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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흑금성과 신뢰 관계 16개월 취재 일기

목숨 걸고 북풍 막은 박 채서의 ‘특수 공작’ 비화

기자 ㅣ | 승인 1998.04.02(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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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흑금성을 처음 만난 때는 96년 11월 이었다. 당시 <시사저널>은 이른바 청와대 밀가루 북송 기사로 김영삼 정부와 ‘한판 붙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때 정보 기관에 근무하는 한 선배와 함께 우연히 그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 신분을 대북 관련 업무에 종사한다고만 밝히고, 청와대가 밀가루를 보낸 것은 사실이니 권력에 굴하지 말고 소신껏 보도하라고 격려했다. 그는 첫 대면 이후 신변이 위험에 처한 최근까지도 자신이 안기부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지만, 정보기관을 취재해 온 기자의 직감으로 첫눈에 그가 안기부 특수요원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정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므로 청와대가 밀가루를 보낸 문건이나 자료를 줄 수는 없지만 그것을 찾을 길이 있다고 말했다.

밀가루 북송 기사 후속 취재로 인연

그러나 그는 “그런 (대북 지원) 사업은 대개 국내에서는 구두로 이루어지므로 물증을 확보할 수는 없고 역으로 치고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즉 밀가루를 받은 쪽(북한)에서부터 취재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설득력 있는 제안이었다. 물론 안기부 요원임이 분명해 보이는 그의 제안이 혹시 나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안기부의 역공작이 아닐까 하는 의혹도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밀가루 북송 사건의 후속 취재가 급했던 만큼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기자로서 호기심도 발동했다. 그래서 일단 부딪쳐 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다 97년 2월 중국통인 한 선배의 주선으로 북한의 안기부에 해당하는 국가보위부 요원들을 북경에서 만날 기회가 생겼다. 그때 나는 흑금성이 뜻밖에도 아자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광고회사의 전무 직함을 가지고 북한에서 한국 기업이나 상품의 광고를 찍는 광고사업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96년부터 이 사업에 열정을 가지고 뛰어들었는데, 이 사업은 그가 군에 있을 때인 91년부터 수행해 온 대북 특수 임무를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안전 장치라는 점에서 그한테도 좋은 기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자커뮤니케이션이 북한과 오랜 협상 끝에 따낸 독점적인 광고 사업권은, 그를 포함한 아자팀이 5년 동안 1년에 네 번씩 보름에서 한 달에 걸쳐 자유롭게 북한을 왕래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사업은 또한 북한이 한국의 민간인에게 처음으로 최장기간 방북 교류를 허용하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남북 문화협력사업의 지평을 여는 절호의 계기였다. 그리고 이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와 나는 결속력을 키워 가게 되었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6월께부터 내게 심각한 고민의 일단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북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김기자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느냐”면서 나의 견해를 묻기도 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내게 자신의 세 가지 신념을 털어놓았고, 나는 그것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그는 우선 북한이 대선에 개입해 한국의 대통령 선출을 좌우하는 상황만큼은 절대 막아야 한다는 신념을 피력했다. 그가 북한 침투 및 와해 공작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파악한 북한 수뇌부의 의중에 따르면, 북한은 96년 4월 판문점 무장 병력 시위를 통해 총선에 개입한 이후 자기들이 한국의 대통령을 선택할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북한이 한국의 대통령을 선택하는 그런 상황만큼은 자신이 역으로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또 막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대북 첩보전의 제1선에서 뛰면서 그가 갖게 된 두 번째 신념은, 김영삼 대통령의 대북 정책 실패가 다음 정권에서도 되풀이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남북 관계에서만큼은 대통령의 지도력이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특수 임무를 수행하면서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했다.

세 번째 신념은, 그가 공작 임무를 수행하면서 얻은 논리적 귀결로, 적(북한)이 낙선시키려 하는 국가 지도자라면 역으로 우리한테 가장 필요한 지도자가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지도자는 바로 김대중 후보였다.

