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사회가 일가족 죽였다
  • 인천·안면도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r)
  • 승인 2003.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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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실직, 헤어날 길 없는 빈곤, 갚을 방법 없는 카드 빚과 은행 대출금, SOS를 쳐도 위기의 가족을 구제하지 못하는 정부…. 결국 그녀는 세 자녀와 함께 투신 자살했다. <시사저널>이 단독 인터뷰한 남편은
7월17일 오후 6시, 인천시 부평구 ㅆ아파트 2동 11층에 사는 이 아무개씨(44)는 바람이나 쐴까 하고 베란다에 나갔다. 그는 이때 평생 잊지 못할 끔찍한 광경을 보았다. 맞은편 4동 14층과 15층 사이 창문에서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두 번째 아이가 떨어졌다. 몇 초 뒤 다시 한 여자가 아기를 안고 몸을 날렸다. 여자는 마치 의자에 앉은 듯한 자세로 낙하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기를 안고 있었지만 땅에 닿기 전에 아이를 놓쳤다.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2.5초. 이들은 출입구 지붕 기왓장에 부딪친 뒤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졌다. 어머니 손 아무개씨(34)와 자녀 3명은 이렇게 죽었다.

목격자 이씨는 아직도 충격을 떨쳐내지 못하고 우황청심환을 먹고 있다. 충격에 빠진 사람은 이씨뿐만이 아니다. 온 국민이 이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손씨가 자살한 이유가 극심한 가난과 신용카드 사의 빚 독촉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시민들은 슬퍼하거나 혹은 분노했다.

7월18일 오후에는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 등이 빈소에 모습을 나타냈다. 장례식장(부평 세림병원)을 찾은 것은 정치인만이 아니었다. 생면부지의 일반 시민들도 조문했다. 19일 오전 2시, 서울 마포구에 사는 김수민씨(38)도 조문했다. “나도 사업에 실패해 한강에서 자살하려고 한 적이 있다. 손씨를 이해한다.”

손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안전망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반면 자녀 동반 자살을 두고 손씨와 그 남편에게 책임을 돌리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누가 그들을 죽인 것일까? 취재진은 손씨가 세 자녀와 동반 자살한 직후부터 고향 마을에 한줌의 재로 뿌려지기까지 손씨 가족의 주변을 따라가 보았다.

손씨 가족은 인천시에서도 변두리인 가정동 ㅅ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가정동에 10년을 살았다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도 이름을 잘 모르는 15평 낡은 아파트. 집은 친척 명의의 전세로 되어 있었다. 아파트 입구 통로에는 손씨네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자전거 4대가 아직 남아 있었다.

큰딸 수미(가명· 7)는 ㄱ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수미가 죽은 다음날인 18일은 학교에서 단체로 현장 실습(수영장)을 가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하지만 수미는 현장실습비 3천8백원을 내지 못했다. ㄱ초등학교 교감은 “가난한 동네여서 한 반에 현장실습비를 못 내는 아이들이 한두 명씩은 있다”라고 말했다.

ㄱ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은 18일 결국 현장 실습을 가지 못했다. 그 날 비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수미네 반 학생들은 수영장에서 노는 대신 수미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울다 쓰러진 담임 선생님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손씨가 식당에서 일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기자가 수소문한 결과 사실과 달랐다. 손씨와 친했던 이웃 신덕화씨(30)에 따르면, 손씨는 “나가서 일하고 싶은데 막내딸 때문에 못한다”라며 한탄했다.

손씨의 막내딸은 팔과 다리에 피부염이 있었다. 신덕화씨는 “막내딸은 눈에 결막염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손씨는 막내딸 병원비가 없어 이웃에게 1만∼2만 원을 빌리곤 했다. 남편 조씨는 “병원에 며칠 다니다가 그만뒀다. 더 다녀야 하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손씨의 막내딸을 진료한 인근 한 소아과 병원의 의사에 따르면 치료비는 하루에 3천5백원이었다.

사건 초기에 남편이 가출했다고 일부 언론이 보도했지만 확인 결과 사실이 아니었다(오른쪽 인터뷰 기사 참조). 남편 조씨는 1997년 4월 한양목재에 입사해 시판생산팀에서 일할 때만 해도 성실한 아빠였다. 비록 월급은 100만원이 채 안되었지만 한양목재는 ‘라자가구’라는 브랜드로 유명한 중견 회사여서 자부심도 있었다.

조씨가 입사했을 때는 한양그룹 몰락 이후 대한주택공사 자회사가 된 상태였지만 안정적인 직장으로 통했다. 그러나 구조 조정 바람이 불면서 주택공사는 한양목재를 파산시키는 쪽을 택했다. 1999년에 7백명을 넘었던 직원은 파산 당시 5백50명만 남았는데, 2001년 모두 회사를 떠났다. 현재 7명이 남아 정리 절차를 밟고 있다.

