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일’ 고개 너머 북·미 관계 활짝
  • 변창섭 ()
  • 승인 2000.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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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브라이트·클린턴 방북 등으로 급가속 예상
현재 초미의 관심사는 조명록 특사의 방미 이후 북·미 관계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이냐 하는 점이다. 특히 1994년 제네바 합의문 체결 이후 6년이 지나도록 연락사무소조차 개설하지 못한 상황에서 과연 양국이 전격 수교를 할 수 있을지도 궁금거리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동안 답보 상태이던 북·미 관계에 조특사의 방미 이후 가속도가 붙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조특사가 워싱턴을 떠나던 10월12일 아침 발표된 두 나라 공동 성명은 북·미 관계의 앞날과 관련해 시사하는 점이 많다.

1972년 미국과 중국이 두 나라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를 기약한 ‘상하이 공동성명’을 상기시키는 이날 북·미 공동성명은 무엇보다 서로가 적대감을 뒤로 하고 새로운 관계를 추구하기로 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상징성이 크다. 또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문이 당시 양국을 파국 상태로 끌고가던 핵 위기를 제거한 기초 문서였다면, 이번 공동성명은 두 나라의 외교 관계에 초석을 놓은 최초의 공식 외교 문건인 셈이다. 워싱턴에 있는 유수한 민간 두뇌 집단인 브루킹스 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이자 과거 국무부 제네바 기본합의문실 실장을 지낸 조엘 위트 연구원은 기자에게 “앞으로 성명 내용을 어떻게 실천할지가 과제이긴 하지만, 내용 자체로만은 북·미 간의 정치적 이정표로 볼 수 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10·12 공동성명, 중요한 정치적 이정표”

공동성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클린턴 대통령의 북한 방문과 관련한 부분이다. 이번 공동성명의 북측 전문이나 미국측 영어 전문 어디에도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는 단정적인 표현은 없다. 다만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그의 ‘방문 가능성(possible visit)’을 준비하기 위해 평양에 간다고만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올브라이트 장관은 10월12일 기자회견에서 “양국의 핵심 현안(key issues)에 관해 중대한 진전을 이룰 수 있다는 평가가 내려지면,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이뤄질 것이다”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웬디 셔먼 북한정책조정관은 클린턴의 방북 시점을 올브라이트 장관이 북한을 다녀온 뒤 ‘곧이어(soon afterwards)’라고 말했다. 그러나 워싱턴의 한국통인 조지타운 대학 스타인버그 박사는 ‘외교 관례상 주요 현안에 대해 북·미가 진전을 이루지 않은 상황에서 클린턴이 평양에 가기는 힘들 것’이라고 다소 조심스런 전망을 내놓았다. <워싱턴 포스트> 외교담당 칼럼니스트인 짐 호글랜드는 10월15일자 칼럼에서 ‘북한과의 데탕트는 단계적으로 신중하게 속도를 조절하며 진행해야 하고, 또 클린턴의 후임자가 그런 작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클린턴의 방북에 부정적 견해를 표시했다.

