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앞의 태풍 ‘적대적 합병.매수’
  • 蘇成玟 기자 ()
  • 승인 2000.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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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적대적 합병·매수 전면 허용 추진…실효 거두려면 제도 보완 병행해야
한국에도 ‘기업 사냥’ 광풍이 불어닥칠 것인가. 지난 5월 정부는 침체된 증시를 살리는 방안으로 기업에 대한 적대적 합병·매수(M&A)를 전면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혀 증권가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현재 적대적 합병·매수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특정 주식 지분을 5% 넘게 소유할 경우 의무적으로 신고해야 하고 △한 기관이 특정 주식을 20% 넘게, 한 펀드가 특정 주식을 10% 넘게 보유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조항들을 개정해 적대적 합병·매수를 가로막는 실질적 장벽을 없애겠다는 뜻이다.

적대적 합병·매수는 한국 증시에 엄청난 호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부 증권사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매력적인 합병·매수 대상 기업 목록을 작성해 발표하고 있을 정도이다. 증시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던 한가람투자자문 박경민 사장도 적대적 합병·매수를 가리켜 “침체한 장세를 되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했다.

증권가가 적대적 합병·매수에 큰 기대를 거는 이유는 증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만한 제도라고 보기 때문이다. 리젠트자산운용 김석규 이사는 “한국 증시가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장기 투자가 적기 때문이다. 장기 투자가 부족한 이유는 배당 수익이 쥐꼬리만해 시세 차익만 쫓다 보니 증시의 변동성이 큰 데 있다”라고 지적했다.

적대적 합병·매수가 활성화하면 성의 없이 배당해 주주를 무시하는 경영진은 자리를 보전하기가 힘들어진다. 최근 LG·삼성 등 재벌 기업 사례에서처럼 계열사 주식을 고가에 매입하거나 변칙적으로 주식을 증여함으로써 주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전횡적 경영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적대적 합병·매수란 기업 경영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경영권을 빼앗는 것인데, 해당 기업 주식을 증시에서 굳이 은밀하게 매집하거나 공개 매수하지 않아도 주주 의결권을 위임 받아 경영권을 탈취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적대적 합병·매수가 활발해지면 기업 지배 구조가 자연히 개선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20∼30% 지분을 소유한 대주주가 70∼80% 지분을 차지한 다수 주주의 이익을 무시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오너 경영인이 전문 경영인에게 자리를 넘겨주든지, 아니면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효율적 경영을 하든지 주식 투자 효과가 증대되기는 마찬가지다.

적대적 합병·매수는 자본주의와 자유 시장 경쟁 원리에 부합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이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이 제도가 현실적으로 효과를 거두려면 함께 개선되어야 할 점도 많은 것으로 지적된다.

에이원창업투자 조효승 사장(전 아시아M&A 대표)는 “한국처럼 금융 시장 감시 기능이 허술한 상황에서 적대적 합병·매수가 주요 테마로 떠오를 경우 투기 세력들이 준동해 새로운 거품을 일으킬 위험성도 크다”라고 지적했다.

“집단 소송제 도입, 사외이사제 강화부터”

적대적 합병·매수가 얼마나 가능하겠느냐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전경련 이병욱 기업경영팀장은 “일반적 합병·매수도 잘 일어나지 않는 기업 풍토에서 적대적 합병·매수가 쉽게 일어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기업들이 상호 지분 출자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점, 노동 시장마저 유연하지 못한 점 등이 걸림돌이라는 지적이다.

1997년 대농그룹은 지주회사 격인 미도파를 적대적 매수로부터 방어하려고 계열사를 쥐어짜 천억원이 넘는 자금을 쏟아부었다가 그 때문에 좌초했다. 적대적 합병·매수 시도가 발생하더라도 실제로 성사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국 기업들이 기를 쓰고 경영권을 방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경영이 투명하지 못하다 보니 훗날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는 조효승 사장의 지적이 설득력 있다.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장 김상조 교수(한성대·경영학)는 “적대적 합병·매수는 재벌 지배 구조를 개혁하는 데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사회·경제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외이사제를 강화하거나 집단소송제·단독주주권처럼 지배 구조를 효율적으로 견제할 제도적 장치부터 차근차근 성취해 가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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