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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김정일 서울 방문, 10월에 수교”

남북한·미국 공조 극비 시나리오/8월 이산 가족 상봉 → 9월 김정일 서울 방문으로 정지 작업

南文熙 기자 ㅣ 승인 2000.07.13(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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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지난 6월14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이튿날 회의의 한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김정일 위원장이 과연 이번 정상회담에서 어떤 메시지를 던질 것인가 하는 점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그의 귀에 김위원장의 한마디가 화살처럼 박혔다. “구라파 사람들이 나보고 왜 은둔 생활을 하느냐. 처음 나타났다고 그러는데…김대통령이 오셔서 해방됐다고 그래요.” 그 순간 그는 ‘바로 저거다’라고 마음 속으로 외쳤다. ‘은둔에서의 해방’. “대통령이 노구를 이끌고 북을 찾은 뜻이 바로 저거다. 북한이 아무리 미국의 손을 잡고 유엔에 나간들, 아니면 유럽과 관계 정상화에 박차를 가한들 한국의 손을 잡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김대통령이야말로 김위원장을 국제 무대에 데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안내자이다”라고 그는 지적했다

과거 김정일 위원장의 국제 무대 진출 전략이 곧바로 워싱턴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면,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선보인 새 전략은 바로 ‘서울’을 모든 길의 출발점으로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상회담 기간에 김위원장은 미국·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역설하는 김대통령에게 “빠른 시일 내에 수교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올해 안에 했으면 좋겠다”라면서 “그렇게 되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김위원장의 이같은 발언이 알려졌을 때만 해도 단순히 희망 사항을 언급한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최근 정보 소식통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시나리오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게 한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에는 남북한과 미국의 당국자들이 깊이 개입해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한 정보 소식통은 이와 관련해 “정부 핵심부에서 올해 안에 북한과 미국이 수교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준비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는 남북의 정상 및 당국자들 사이에 알려진 것보다 많은 얘기들이 오갔으며, 그 중 몇몇 현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실행 계획까지 협의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 바로 올해 안 북·미 수교와 관련한 시나리오이다.

“남북한 및 미국 당국자도 깊숙이 개입”

정부 핵심부를 진원지로 하는 이 시나리오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올해 8·15를 기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면 남북 화해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다. 이 분위기를 타고 김정일 위원장이 9월에 서울을 방문한다. 김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남북 관계가 이제 안정 국면에 들어섰다는 것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효과가 있다. 그러면 여세를 몰아 10월에 북한과 미국이 수교한다’는 것이다.

수교 시점을 이처럼 10월로 잡은 것은 그 다음 달에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수교를 단행함으로써 대북 온건론자인 민주당의 고어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것이 1차 목표다. 설령 대북 강경파인 공화당의 부시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북·미 관계를 기정 사실화함으로 차기 정권의 대북 정책이 강경으로 선회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구상이다.또한 그 후속 조처로서 올해 말 또는 내년 초쯤 ‘한반도 평화선언’ 또는 ‘군사조약’을 체결할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평화선언 또는 군사조약’이란 평화협정의 전 단계 조처로, 북·미 양자 또는 여기에 한국까지 포함한 3자가 주체가 되어 추진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미국이 주한미군의 일부를 철수하는 대신 북한은 남한을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만약 북한이 남한을 침공할 경우에는 미국이 즉각 개입해 남한을 보호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물론 모든 시나리오가 그렇듯이 여기에도 ‘상황이 잘 진행된다면’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기는 하다.

