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6월 항쟁 촉발할 것인가
  • 김 당·崔寧宰 기자 ()
  • 승인 1997.0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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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위기로 동요할 때 시민 사회의 완강한 구조가 즉시 표면에 드러난다.” 안토니오 그람시


선은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상황은 지극히 유동적이다. 제1의 변수는 이른바 ‘넥타이 부대’와 중산층의 향배이다. 그래서 이제 ‘파업 정국’은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포섭 국면으로 들어섰다. 정치권의 양태는 치열한 눈치 보기와 책임 떠넘기기로 나타나고 있다. 연말 ‘날치기’ 이후 20일 동안 ‘국민 저항권’이 분출되었다고 요약되는 ‘1월 노동자 정치 투쟁’의 양상이다.

지난해 12월26일 정부·여당의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로 비롯된 총파업 정국의 대치 전선이 분명해지고 있다. 그 전선의 한 축인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철회와 민주 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와 ‘전국 민주노동조합 총연맹’(민주노총)의 투쟁 목표 또한 확고하다. 10년 전 군부 독재 정권의 ‘6·29 항복’ 선언을 받아낸 6월 민주항쟁의 재현이다. 수세에 놓인 정부·여당의 목표도 확고 부동하다. 한마디로 버티기이다. 양보나 항복은 1년 남은 김영삼 대통령의 권력에 걷잡을 수 없는 누수를 부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승리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YS의 통치 스타일로 보아 항복이 죽음보다 더 싫기 때문인지도 모른다.YS, 버티기에는 위험한 국면

그러나 마냥 버티기에는 너무 위험스런 국면이다. 재야·시민 사회의 46개 부문 단체가 ‘개악 철회와 민주 수호’를 고리로 결합한 범대위에 ‘참여 민주사회 시민연대’(참여연대)같이 YS 개혁에 비판적 지지를 보냈던 시민단체가 동참했고, 일정 부분 정부·여당의 보호를 받았던 ‘한국 노동조합 총연맹’(한국노총)마저 뒤늦게 가담했다. 따라서 한국노총(위원장 박인상)은 1월14일부터, 민주노총(위원장 권영길)은 15일부터 각각 예정된 2,3단계 파업(백만명 참가 예상)에 돌입함에 따라 이번 주는 총파업 사태에서 최대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더 심각한 것은 시민 사회의 이반 현상이다.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전국사제단)은 이미 몇 차례 시국성명서를 통해 ‘성탄절 다음날 국민이 모두 잠든 새벽 6시에 울려퍼졌던 국회의사당의 나무 망치 소리는 문민 정부의 조종 소리’라고 규정하고 ‘총파업에 돌입한 노동자들의 요구는 자신의 권익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이라고 밝혔다. 김수환 추기경도 1월12일 미사에서 “지난 10일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와 노동사목위원회가 공동 발표한 ‘최근 노동법 관계 사태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곧 나의 입장이다”라며 경찰 투입 반대 의사를 재확인했다.

정부의 조기 진압 의지를 더 곤혹스럽게 한 것은 전국사제단이 김영삼 정부에 대한 범국민적 항쟁에 동참하는 차원에서 민주노총 지도부가 농성하는 명동성당에서 김영삼 정권의 회개를 위한 시국 기도회(1월13일)를 봉헌한 것이다. 전국의 사제 9백여 명이 서명한 ‘사제 1천인 시국선언’ 발표와 전국에서 올라온 신자 천여 명이 함께 봉헌한 이 날의 시국 미사 또한 87년 6월 항쟁의 재판이다. 사제들은 △두 악법에 대한 불복종 선언 △김영삼 정권의 회개와 악법 자진 철회 △국회의원 전면 사퇴와 총선 재실시 △문민 독재 종식 캠페인이라는 가장 강도 높은 저항 의지를 천명했다. 사제단은 이 날의 시국 미사를 “95년 5·18 문제 해결을 위한 미사를 거행한 뒤에 다시 시작된 천주교 시국 기도회로서, 역사에 새로운 물길이 터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밝혔다.

안기부법 개정 국면 때부터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던 지식인 사회의 이반 또한 부담스럽다. 날치기 통과 이후 잇단 각 대학 교수들의 시국 선언에 이어 1월11일에 각계 지도급 인사 1천9백97인이 시국 선언에 참여했다. ‘1997인 시국선언’에 참가한 선언자들은 시국 선언문을 통해 현 정권의 날치기 개악이 우리 사회의 산업 현장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민주주의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절차나 내용에서 그 어떠한 적법성과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 못한 노동법·안기부법이 원천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들은 또 김영삼 정부가 두 날치기 법 무효화와 국제 기준에 따른 노동법 재개정에 응하지 않을 경우 6·10 민주항쟁 10주년을 맞아 범국민적 항쟁에 나서겠다고 천명했다.이와 관련해 1천9백97인 시국 선언을 낭독한 김진균 교수(서울대·사회학)는 오늘의 선언이 노동자 총파업 투쟁을 범국민적 투쟁으로 확산하기 위한 것이라고 못박고 전국 교수들이 국민의 인식을 전환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김교수는 또 1월16일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 성명에 이어 전국 60∼70개 대학에서 성명이 발표될 것이라면서 “처음에는 참여 교수를 2천명 정도로 예상했으나 3천명을 훨씬 넘을 것 같다”라고 전망했다. 이 또한 6월 항쟁 때 보인 전국 교단의 시국 선언 규모를 방불케 하는 것이다.