조씨는 2001년 6월 퇴사하면서 퇴직금 5백10만원, 위로금 2백38만원을 받았다. 당시 조씨와 함께 현장(공장)에서 일했던 한 직원은 “그때 꼭 주택공사가 한양목재를 파산시켜야만 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정부 시책에 따라 억지로 바람에 휩쓸린 거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노조가 임금을 동결하고 성과급을 반납하는 등 회사를 살리려고 애쓴 덕분에 회사는 흑자로 돌아섰다고 한다. 하지만 구조 조정은 강행되었다. 그는 “그때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1∼2년 동안 직장을 얻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많이 봤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한양그룹 계열사 구조 조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주택공사는 남은 계열사들을 굿모닝시티에 팔아넘겼다. 이것이 요즘 한창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윤창렬 게이트의 싹이 되었다.

조씨의 절친한 친구 노 아무개씨는 “조씨는 배운 기술이라고는 목재 일뿐이었다. 그때 직장을 잃은 사건이 조씨의 인생을 바꿨다”라고 말했다. 해고된 뒤로 지방을 떠돌며 일자리를 알아 보았으나 일용직 막노동뿐. 그나마 쉽지 않았다. 조씨는 사건 발생 며칠 전에 두 달을 놀다가 대전에 내려가 한 초등학교 신축 공사장에서 조경 공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내와 세 자녀의 죽음이 전부 남편 조씨 때문은 아니지만, 남편이 죄책감을 느낄 만한 점도 있었다. 손씨의 유서에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있지만 남편에 대한 말은 없었다. 남편 조씨는 경찰 조사에서 신용카드 빚이 2천만원, 은행 대출이 천만원 있다고 밝혔다. 그 중 상당액은 남편이 썼다. 조씨가 생활보호 대상자에 끼지 못한 이유는 그가 1994년형 세피아 자동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씨의 친구 노 아무개씨는 “지방을 떠돌며 일자리를 알아 보고 다녔기 때문에 자동차가 꼭 있어야 했다. 오히려 대중 교통보다 돈을 더 절약할 수가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웃 가운데 이사온 후 남편 조씨를 보았다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한 이웃의 증언이다. “올해 봄에 있었던 일이다. 손씨가 수미(큰딸)와 아들만 우리집에 맡기고 막내딸은 데리고 친구집 간다고 나섰다. 그런데 약속된 4시가 되어도 애들을 찾아가지 않았다. 답답해서 애들에게 아빠에 대해서 물어봤다. 애들 말이 아빠는 자기들 잘 때 와서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했다. 또 아빠하고 엄마하고 싸워서 엄마가 큰 가방을 들고 나갔다고 말했다.”

손씨의 바로 옆집 사람은 남편 목소리를 부부싸움할 때만 들었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갈등 정도는 많은 가난한 부부들의 일상일 뿐 특별히 부부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손씨는 친구나 친척 들에게 남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없다.

손씨는 월요일인 7월14일까지는 죽을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월요일에 신덕화씨와 대화를 나누던 손씨는 아들이 사탕을 빨자 “자꾸 사탕 먹으면 이가 나빠지는데”라고 걱정했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은 동창생 김 아무개씨(34)로 알려져 있었다. 사건 당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김씨는 손씨 아파트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씨는 김씨에게 살기가 힘들다며 ‘내가 자살하면 어떻게 될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취재 과정에서 그보다 더 나중에 손씨를 목격한 이웃이 신덕화씨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신씨는 4시30분쯤 아파트와 버스 정류장 사이 건널목에서 손씨 일행과 마주쳤다. 손씨는 어두운 얼굴이었으나 아이들은 명랑했다. 큰딸 수미는 자기에게 닥칠 운명도 모른 채 신덕화씨를 보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손씨네 식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손씨가 왜 자살 장소로 7km나 떨어진 ㅆ아파트를 택했는지는 미스터리다.

장례식장에 모여 애도하던 조문객은 대부분 안면도 사람들이었다. 손씨와 조씨 부부는 안면중학교 동창이었다. 손씨는 고등학교 중퇴 후 부천에서 공장에 다녔는데 두 부부의 인간 관계는 안면도 공동체를 벗어나지 않았다. 손씨가 당일 만난 친구도 안면도 동창이었고, 남편 조씨에게 대전 일자리를 소개해준 사람도 안면도 친구들이었다. 손씨는 유서 말미에도 ‘안면도에 묻어주세요’라고 썼다.

손씨와 남편 조씨의 부모들은 안면도에서 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민이었다. 손씨는 딸 다섯 가운데 막내였고 밑으로 남동생 둘이 있었다. 손씨는 ‘빈농의 자녀→상경→도시 빈민층 전락’이라는 한국 근대사의 전형적인 ‘빈곤의 구조’를 밟았다.

7월19일 오후 시신은 부평묘지공원관리사무소에서 화장을 치른 뒤 뼛가루가 되어 고향 안면도로 향했다. 19일 저녁 6시. 죽은 손씨의 고향인 안면도 서쪽 밧개마을 바닷가에 손씨와 남편 조씨 가족이 다시 모였다. 유족들은 분골함을 들고 허리춤까지 오는 바다 가운데로 걸어갔다. 손씨의 분골은 남편이 뿌렸다. 그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세 자녀의 분골은 남편과 친척들이 나누어 뿌렸다. 그들이 터뜨리는 오열이 파도 소리를 삼켰다. 수평선에는 노을이 물들었다. 손씨는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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