어찌 보면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최근 진행되는 일련의 상황을 분석해 보면 터무니없다고만 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우선 정상회담 이후 남북 간의 첫 접촉이었던 적십자회담에서 남북 양측은 큰 어려움 없이 6·15 공동선언의 합의 정신을 재확인했다. 이에 따라 8·15를 기해 남북의 이산가족 100명이 서울·평양을 동시 방문하고, 9월 초에는 비전향 장기수 중 북송 희망자들을 북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이 시나리오의 앞부분, 즉 ‘8·15에 이산가족 상봉을 하고 9월에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 방문을 단행한다’는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 8·15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의 이산가족 고향 방문을 모델로 한 것이다. 상봉 인원이나 상봉 방식 역시 비슷하다. 그런데 눈여겨 볼 것은 정책 당국자들이 이 사업의 인도적 측면뿐 아니라 파급 효과에 상당한 관심을 두어왔다는 점이다. 1985년의 경우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분단 반 세기 만에 이루어진 혈육 상봉의 감동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극적이었고 전국을 눈물 바다로 만들었다. 사실 정책 당국은 지난해 6월 비료회담을 앞두고 이루어졌던 베이징 비밀 접촉에서 이미 이같은 드라마를 연출하기로 상호 합의한 적이 있다.

정책 당국이 이산가족 상봉이 가져올 파급력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은 후속 작업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어차피 서울을 방문하기로 결심한 마당에 이보다 좋은 기회가 또 있을 수 있을까. 마침 9월 초 비전향 장기수 북송이 이루어지면 북한에서도 역시 잔치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남북한 양쪽에서 거의 동시에 조성될 잔치 분위기를 타고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할 것이라는 점은 개연성이 충분히 있는 시나리오인 것이다.김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게 되면 평양에 이어 서울이 또다시 세계의 뉴스 초점으로 떠오를 것이다. 남북 두 정상의 교환 방문은 한반도의 해빙 분위기가 안정권에 들어섰다는 점을 전세계에 과시하는 의미를 띠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한반도 냉전 구조의 본질적인 축이라 할 북·미 관계에서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사실 그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지난 7월1일 코언 미국 국방장관이 ‘남북 관계 개선 상황에 따라 주한미군 감축도 고려할 수 있다’고 한 발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서울을 방문한 미국의 안보 전문가는 기자에게 “이미 미국 행정부는 해병대 병력 정도만 남기고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라고 밝혔다.

그동안 많은 전문가들은 늦어도 10월께에는 북·미 협상에서 뭔가 획기적인 일이 터질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해 왔다. 북·미 교섭이 빠르게 진행될 경우 ‘북한 미사일 문제와 북·미 평화협정 문제를 일괄 타결하는 방식’이 예측되어 왔다. 여기에 못 미칠 경우 최소한 ‘미사일 문제와 평화 협정·수교 문제를 다룰 제2의 제네바 협상’ 방식으로 새로운 북·미 협상 틀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지적이었다.

8, 9월 중 미국 고위 인사 방북설도 나돌아

그렇다 하더라도 ‘10월 수교설’은 대부분 전문가들의 견해보다 한두 단계 앞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진행되고 있는 몇 가지 흐름을 살펴보면 이 가능성까지 시야에 넣고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우선 정상회담 이후 김정일 위원장 개인 또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인식이 크게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지난 6월19일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은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북한에 대해 앞으로 ‘불량 국가(Rogue State)’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대신 ‘우려 대상국(State of Concern)’이라는 완화된 표현을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호칭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책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때를 맞추어 그동안 대북 강경파였던 미국 보수 세력들의 인식도 크게 변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이가 바로 제시 헬름즈 상원분과위원장이라 할 수 있다. 내로라 하는 대북 강경파인 그는 남북 정상회담 이후 미군 철수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미국 코네티컷 대학 김일평 교수는 전화 인터뷰에서 “관계 개선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의회 분위기가 상당히 변했다. 행정부가 이니셔티브를 취할 경우 큰 장애 요인은 없을 것이다. 10월에 수교를 먼저 단행하고 평화협정을 나중에 맺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밝혔다.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안에 북·미 관계에 매듭을 짓고 싶어한다. 이와 관련해 그는 지난 6월16일 김대통령으로부터 국제 전화로 남북 정상회담 성과에 대해 설명을 듣고 “이제는 우리의 다음 조처가 무엇이 될지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의미 심장하게 말한 바 있다.