지식인 사회의 적극 참여에 따라 거리 시위 및 집회에서도 6월 항쟁 초기에 나타났던 양상이 재현되고 있다. 이런 양상은 1월10일의 서울 광화문 집회와 11일 종묘 집회에서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시위 행렬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악법 철폐’를 선창하면, 자연스럽게 ‘퇴진 김영삼’이라는 후렴 구호가 터져 나왔다. 이같은 시위 구호에 일부 승용차 운전자들은 경적 울리기와 손수건 흔들기로 호응했다. 또 연도의 시민들도 시위대에는 박수치고,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게는 ‘쏘지 마’라고 외쳤다. 87년 6월의 ‘호헌 철폐, 독재 타도’ 함성이 ‘악법 철폐, 퇴진 김영삼’이라는 구호로 대치된 것이다.

특히 김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8일)을 고비로 정치 투쟁 양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야당이 지적한 대로, 기자회견에서 드러난 YS의 ‘오만과 독선 그리고 무지’가 중산층과 시민사회의 이반을 부채질하고 총파업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집회에 참석한 시민 중에는 “연두 기자회견을 본 뒤에 분통이 터져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나왔다”라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12일 명동성당 집회에 나온 한 50대 초반 시민(국책 은행 직원)은 “평소 일요일마다 산에 가는데 이번 일요일에는 민주노총에 심정적인 지원을 표시하기 위해 나왔다”라면서, 시위에 동참할 수 없는 처지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파업 지원 성금으로 5만원을 내놓았다. 민주노총은 12일 현재 접수된 지지 성금이 3천만원을 넘었다고 밝혔다.

