라면, 식구들도 부르자'고 다짐했다. 2016년 9월 탈북 브로커에게 거액을 주고 남편과 아들을 북한에서 빼냈으나, 남한까지 데려오는 데 실패했다. 중국에서 한 차례 전화를 걸어온 남편은 '장백과 연길 사이 어느 지점쯤을 통과하고 있다'고 전한 뒤 연락이 끊겼다. 중국 공안에 의해 강제북송된 두 사람은 북한 내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것으로 알려졌다. 허씨는 "이렇게 강제북송되는 사람이 정말 많다. 이 밖에도 인권 없이 노예처럼 사는 북한사람들을 간과하고, 경제(남북 경협)가 어떻다느니 말하는 걸 보면 가슴이 터진다"고 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지난 6월 인터뷰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것으로 추정되는 아들 최경학씨의 어린 시절 사진을 들어 보이는 허영희씨. ⓒ 워싱턴포스트 홈페이지 캡처

 

 

 

 

더 큰 혼란과 상처는 남한사람들로부터 온다. 남한에선 북한이 '옥류관 평양냉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허심탄회한 태도' 등 연성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다. 허씨는 "주변에서 '우리도 너희 고향(북한)에 곧 가서 옥류관 냉면을 맛볼 수 있겠다' '백두산을 중국이 아닌 북한을 통해 오를 날이 머지않았다'는 식으로 얘기할 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생각에 잠기게 된다"며 "당장 통일이 될 것처럼 여겨 옥류관과 백두산부터 떠올리는데, 이면에 있는 북한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평양에 딱 한 곳뿐인 옥류관은 북한 주민들이 마음만 먹으면 가는 '냉면 맛집'이 아니다. 또 당국의 행사나 관광객 수요 등을 빼고 일반 주민들이 맛볼 수 있는 양은 제한적이다. 허씨는 "북한에서 옥류관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람은 권력층 뿐"이라면서 "옥류관 국수(냉면)를 먹을 수 있는 표 대부분을 권력자들이 나눠 가지듯이 하는데, 북한 당국이 군중의 눈을 의식해 중심구역(평양시 주변) 주민들에 한해 1년에 겨우 한 두장씩 나눠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심구역 사람들도 형편이 넉넉한 게 아니라서, 배급받은 표를 전문 매매꾼(옥류관 국수 암표상)들에게 팔아버리기 일쑤"라며 "국수 한 끼 먹을 바에야 표 판 돈으로 쌀을 사서 온 가족이 나누는 게 낫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평양에 쉽게 접근하지도 못하는 지방 사람들은 옥류관 냉면 구경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허씨는 평양에 출장이나 공연을 갔다가 매매꾼에게서 표를 구매해 옥류관 냉면을 먹어본 적이 있다.

옥류관 냉면과 함께 4·27 정상회담 만찬 테이블에 올랐던 들쭉술엔 북한사람들의 피와 땀이 어려있다고 허씨는 말했다. 들쭉은 백두산에 많은 야생 열매다. 북한 무역국은 주민들을 동원해 들쭉을 채취하고, 이를 팔아 외화를 벌어들인다. 중국 국경 근처까지 들쭉을 따러 갔다가 그대로 탈북하는 주민도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허씨는 "TV에서 남북 정상이 마시는 들쭉술을 보는 순간 들쭉 밭과 숱한 탈북민들이 떠올랐다"며 "남한 사람들은 '맛 좋겠다. 우리도 먹어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라고 한숨 쉬었다.

김정은 정권의 인권 유린에 환멸을 느껴 탈북했는데, 남한 사람들은 김 위원장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하기 바쁜 상황이다. 허씨는 무너져내리는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있다. 화해 무드에 돌을 던지고픈 맘은 없다. 김정은 정권 뒤에 있는 북한사람을 봐주고, 이 절호의 대화 기회에 인권 문제도 꼭 논해 달라는 게 허씨의 유일한 바람이다.


