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일본…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가능할까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18.12.10 15:14
  • 호수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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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日 강력 반발…전문가 “한국 사법부 판결의 정당성 여론화해야”

5초 남짓한 승소 판결을 듣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11월29일, 여성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긴 소송이 끝났다. 같은 날 미쓰비시중공업(미쓰비시)의 히로시마 기계 제작소에 강제로 동원됐던 징용 피해자들도 승소했다. 지난 10월 승소 판결이 내려진 신일철주금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을 포함해 대법원에 계류돼 있던 3건의 소송이 드디어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 사법부는 일본 전범기업에 책임을 물어 피해자들에게 8000만~1억5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명령했지만,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 판결에 반발하고 있다. 전범기업 역시 책임을 부인하며 판결에 불복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판결은 나왔지만, ‘사과와 배상’까지 가는 길이 다시 멀고도 먼 이유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및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11월29일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는 판결에 불복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연합뉴스



韓 외교부·사법부 개입해 재판 지연

일본은 소학교 6학년 재학생과 갓 졸업한 어린 소녀들을 근로정신대로 동원했다. 동원된 소녀들은 감금 상태에서 극심한 노동에 시달렸다. 일본이 패전한 이후 한국 땅을 밟게 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다. 결과는 패소. 일본 정부는 2009년 이들에게 후생연금 탈퇴수당금 99엔(1300원)씩을 지급했다.

2012년 양금덕씨 등 5명의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광주지법은 2012년 6억8000만원의 위자료 배상 판결을 내렸지만 미쓰비시는 항소했다. 광주고법이 2015년 5억6208만원의 위자료를 배상할 것을 명했지만 미쓰비시는 또다시 불복했다. 상고로 인해 소송은 대법원에 계류됐고, 3년이 지난 2018년 11월이 돼서야 판결이 내려졌다.

같은 날 판결이 내려진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은 1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고(故) 박창환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2000년 소송을 제기했지만, 부산지법과 부산고법은 청구시효가 만료됐다며 기각했다. 대법원은 2016년 5월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부산고법이 2013년 7월, 8000만원의 위자료 지급 판결을 내렸지만 미쓰비시는 이에 불복해 상고했다. 소송은 5년 동안 대법원에 계류돼 있다가 최근에야 판결이 나왔다.

지난 10월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신일철주금 피해자들의 소송도 지난했다. 1997년 일본에서 패소한 피해자들이 2005년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기각됐다. 2012년 대법원이 항소심 판결을 파기환송했고, 2013년 서울고법은 1억원의 위자료 지급 판결을 내렸다. 신일철주금은 상고했다. 2014년 법리검토를 개시한 대법원은 2018년 10월, 피해자들에게 1인당 1억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선고했다.

이렇게 소송이 길어진 이유는 많았다. 일본 전범기업들은 책임을 부인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인해 모든 문제가 해결됐으며, 위자료 청구권도 모두 소멸됐다고 주장했다. 한국 외교부는 소송이 진행되지 못하게 막았다. 외교부는 2016년 11월, ‘우리나라에서 개인 청구권을 인정할 경우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법원행정처에 보냈다. 또 ‘일본 공사가 외교부를 방문해 이 판결이 확정되지 않도록 강력히 요구했다’는 입장을 전달하고, 손해배상 판결이 나올 경우 한국은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전범기업 소송대리인인 김앤장을 통해 대법원에 제출했다. 이러한 ‘재판거래’ 의혹이 제기되고 나서야 대법원은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고 심리를 시작했다.

최근에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을 파기한 뒤 화해나 조정에 부쳐 소멸시효를 넘기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켜 추가 소송을 봉쇄한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소송과 관련해 김앤장 변호사를 직접 접촉한 정황도 드러났다. 근로정신대 소송을 대리한 김정희 변호사는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는 정부와 국가기관이 오히려 피해자들을 패소시키겠다는 전략을 짰다. 삼권분립이 엄연한 나라에서 재판에 개입한 것은 헌법 파괴”라고 지적했다.


日 정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판결”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강하게 밝혔다. 일본 정부는 고노 다로 외무상의 담화문을 통해 “판결에 대해 지극히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한국이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을 경우 국제 재판이나 대항조치를 포함한 모든 선택지를 검토해 대응해 나가겠다고 했다. 또 이수훈 주일 한국대사를 외무성으로 불러 유감과 항의의 뜻을 표명했다. 고노 외무상은 이 대사에게 “이 판결은 한·일 청구권협정에 위반될 뿐 아니라 양국 우호협력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것”이라며 “국제사회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미쓰비시도 재판 패소에 대해 “극히 유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미쓰비시는 홈페이지에 올린 입장문을 통해 “한·일 양국과 국민들 사이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는 한·일 청구권협정에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며 “일본 정부와 연락을 취하면서 적절하게 대응해 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 정부는 지난 10월 신일철주금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관련 기업들에 개별적으로 배상에 응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정리하자면,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개인의 청구권이 사라졌기 때문에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입장이다. 그러나 개인 청구권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일본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11월30일 이수훈 주일 한국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일본 정부가 청구권 협정으로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하면서 판결 자체가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1991년 8월 야나이 순지 당시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이 일본 국회에서 ‘개인 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 의미로 소멸시킨 것이 아니다’고 말한 것을 언급하며 이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법조계 일부에서도 한국의 판결이 옳다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가 전후 미국이나 중국에는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는 등 개인 청구권은 유지된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라는 입장이지만, 인권 문제를 우선시하는 국제 사법 흐름을 볼 때 한국의 판결을 인정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나온다. 

 

강제동원 재판에서 패소한 미쓰비시중공업이 11월29일 홈페이지에 올린 입장문. 미쓰비시는 “극히 유감”이라며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 연합뉴스


“개인 청구권 소멸된 것 아니다”

한·일 관계 전문가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이미 일본 정부가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의 판결이 옳다고 본다”며 “일본 내에서 변호사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일본 정부가 잘못했다는 여론이 35% 이상이었다. 이 사안이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더라도 한국에 유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해자들의 위자료 수령 등이 현실적으로 이뤄질지도 관건이다. 많은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났고, 생존자들도 대부분 구순을 넘겨 건강이 악화된 상황이다.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상임대표는 “자칫하면 어렵게 수십 년간 애써온 법정 투쟁 결과물이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며 “정부는 모든 노력을 다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정희 변호사는 “판결이 이행되지 않으면 강제집행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국내에 있는 미쓰비시 등 전범기업의 재산 등을 강제집행하는 방법”이라며 “그에 앞서 미쓰비시 측과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협상 방안이 있다면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강제동원 소송 문제가 외교적 사안이 된 만큼, 일본 정부가 역사적 사실을 반박할 수 없도록 정부 차원에서 관련 자료를 정리하고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변호사는 “아직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 피해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내용을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외교부는 지금까지 소송에 방해되는 전략과 법률 해석을 고수해 왔기 때문에,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지금 일본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법과 논리를 따져 정리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일본이 1991년도에 개인청구권을 인정한 내용 등을 언급하면서 한국 사법부의 판결이 정당하다는 여론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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