국제 사회의 강도 높은 비판 여론도 정부·여당으로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노동기구(ILO)가 한국의 노동법 개정 및 이에 따른 대규모 파업에 우려를 표명하고 나선 데 이어 미국·유럽뿐만 아니라 동남아 등지의 유력 노조들도 국내 노동단체들과 국제 연대 차원에서 현지 한국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는 당장 1월22일 한국의 새 노동법이 국제 기준에 합당한지 공식 검토하게 되는데, 국제 기준에 미달하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 분명함에 따라 경제협력개발기구 안에서 한국 입지는 크게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여당으로서는 곤혹스런 포위 국면이 나라 안팎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파업 사태와 관련해 그동안 일관되게 단호한 사법 처리를 강조하던 여권이 1월11일 대화에 의한 해결을 제기하고 나선 것은, 이같은 포위 국면에 따른 위기 의식의 발로이자 이를 돌파하기 위한 고육책인 셈이다.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가 이 날 기자회견을 통해 △민주노총 지도부가 농성하는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기로 하고 △노동계에 텔레비전 토론을 제안한 것은 일단 파국으로 치닫는 정국을 유화 국면으로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같은 기류 변화가 이른바 ‘김심’과의 교감에 따른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원인 제공자인 여당이 뒷짐만 지고 있다’는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넥타이 부대 일부가 파업 대열에 합세하고, 시위·집회 현장에서 김영삼 정권 퇴진 구호가 나오는 등 민심 이반 현상이 뚜렷해지는 데 따른 정치적 부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심’에 따라 날치기를 주도한 신한국당 대표로서, 또 이른바 신한국당 대권 후보 ‘9룡’ 중에서 최근 들어 가장 ‘김심’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주자로서 이대표가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력한 ‘결자해지(結者解之)’ 공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오히려 13일 신한국당 고위당직자 회의 직후 김 철 대변인이 밝힌 ‘공식 당론’이나 강삼재 사무총장이 강조한 ‘총력 홍보전’에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이다. 김 철 대변인은 “최근 노동법 재개정을 놓고 우리 당론에 다소간 융통성이 있는 것처럼 보도되고 있으나 이것은 완전히 사실과 다르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이미 처리한 노동법에 대해 전혀 재개정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다”라고 못박았다. 사실상 이대표의 대화 제의가 ‘융통성이 있는 것처럼’ 해석되는 것조차 거부한 것이다. 따라서 파업 국면에 대처하는 여당의 본류는 여전히 김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과 국무위원 간담회(9일)에서 천명한 ‘불법 파업 단호 대처’ 방침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양대 노총 위원장이 이대표가 제의한 텔레비전 토론을 거부한 것도 이러한 인식에 근거한 것이다. 권영길 위원장은 “대화는 우리가 먼저 제안했다. 다만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안기부법을 무효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텔레비전 토론회는 의미가 없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권위원장은 될 수 있는 대로 국민의 불편을 줄이고 경제에 타격을 주지 않도록 파업에 유연성을 기하겠다고 밝혔다(12~13쪽 상자 기사 참조). 민주노총이 주도해온 ‘징검다리 파업’ 같은 신축성 있는 파업 전술이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점을 감안해 최대한 파업의 유연성을 지켜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1월 정치 투쟁’의 성패는 넥타이 부대로 상징되는 서울 중산층의 향배에 달려 있는 셈이다. 정부·여당이 양대 노총의 총파업에 맞춰 일제히 신문 광고를 내고 ‘총력 홍보전’을 전개한 것도 공공·공익 부문 파업이 가져올 불편함을 최대한 부각해 악화한 여론을 반전시키려는 안간힘으로 볼 수 있다. 바야흐로 총파업을 앞두고 치열한 포섭 국면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여당의 고민은 예전과 달리 파업에 대한 국민 여론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봉급 생활자를 대상으로 한 <한겨레>(1월13일자) 여론조사에 따르면 △진행 중인 총파업에 대해 75%가 지지(반대 22.5%)하고 △공권력 투입 및 파업 지도부 구속에 대해서는 83.3%가 반대했으며 △개정 노동관계법이 법적으로 무효라는 주장에 대해 74.3%가 동의하는 등 재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84.6%나 되었다. 또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민회의 정세분석실 여론조사 결과(13일 발표)도 △총파업은 정당한 권리 행사(67%) △ 공권력 투입 반대(75%) △재심의 또는 재개정(93%)으로 나타났다. 한편 총파업 사태에도 불구하고 정부·여당은 이렇다할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지 않거나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현재의 파업 국면이 노동계에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가장 큰 과제는 고비 때마다 되풀이되어온 보수 언론의 양비론과 중산층의 태도이다. 87년에도 그랬다. 박상훈 박사(대전대 강사·정치학)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의 정치적 태도는 반권위주의적 성향과 동시에 경제 수준 하락과 급격한 변화에 대해 저항적인 성향을 동시에 갖는다. 87년 6월 권위주의 국가라는 상부구조적 외피가 붕괴할 위기에 직면했을 때, 구체적으로 87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에 안티테제로서 등장한 경제위기론과 중산층의 동요가 그것이다. 박상훈 박사는 그것을 ‘국가가 위기로 동요할 때 시민 사회의 완강한 구조가 즉시 표면에 드러난다’는 그람시의 압축적인 표현을 들어 설명했다.지식인·시민 사회의 민주 수호 투쟁

지금 노동자들이 재현하려고 하는 87년의 공간(7∼9월 노동자 대투쟁)은 6월 민주 항쟁에서 학생·시민 사회를 중심으로 싸워 얻어낸 6·29 선언 이후의 ‘펼쳐진’ 공간이다. 한국 노동자의 사회적 고립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동춘 연구원(서울대 지역종합연구소)에 따르면 “87년 대투쟁은 엄청난 규모의 노동 저항이기는 했지만,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것은 학생과 시민이 조성한 정치적 공간 ‘위에서’ 발생했으며, 소속 기업 내에서의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 향상과 노조 조직화 요구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

그러나 97년 1월의 ‘악법 철폐 투쟁’ 공간은 날치기 이후 사상 유례 없는 노동계의 총파업 투쟁을 계기로 지식인·시민 사회의 민주 수호 투쟁이 결합한 정치 투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87년의 패배 이후 변화한 노동자 의식과 노동자의 정치 세력화 의지 또한 그때와 다르다. 그러나 날치기로 감성을 자극 받은 중산층의 지지는 아직 파업에 대한 ‘대리 만족’ 수준이다. 이들의 심정적인 지지와 조직되지 못한 박수를 적극 동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럴 경우 ‘역사의 현장에 있지 않고 중간에 서 있는’ 보수 야당을 견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87년 노동자 대투쟁 때처럼 이른바 지배 블록이 동원한 경제위기론이나 안보위기론 같은 ‘조작된 공포’에 이끌릴 때 지금의 범국민적 저항 연합은 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깨진다 해도 이들 앞에는 집권 여당이 ‘표로 심판받겠다’는 대선이 남아 있다. 정치적으로 기획된 보·혁 구도가 아닌 노동자 계급이 창출하는 보·혁 구도는 악법 철폐보다 더 큰 변화의 동인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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