“북한의 한국 대선 개입 막아야 한다”

그가 북한 수뇌부를 접촉해 북측의 의중을 파악한 바에 따르면, 북한은 세 후보 중에서 이인제 후보를 가장 선호했고 김대중 후보를 가장 기피했다. 김정일 총비서의 처지에서도 나이나 경륜으로 볼 때 김대중 후보보다는 이인제 후보가 훨씬 더 상대하기 쉬운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이회창 후보는 김영삼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심각한 경제난 때문에 한국과의 적당한 관계 개선을 원하는 북측의 대화 상대로는 마땅치 않은 후보였다.

이 세 가지 신념에서 의견 일치를 본 그와 나는 이같은 신념을 실천할 구체적 방도를 모색했다. 그는 아무런 사심 없이 김대중 후보에게 직보할 수 있는 정치인이 누구인가를 찾았고, 어느 날 내게 정동영 의원이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나는 내가 아는 정의원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 또한 이미 정의원과 절친한 정의원의 선배(언론인)를 통해 정의원에 대해 알아 본 눈치였다. 나는 그가 정의원과 접촉하려 한다는 것을 직감했고, 나중에는 그가 정의원과 은밀히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눈빛으로 알게 되었다. 그때가 7월 말께였다.

그는 정의원 선배의 주선으로 정의원을 만나 “내가 누구인지는 알 필요 없다. 국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믿어 달라”면서, 몇 가지 북풍 공작 징후와 북풍주의보를 전했다. 그러나 흑금성을 만난 정의원은 처음에 반신반의한 것처럼 보였다. 우선 나름으로 박채서 전무의 신원을 파악해 보았지만 안기부에서는 잡히지가 않았다. 그러나 오익제씨 월북 사건이 터지면서 흑금성의 경고가 현실로 다가왔고, 국민회의는 서둘러 천용택 의원을 팀장으로 한 북풍 대책팀을 구성했다.

국민회의가 흑금성의 제보에 신뢰감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9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추석 연휴 기간에 비밀 방북한 사실을 정동영 의원에게 귀띔해 준 것이었다. 흑금성은 그 사실을 북한측 핫라인을 통해 확인했고, 국민회의뿐만 아니라 내게도 그 첩보를 알려 왔다. 당시 내가 취재에 들어가자 대우그룹과 통일원은 이를 부인했으나, 다른 경로를 통해 비밀 방북 사실을 확인해 특종 보도할 수 있었다. 이 보도와 흑금성의 제보는 국민회의 북풍 대책팀이 정대철 부총재를 팀장으로 하여 2단계 확대 개편되는 계기로 작용했다(북풍 대책팀은 선거 직전에 정재문 의원의 대북 접촉 사실을 확인하면서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을 위원장으로 3단계 확대 개편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당과 북한측과의 거래설에 촉각을 세우고 있던 국민회의로서는 김회장의 비밀 방북 목적이 무엇인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정보위원회 간사인 천용택 의원이 정의원과 함께 여의도의 한 호텔에서 흑금성을 만나기 시작했다. 만남의 형식도 주로 두 의원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중한 천의원은 여러 경로를 통해 박전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 보았는지, 내게 박전무라는 사람이 혹시 ‘동일한 소스’가 아닌지를 문의해 왔다. 그러나 박전무 또한 내게 천의원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를 물어 왔던 터라 나는 ‘아마도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얘기했다.
아내조차 신분 모를 만큼 보안 철저 유지

아울러 내가 알아 본 바로는 사관학교 출신이고 자기 입으로 한 번도 안기부 요원이라는 말을 한 적은 없지만, 내가 만난 안기부 요원 중에서 가장 국가관이 투철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므로 믿어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의 집에도 가 보았고 그의 부인도 여러 번 만나 보았지만, 아내도 그의 신분을 모를 만큼 보안 의식이 철저한 블랙(흑색) 요원이라는 사실을 들어 그를 ‘개런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아내는 얼마 전에 남편의 책상 서랍에 있는 평양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남편이 북한을 드나드는 위험한 일을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정도이다. 그의 부인은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이 중국 출장을 다녀오는 것으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아무리 비밀스럽게 만난다 하더라도 ‘인가된 국가 공작 사업’을 수행하는 그가 국민회의 두 의원과 자주 접촉하다 보니 10월 말쯤부터는 그도 안기부 감찰실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상부선은 그에게 경고 사인을 보냈다. 천의원이 안기부에 박전무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박전무가 노출된 흔적도 있다.