북·미 간에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사항은 앞으로 재개될 미사일 협상과 고위급 회담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현재 고위급 회담의 북한 대표로는 9월 유엔 총회에 참석할 예정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외에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이나 백남순 외교부장의 방미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도쿄의 한반도 전문가는 이와 관련해 “국가 수반인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북·미 관계에서 중요한 추진력이 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최소한 ‘미사일 협상과 평화협정을 맞교환하는 제2의 제네바 협상’이 출현할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에는 미국 쪽에서도 각료급 고위 인사의 방북설이 나돌아 관심을 모았다. 최근 입수된 정보로는 찰스 카트먼 한반도 핵대사가 8,9월께 북한을 방문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밖에 눈여겨 보아야 할 미국측 인사로는 카터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만약 북·미 관계가 10월중 수교를 목표로 움직인다고 할 때 그가 재방북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고어 부통령은 1994년 카터 방북 당시 행정부 내에서 그의 방북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거전 막판에 고어 후보가 선거 판도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카터 재방북을 통한 북·미 수교 카드’를 빼어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10월 ‘북·미 수교설’이 나오고 또한 이를 위해 남북한과 미국 당국자들이 어떤 시나리오를 작성 중이라는 가정이 성립할 수 있는 이면에는 이번 남북 정상회담과 미국은 과연 어떤 함수관계였는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깔려 있다. 지난 4월10일 정상회담 합의 사실이 발표된 이후 미국은 ‘남북간 비밀접촉 과정에서 소외되어 심통이 나 있는 강대국’의 이미지였다. 반면에 중국은 ‘정상회담 중재설’이 유포되면서 갑자기 한반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처럼 부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런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선 이들은 ‘중국 중재설’의 상당 부분이 미국 정보기관이나 전문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유포되고 있다고 본다. 남북이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 접촉을 중국을 무대로 했다는 점에서 중국이 일정한 역할을 했을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중국이 주역을 담당했다는 것은 비약이라는 지적이다. 오히려 중국 중재설을 유포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고 미국의 역할을 숨기려는 고도의 트릭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지적이다. 남북 정상회담은 ‘페리 프로세스’의 일환

사실 지난 4월10일 느닷없이 정상회담 합의 사실이 발표되어서 그렇지 이 흐름이 갑자기 평지 돌출 식으로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지난해 전개되었던 상황을 돌이켜 보자.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최대의 이슈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페리 프로세스(윌리엄 페리 북한정책조정관이 ‘페리 보고서’에서 밝힌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 방안)’였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해 1년간 한반도 이슈의 핵심에 자리잡았던 페리 프로세스와 관련한 내용들이 언제부터인가 세인의 관심권에서 멀어져 버렸다는 점이다. 페리 프로세스는 실종된 것인가.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남북 정상회담의 저류에는 페리 프로세스가 강하게 흐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9월15일 발표된 페리 보고서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페리 보고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미·일이 단계적으로 취할 조처들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보고서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난데없이 이상한 구절이 튀어나온다. ‘북한이 당분간 붕괴할 것 같지 않으며, 북한 체제를 전복하거나 개혁시키는 방안은 성공할 가능성도 희박하고, 한국이나 일본의 지지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한 대목이다. 사실 이 내용은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이후 미국의 북한 정책을 총괄적으로 반성한 것이어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었던 데 비해 언론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다. 이미 알려졌다시피 제네바 합의에서 미국과 북한은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은 경수로형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 준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에 따라 미국은 2003년까지 100만 ㎾짜리 경수로형 원자로 2기를 지어 주어야 하나 사실 미국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즉 2003년 이전에 북한이 스스로 붕괴하거나 아니면 붕괴를 유도하는 전략을 추구해온 것이다. 따라서 북한에 매년 주도록 되어 있는 중유 50만t 공급이나 경수로 공사 등은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금세 붕괴할 것으로 예상했던 북한 체제는 붕괴 조짐은커녕 위기를 극복하고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페리 보고서가 나오기 약 6개월 전인 지난해 4월 카트먼 한반도 핵대사는 ‘북한 경제가 이미 저점을 통과했다’고 선언함으로써 붕괴론이 빗나갔음을 자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미국, 경수로 차질로 한·미·일 공조 필요성 커져

