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감이 있어야 땔감 구하지" 건설 일용 노동자들의 비명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ia.co.kr)
  • 승인 2000.1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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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일용직 노동자들 최악의 겨울나기…공사는 없고 인력은 넘쳐 앞날 막막
11월3일 아침 5시30분, 서울 신림동 ㄴ인력공사. 건설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하는 이곳에는 인부 5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이들이 10평 남짓한 ㄴ인력공사 사무실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각은 5시20분. 신분증을 책상에 놓고 자리에 앉아 있으면 소장이 나와 일거리를 배정한다.
소장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노동자들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현대건설 등 한국을 대표하는 건설업체 퇴출설이 나온 지난 10월30일 이후 일거리가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다. 잡부 일을 6년째 하고 있다는 ㄱ씨(34)는 “아침 7시까지 기다렸다가 20명 정도는 일이 없어 그냥 돌아간다”라고 말했다.

ㄴ인력공사에서 10m 떨어진 거리에 있는 ㅎ직업소개소 역시 마찬가지다. 소장 김 아무개씨는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이 부족했다”라며 일감이 줄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했다. 하지만 아침 6시가 지나고 나서도 일감을 얻지 못한 인부 숫자가 15명 가량 되었다. 하루에 50∼100명에게 일자리를 알선하는 ㅎ직업소개소 처지에서 15명은 적지 않은 숫자다.
3월·4월과 9월·10월·11월은 건설 노동자들이 한창 일해 돈을 버는 성수기이다. 그러나 올 가을은 공사하기에 나쁜 날씨도 아닌데 일감이 줄어들고 있다. 퇴출설에 오른 부실 대형 업체들이 ‘잘 나가던’ 예전처럼 공사를 맡지 못하게 되자 새로운 일감이 나오기 어려워졌다. 또한 진행중인 공사라고 해도, 대형 업체로부터 대금을 결제받지 못한 협력업체들이 공사 현장을 포기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그만큼 공사 물량이 줄어들었다. 직업소개소 역시 임금을 받기가 어려워 보이는 현장에는 인부를 투입하기를 꺼린다. “IMF 때 날벼락 맞은 이후로 조심하고 있다”라고 ㅎ직업소개소 김소장은 말했다.

현재 건설 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일용 잡부가 일당 5만~5만5천원 선이며, 미장이나 철근공 같은 기능공이 7만5천∼9만원 선. 그러나 장마철과 겨울철에 공사가 거의 없다는 건설업의 특성상 ‘고소득자’ 축에 끼는 기능공이라고 해보았자 한달 수입은 고작 1백50만원. 잡부는 한달 내내 ‘뼈빠지게’ 일해 100만원을 버는 정도다.

이렇게 건설 노동자들이 받는 보수는 최저생계비 92만원(4인 가족 기준)을 겨우 웃도는 수준이지만, 이마저도 깨질 수 있다. 건설업체들이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출혈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서, 공사 원가를 한푼이라도 더 낮추기 위해 자재비나 장비비보다 인건비를 깎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3일 채권 은행단이 정리 대상으로 결정한 52개 기업이 본격적인 정리 절차에 돌입하게 되면 실업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된다. 이들이 공사판으로 한꺼번에 몰려들면 건설 인력이 ‘초과 공급’될 가능성이 높다.

11월6일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연맹(건노련)은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가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지 않을 경우 11월29일부터 전국 2천여 건설 현장에서 작업중인 90개 노조가 총파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발표했다. 건노련은 정부가 건설업을 방치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위기를 야기했다고 보고 있다.
이래저래 건설 노동자들이 맞이하는 올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혹독할 전망이다. 외환 위기 이전에 발주된 공사 대부분이 내년에 완공되는 반면 새로운 공사는 거의 발주되지 않아 일감 부족 현상마저 본격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건설협회 조사에 따르면 2000년 6월 현재 건설 실업자 수는 38만명. 올 겨울부터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내다본다. 가혹한 추위에 내몰리게 된 노동자들은 더욱 극단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또 IMF가 온다던데요.”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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