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예술의 자율성은 요원한 것인가?
  • 김정헌 화가 前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1.19 15:06
  • 호수 151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딱 10년 전의 일이다. 나는 임기의 반을 채우기도 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 위원장에서 해임을 당했다. 원래 문예위는 독임제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민간(예술인) 자율 기구로 전환하기 위해 참여정부 시절에 만든 기관이다. 12명의 각 문화예술 영역의 위원들이 모여 모든 의사결정을 예술인 스스로 하기 위한 기구다.

처음에는 위원장도 위원들 사이에서 호선으로 선출했다. 그러던 것이 ‘공공기관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제2기인 나부터 이 법률에 의해 공모로 위원장을 뽑았다. 여기부터 위원회의 ‘자율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권은 노무현 정부를 좌파정부로 규정하고 소위 ‘좌우균형화 전략’이라는 명목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된 모든 기관장들을 좌파로 몰아 숙정(?)하기 시작했다. 유인촌이라는 배우를 문화부 장관으로 앉히고, 그중에 ‘문예위’의 나를 비롯한 현대미술관 김윤수 관장, 국립예술종합학교 황지우 총장 등을 표적으로 삼아 집요하게 축출을 시도했다.

 

ⓒ 시사저널 박정훈


내가 쉽게 말을 듣지 않자 표적조사를 하고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나를 며칠 만에 해임한 것이다. 나를 비롯한 해임 당한 몇 사람들은 즉시로 해임무효소송을 제기해 거의 다 승소하게 되는데, 나 같은 경우는 해임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져 신문·방송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 지붕 두 위원장’ 같은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이 사건을 떠올리는 것은 무슨 무용담을 상기시키고자 함은 아니다. 내가 해임 당한 즉시 내 후임인 오광수 위원장과 제2기 위원들의 허수아비 같은 행적으로 ‘문예위’의 자존심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지켜져야 할 위원회의 ‘자율성’이 땅바닥에 내팽개쳐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위원회가 보유한 기금(내가 위원장으로 있을 당시 4000억원가량)은 문체부 등의 상급기관도 함부로 개입이 금지돼 있는데 이를 함부로 지시하여 기금에 손실을 가져왔다든지, 모든 결정 사항을 위원회 스스로 결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문체부의 일개 국·과장 손에 놀아난 것이 위원회의 자율성을 땅에 떨어뜨린 대표적인 사례다.

예술 지원기관의 이러한 추락은 결국 다음 정부인 박근혜 정부에서 그 적폐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블랙리스트’ 사태인 것이다. 여러 기관이 관계돼 있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심한 것이 예술가와 예술가 단체의 활동을 지원하는 이 ‘문예위’의 적폐가 가장 심했는데 바로 이것은 이명박 정부의 유인촌 장관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명박(지금은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정부의 이러한 좌파 축출은 ‘블랙리스트’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1만 명에 달하는 예술인들을 리스트를 만들어 예술(인)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교묘하게도 기관이나 단체의 수장을 날려버림으로써 간접적으로 예술인들의 자율성을 억압한 것이다. 누가 더 죄질이 중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론 어떤 형태로건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예술인들의 ‘표현의 자유’는 억압되어서는 안 되지만 예술의 자율성은 예술인들 스스로 지켜야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