그동안 경수로 공사를 등한시하는 바람에 완공 목표 시기인 2003년을 훨씬 벗어나 2008년께나 완공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그 기간만큼 북한에 엄청난 손해 배상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2002년부터 100만㎾, 그리고 2003년부터 경수로 2기 분에 해당하는 2백만 ㎾ 전력을 북한에 보전해 주어야 하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미국의 약점을 잡은 북한은 이미 지난해부터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고늘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한국·일본과 공조해야 할 필요성이 새삼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미국 혼자 부담할 수 없으니 나누자는 셈이다. 더군다나 현안인 미사일 문제 해결 역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수밖에 없어 공조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이런 관점에 입각해 지난해부터 어떤 일들이 진행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페리 보고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에 대해 단계적 해법을 제시했는데, 1단계가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유예하고 그대신 미국은 경제 제재 완화 조처를 취한다’는 내용이다. 이 부분은 이미 지난해 9월12일 미국과 북한이 베를린 회담을 통해 합의한 내용이다. 즉 1단계는 형식적이나마 완료된 셈이다.그 다음이 중·장기 과제로 ‘북한이 핵·미사일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미국은 대북 수교를 포함해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내용이다. 이 중·장기 과제를 다루기 위해 사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북한 고위급 인사의 미국 방문이 얘기되어 왔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연기에 연기를 거듭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자금 문제를 들 수 있다. 경수로 건설 차질로 인한 전력 손실비는 차근차근 해결한다 해도, 미사일 수출이나 개발 중단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미국이 반대 급부를 어떻게 지불할지 제시해야 한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북·일 수교 교섭 재개이다. 페리 보고서가 발표된 지 한달쯤 지난 1999년 10월 말 무라야마 전 총리가 이끄는 일본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다. 이를 계기로 북·일 수교 교섭이 재개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미사일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의 자금 지원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20억 달러 정도의 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미국은 일본이 미국보다 먼저 북한과 수교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고 한다.

그 다음에 걸리는 문제가 바로 한국과 관련한 것이다. 즉 페리 프로세스의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들기 위해서는 북·미 평화협정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북한 고위급 인사가 미국을 방문할 때 협의할 내용이 바로 이 문제라는 점은 올해 2월18일 페리 조정관 스스로 분명히했다. 즉 ‘LA 태평양 21세기 연구소‘ 강연에서 그는 ‘북한이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경우 미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정식 외교 관계도 수립하겠다’고 발언한 것이다.

그런데 북·미 양자가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에 대해 한국 정부는 그동안 한국 역시 전쟁 당사자였음을 주장하며 강력하게 반대해 왔다. 평화협정을 북·미 양자가 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나 자존심을 생각해 방치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결국 남북 관계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는 페리 프로세스가 2단계에 진입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결국 그 돌파구를 남북 관계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북한 전문가인 김남식씨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설명한다. 즉 ‘한반도의 기본 축인 북·미 관계가 크게 회전하기 위해서는 보조 축인 남북관계 개선이 필요했고, 그 효과도 극대화할 필요가 있었다’.

강성윤 동국대 교수 역시 김남식씨와 비슷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는 특히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남쪽과는 통일 문제만 협의하고 긴장 완화나 평화 문제를 남겨 둔 것은, 이 문제는 미국과 해결할 문제라는 기본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주한미군 문제나 평화체제 문제는 미국과 평화협정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것이며,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남한 역시 한반도 문제 당사자로서 국제적 인정을 받게 되었으므로 이를 더 이상 반대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이번 정상회담의 여세를 몰아 남북한과 미국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본격적인 논의에 돌입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마지막으로 북한은 과연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실증적 자료를 통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 몬테레이 국제조사연구소와 러시아 현대국제문제센터가 공동으로 출간한 ‘북한 보고서’ 2000년 3∼4월 호( 2000년 5월호에 재인용)에는 러시아 분석가들이 북한 고위층 인사들을 인터뷰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 북한 지도부는 미국의 반응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북한 지도부는 미국으로부터 경제 및 전략적 양보를 기대하고 있다. 사실상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에 응한 것은 미국에 양보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보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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