안기부 모처가 그를 미행·감시하거나 도청하기 시작했다. 그는 국민회의 두 의원을 왜 만나는지 적당히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는 일부러 허위 정보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어쨌건 그가 정보 보고한 내용 ‘일부’가 바로 이번에 공개된 ‘해외 공작원 정보 보고’ 문건에 담겨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문건이 공개됨으로써 흑금성이라고 부르는 특수 공작원 신분이 드러난 것이다.

문제는 흑금성이 보고한 문건의 상당 부분이 자신의 보고와 달리 선거 뒤에 짜깁기되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하여 그는 <한겨레>가 단독 보도한 이 문건을 통해 이중 간첩이라는 오명을 썼다. 엄청난 회오리를 불러 올 큰 사건이 터졌는데도 독자적으로 판단할 문건이 없는 다른 언론으로서는 <한겨레>를 베낄 수밖에 없었고, 흑금성이라는 괴기한 이름은 그를 영락없는 이중 간첩으로 몰아갔다. 그것은 이 문건을 입수한 <한겨레>측이 이 문건이 짜깁기된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보 공작 세계에 대한 무지에서 말미암은 치명적인 실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문건을 작성한 이대성 전 해외조사실장과 권영해 전 부장이 애당초 여권 핵심부와 ‘거래’ 또는 ‘협박’하기 위해 의도했던 노림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건이 공개되어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본부가 내려보낸 지침은 단지 48시간 피해 있으라는 것뿐이었다. 이미 언론에 의해 이중 간첩이라는 굴레를 쓴 그와 그의 가족은 온몸으로 모멸감을 버텨내야만 했다. ㄱ일보의 최 아무개 기자는 심지어 문을 열어 준 그의 아내에게 “간첩 부인 맞습니까?”라고 묻기까지 했다.
신변이 드러난 요원들에 대한 보호 프로그램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나 봄직한 사건이 현실로 다가왔지만, 신분이 드러난 공작원과 그 가족이 보호받는 영화 속의 프로그램은 현실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북풍 파문이 정치권으로 번지는 상황에서 이 특수 공작원은 자칫 ‘버리는 카드’가 될 조짐을 보였다. 그가 속한 203실 간부들이 이미 줄줄이 구속된 터여서 그를 보호할 시스템이 마비된 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인가된 국가 공작 사업을 수행하면서 그의 공작 라인에 치고들어온 ‘비인가 공작’(북풍 공작)을 온몸을 던져 막아 주었던 여권도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위험이 닥치고 있음을 예보했고, 그는 내게 SOS를 쳤다. 한 언론이 표현한 대로 그는 그때 ‘북한과 국민회의와 한나라당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언론은 그가 이중 간첩이 아닌지 의심했고, 국민회의는 그가 양다리를 걸치지 않았는지 의심했다. 나중에 조작된 것으로 확인된 문건에 따르면, 그는 그런 의심을 받을 소지가 커 보였다. 누구보다도 사실 관계를 잘 알고 있는 국민회의측이 언론 보도와 구 안기부 세력의 공작에 휘둘리는 현실은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DJ, 흑금성이 도움 준 사실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통해 정동영 의원에게 그의 서운한 감정을 전달했고 정의원도 그 심경을 이해한다고 했다. 정의원은 또 문건이 공개된 뒤에 김대통령에게 흑금성이라는 공작원이 바로 대선 전에 북풍대책팀에 도움을 준 제보자라고 보고되었던 그 사람이라고 보고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김대통령도 흑금성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안기부에서 자금을 받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특수 공작원임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여당 의원 상당수가 북한과 관련된 혐의가 있는 것으로 거론된 문건(이대성 파일)이 공개되고 야당의 정치 공세가 증폭되는 상황에서 그를 적극 옹호할 정치인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대선이 끝난 뒤에 언론은 대부분 DJ 승리 요인의 하나로 북풍 예방을 꼽았다. ‘안기부 뺨치는 국민회의 북풍 대책팀의 정보력.’ 그럴듯하고 멋있는 제목이다. 언론으로서는 이왕 집권했으니까 잘 써주자는 의도도 있었을지 모른다. 또 국민회의가 과거 야당들보다는 이른바 북풍 대처 능력이 뛰어났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을 왜곡한 찬사였다. 국민회의가 북풍 대책팀을 구성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흑금성의 제보였다. 흑금성이 김우중 회장의 방북 사실과 오익제 편지를 비롯한 일련의 평양발 편지 공세 및 비디오 테이프 공세, 그리고 정재문 의원의 대북 접촉 사실 등을 미리 예보함으로써 북풍 대책팀이 단계적으로 확대되고 대책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흑금성은 북풍 공작을 막는 것이 결과적으로 국가를 위한 행동이라는 신념으로 국민회의측에 도움을 주었지만 한 번도 대가를 바란 적은 없었다.