올브라이트 장관이 지적한 ‘핵심 현안’이란 다름 아닌 북한 핵과 테러지정국 해제 그리고 미사일 문제를 말한다. 이 중 핵과 테러지정국 해제 문제는 북한측 관심사인 데 반해, 미사일은 미국측의 최우선 관심사다. 그동안 이 핵심 현안들이 전개되어온 과정을 살펴보자. 우선 핵문제. 미국의 경우 1994년 제네바 합의문을 계기로 일단 북한 핵에 대한 우려는 가신 상태다. 1998년 한때 북한이 금창리 땅굴에 핵시설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지만, 현장 조사 결과 사실무근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문제는 북한이다. 당초 2003년께 끝마치기로 예정된 경수로 2기 공사가 4~5년 뒤로 늦어지자 북한은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에 대해 이에 따른 전력 손실 보상 요구를 하고 있다. 미국도 북한측의 전력 손실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처리할지 주목된다.
다음은 근래 북한의 최우선 관심사인 테러지정국 해제 문제다. 북한은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미국에 의해 그 이듬해 테러지정국 명단에 올랐다. 일단 테러지정국에 오르면 미국의 각종 경제 제재를 받게 됨은 물론 국제 금융기관의 지원을 받기가 어려워진다. 북한은 지난 5월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연례 테러지정국 명단에 쿠바·이란·이라크 등 7개국과 함께 또다시 올랐다. 당시 국무부가 북한을 재지정한 이유는, 1970년 요도호를 납치한 적군파 요원 수명에게 북한이 자국 안에 보호처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북한과 미국은 지난 10월6일 국제 테러 행위를 반대한다는 공동선언을 내놓았을 정도로 테러 문제에 관해 상당한 공감대를 이룬 편이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적군파 요원들을 국외로 추방함은 물론 12개에 이르는 테러 관련 국제 협약에 가입하라고 요구했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미국은 의회에 북한을 테러지정국 명단에서 해제하는 사유를 통보하고, 이를 근거로 대통령 행정명령을 통해 북한을 명단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끝으로 미국측 최우선 관심사인 북한의 미사일 개발 문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북한은 한반도 전역을 사정권 안에 둘 수 있는 스커드와 노동 미사일을 개발해 이미 실전 배치한 것은 물론 일본 전역을 가격할 수 있는 대포동 1호, 나아가 미국 서부지역 일부를 공격권 안에 둘 수 있는 대포동 2호까지 개발해 시험하는 단계에 와 있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계획은 탈냉전 시대 미국의 최우선 외교 목표인 대량살상무기 비확산(non-proliferation) 전략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때문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북한의 미사일 계획만큼은 저지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확고한 방침이다. 이번에 조-클린턴, 조-올브라이트 회담에서도 가장 핵심적 논의 사항이 바로 미사일 문제였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북한이 주권 사항으로 여기는 미사일 개발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고 보고 있다. 때문에 차선책으로 북한을 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기술통제협약(MTCR)에 가입시키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이는 지난해 10월 윌리엄 페리 당시 북한정책조정관이 내놓은 대북정책 재검토 권고안에 따른 것이다. 현재 한국을 포함해 20여국이 가입한 미사일통제기술협약은 미사일 사정 거리가 300km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중거리인 노동 미사일은 말할 것도 없고, 장거리 탄도 미사일인 대포동 2호의 경우 사정 거리가 수천km에 이른다. 그 때문에 북한을 미사일통제기술협약에 가입시키는 일은 미사일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만큼 타협점을 찾기가 힘들었다. 북한은 또 외화 획득의 주요 원천인 미사일 수출을 중단할 경우, 3년간 매년 10억 달러씩 보상하라고 미국에 요구해 왔고 미국은 이런 식의 ‘현금 보상’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양국의 현안에 대한 현격한 입장 차를 의식한 듯, 올브라이트 장관도 10월12일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북한 정부가 가까운 장래에 나를 초청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조명록 특사가 10월11일 저녁 올브라이트 장관이 주최한 만찬석상에서, 미국이 북한의 영토와 체제에 대한 안전을 담보할 경우 김정일 위원장이 ‘중대한 결심’을 할 수도 있다고 밝힌 것은 유의할 만하다. 올브라이트 장관이 김위원장을 만나 북한측 요구 사항을 받아들일 경우, 김위원장이 미사일 문제에 대해 어떤 ‘중대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내년 1월 퇴임에 앞서 마지막으로 11월 중순께 베트남을 국빈 방문한다. 미국과 베트남은 1990년대 중반 관계 정상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클린턴의 방문은 어찌 보면 늦은 감이 있다. 따라서 아직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클린턴이 평양을 방문한다면 그 자체로도 파격이지만, 정치적 효과도 엄청날 것이라고 워싱턴의 외교분석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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