“北 체제에 항변하기 위해 월남”

월남한 지 4년이 채 안 되는 허씨는 북한사람들의 최근 모습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는 태어나 30여 년을 사회주의 건설기에서, 이후 30여 년은 개혁·개방 없는 자본주의 상태에서 살았노라고 밝혔다. 허씨는 "당국의 금지·통제 하에서도 북한 주민들은 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녹아들어 있다. 이 속에서 돈 벌어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남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못 할 것"이라며 "그나마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뒤섞인 30여 년 동안 북한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씩 달라져 왔다"고 말했다.

허씨 역시 1980년대에 결혼한 뒤 남편과 함께 돈을 버느라 앞만 보고 달렸다. 모순된 사회를 온몸으로 겪으며 지내던 중,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생겼다. 2012년의 어느 날 허씨는 북한군 보위부의 부름을 받았다. 자신에게 성악을 배우는 제자를 감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제자는 중국에 사는 친척으로부터 남한 물건을 구해와 북한 주민들에게 판매한 적이 있었다. 보위부는 제자가 남한 물건을 팔았다는 증거를 잡아 처벌하기 위해 허씨를 이용하려던 것이다. 허씨는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 주저하는 허씨에게 보위부 관계자는 "아들이 제자보다 더 중요하지 않느냐"며 윽박질렀다. 대충 알겠다고 답한 허씨는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 대신 제자에게 보위부로부터 체포당하기 전에 북한을 떠나는 게 좋겠다고 몰래 제안했다. 이런 정황이 발각돼, 허씨와 제자는 2013년 1월 구금 시설에 잡혀갔다.

76일의 구금 기간 허씨와 제자는 뒷짐 지고 엎드린 채 하루 18시간을 버텨야 했다. 치욕적이었다. 동시에 깨달음의 시간이기도 했다. 허씨는 "이때서야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며 내가 사는 나라를 제대로 알게 됐다"고 밝혔다. 구금 시설에서 풀려나고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는 "처음엔 이 희망 없는 나라에서 더 살아봐야 뭐 하나 싶어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그러다 마지막으로 모험을 한번 해보자고 결심하며 제자와 함께 탈북에 나서게 됐다"고 했다.

 

 

최근 북한인권정보센터 주최 행사에서 함께 탈북한 제자와 성악 공연을 한 뒤 사진 포즈를 취하는 허영희씨 ⓒ 허영희씨 제공


 

허씨는 "못 살아서, 밥 먹고 배불러지고 싶어 탈북한 게 아니다"라며 "북한 제도에 항변하기 위해 남한에 왔다"고 강조했다. 북한 당국이 탈북민을 '어중이떠중이 인간쓰레기'라고 비난하는 데 대해 그는 "탈북민이 몇십 명이 아닌 몇만 명(올해 기준 3만2000여 명)인데, 이들이 모두 어중이떠중이 인간쓰레기인가"라고 되물었다. 어느 쪽도 민족의 흐름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허씨는 목소리를 높였다.

내내 당당하던 허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뒤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왔다. 많이 약해져 있었다. 남한 정부와 시민들의 인식·태도에 하루하루 고통스럽다고 털어놨다. 허씨는 "가족만 곤경에 빠뜨리고, 왜 여기 왔을까 별생각이 다 든다"며 "우리 북한사람들이 좀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울면서 호소했다.

한편, 사단법인 북한인권정보센터(NKDB)가 현재까지 수집한 북한 인권 피해 사건은 총 7만1473건, 피해자는 4만2981명이다. 공개·비공개 처형이나 구금 시설에서 폭행 또는 식량·치료 미비로 목숨을 잃은 경우 등을 포괄하는 개념인 생명권 침해가 전체 사례에서 차지한 비율은 1990년대 20.5%였으나 2000년대에는 7.1%로 13.4%포인트 줄었다. 그러다 2010년 이후 사례에선 생명권 침해가 차지하는 비율이 13.3%로, 2000년대보다 6.2%포인트 증가했다. 이에 대해 센터는 "정권 안정, 사회 질서와 치안 유지 정책 강화를 위해 비공개 처형 등의 비율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피의자와 구금자의 권리가 침해된 사건의 비율은 2010년대 전체의 8%로 2000년대(4.7%)보다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센터는 "김정은 시대 이후 북송된 탈북자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는 등 사회 전반적으로 처벌 강도가 높아지면서 구금 시설 내 환경이 더 열악해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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