선거 이틀 전에 흑금성은 정동영 의원에게 마지막 전화를 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앞으로는 내가 연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좋은 결과를 바란다”라고. 그리고 실제로 문건이 공개되기 전까지 국민회의측에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 흑금성은 대북 공작과 경제협력사업(아자의 광고사업)이라는 두 가지 임무를 수행했지만, 광고사업 승인과 관련해서도 한 번도 청탁한 적이 없었다. 아자에 대한 사업 승인이 늦어지자 주변에서는 국민회의에 부탁해 보자는 말도 나왔으나, 그는 나이 많은 대통령이 거덜난 나라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데 그런 부담까지 안겨 주어서야 되겠느냐며 이를 물리쳤다.

그는 북풍 공작의 한가운데 서서 온몸으로 북풍을 막은 사람이다. 북한이 한국의 대통령을 선택하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를 위한 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일했다. 그런 점에서 흑금성은 김대통령이 고맙다고 해야 할 숨은 1등 공신이다. 그리고 그는 결코 이중 간첩이 아니고 대한민국 정부에서 활동 자금을 받는 국가안전기획부의 특수 공작원이다. 그는 국가 공작 사업을 수행하면서 북한이 대선에 개입하는 것을 탐지해 이를 유인·와해하는 공작을 수행했을 뿐이다. 그런데 구 안기부 수뇌부는 흑금성이 탐지한 특급 정보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

흑금성은 특수 훈련과 운동으로 단련된 몸을 갖고 있지만 술을 전혀 못한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특수 공작 임무 수행에 지장을 받을까 봐서이고, 다른 하나는 특수 공작이라는 긴장된 삶을 살다 위장을 버려서이다. 언젠가 그는 수 차례 방북한 까닭에 지금은 여유가 생겼지만 첫 방북 때는 긴장해서 입술이 바짝바짝 타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특수 공작원들은 적지에서 신분이 탄로나는 즉시 본국과의 생명줄이 끊긴다. 흑금성 또한 다른 특수 공작원들처럼 그런 경우를 대비해 ‘준비된 사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일부러 주소지를 자주 옮기고, 고의로 은행과의 거래 계좌나 신원 조회 명부에 ‘붉은 줄’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래서 신분이 노출될 경우 그는 자동으로 본부와의 끈이 끊어지고 예정대로 사기 전과나 은행빚이 있는 월북자가 된다. 그런 그와 가족에게 이중 간첩은 너무 가혹한 호칭이다. 신분이 드러나지 않고 목숨을 유지하려면 철저히 적을 속이거나 포섭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중 간첩이라는 표현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최고의 영예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최고 공작원이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첩보원의 세계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건은 외국의 스파이 영화에서나 보던 것이 처음으로 현실로 다가온 사건이다. 그러나 그와 국가를 불행하게 만든 이 암울한 현실은, 영원히 안기부 금고에 묻혀 있어야 할 비밀 공작 문건을 들고나온 상관들과, 그것을 공개한 정치인이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가 북한에 가 있을 때 문건이 공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아자 광고팀과 함께 올 3월 말쯤에 방북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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