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원땅 울리는 JP 징소리
  • 대전·文正宇 기자 ()
  • 승인 1995.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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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방식으로 내일 향해 뛰는 JP의 ‘정치 현주소’
자유민주연합(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지난 4월26일부터 29일까지 부인 박영옥씨와 함께 마치 대통령 선거 유세를 하듯 충청 지역을 누볐다. 김총재는 이 기간에 잠자는 시간만 빼놓고 국도로 이동하며 사람들과 만났다.

4월26일 아침 자신의 고향이자 지구당인 부여군지구당 당직자 임명장 수여식을 시작으로 28일까지 모두 18개 면을 돌았다. 그는 한 면에 대략 1시간씩, 모두 18시간을 고향 사람들과 만나 연설하고 악수하는 데 투자했다. 27일에는 대전으로 가서 대전·충남 시도지부와 대전 중구 창당대회에 참가했으며, 짬짬이 개인택시 기사 등 자민련 당원들과 만나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

그는 이틀 동안 부여 유스 호스텔에서 묵은 뒤 잠깐 서울에 올라갔다가 28일 아침 대구 가스 폭발 현장을 돌아보고 오후에 다시 충북을 방문해 청주 을지구당 창당대회에서 격려 연설을 했다. 그는 염증으로 귀가 부어올라 통증에 시달렸으나 약을 먹어가며 강행군을 계속했다. 70 고개에 접어든 노인으로서는 고달픈 여로였으나, 그는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빡빡한 일정을 차질 없이 소화해냈다.

“핫바지의 본때를 보여주마”

현재 60개 지구당을 창당한 자민련은 오는 6월27일 지방선거 전까지 80개 지구당을 더 창당하고, 연말까지는 전국 2백30여 지구당 조직책 선정을 모두 마쳐 명실공히 제 3의 정치 세력으로 뿌리를 내린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충청남북도와 대전에서 자민련 바람을 일으켜 이 지역 지방 선거에서 압승을 거둬야 한다. 김총재는 정치 생명을 걸고 충청도 지역에서 기반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김총재는 충청권 바람몰이를 위해 지역 감정을 부추긴다는 비난은 감수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는 부여에서 내내 고향 사람들에게 자민련 바람이 충청권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이번 선거가 내년 총선과 그 다음해에 있을 ‘더 큰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는 부여가 어떻게 되느냐에 달려 있다” “여러분의 양 어깨에 우리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자민련의 대전·충남 지부 창당대회 때는 ‘좋다, 핫바지의 본때를 보여주마’ ‘녹색 태풍이 뭔지 화끈하게 보여주자’는 자극적인 내용이 담긴 플래카드도 등장했다. 이 날 창당대회에서 만명에 가까운 참석자들은 기념식이 진행되는 동안 열렬하게 미리 준비한 녹색 깃발을 흔들어댔다.

87년 대선 당시 충청 지역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재기에 성공했던 김종필 총재. 민자당 대표 직에서 쫓겨나다시피 탈당한 뒤 자민련을 창당한 그가 다시 충청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재기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87년과 사뭇 다른 양상이다. 자민련이 창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기는 하지만 각종 여론 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는 충청권의 민심은 김총재와 자민련에 냉담한 편이다.
<시사저널>이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해 4월23일부터 25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은 김총재의 자민련 창당이 한국의 정치 발전 측면에서 볼 때 긍정적(28.4%)이라기보다는 부정적(37.1%)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광역 단체장 후보 지지율에서도 자민련은 충남의 심대평 후보만 앞서가고 있을 뿐 나머지 후보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전체적으로 충남에서만 자민련 바람이 불고 있을 뿐 대전과 충북의 밑바닥 정서는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권 핵심은 올해 초 지방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당내 일부의 우려를 일축하고 김종필 총재를 축출하면서 “충청권 유권자들은 이제 아무도 JP를 충청권의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나가서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지방 선거와 앞으로의 정국에는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장담한 바 있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충청권 민심의 동향만을 토대로 판단하면, 지금의 상황은 그런 호언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김종필 총재는 충청 지역을 순회하면서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의 연설은 지나치게 딱딱하고 무거웠다. 그는 충청권을 돌면서 한번도 청중의 웃음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물론 일정에 쫓긴 탓도 있겠지만, 듣는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특유의 재담은 간곳이 없었다. 연설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고향에 돌아온 사람의 넉넉한 표정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자민련에 대한 충청권의 반응이 훨씬 차가워 그가 이번 충청권 대장정을 시작했다는 얘기도 늘 그를 따라다녔다.
민자당 대전·충남 하부 조직 붕괴중

그러나 이 지역에서 김총재와 자민련의 저력을 과소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주목할 사실은 대전과 충남 지역에서 여권의 하부 조직이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충청남도 15개 시·군 민자당 소속 도의원 54명 중 37명이 자민련으로 당적을 바꿨다. 기초 의원 2백50명 중 2백30명 가량이 자민련에 입당 원서를 냈다. 대전 직할시 의원 14명 중 13명이 자민련에 합류해 민자당 소속 의원은 1명밖에 남지 않았다. 대전의 구의원 89명 중 60명 정도가 자민련으로 넘어갔다. 자민련은 대전과 충남의 도·시·군·구 의회에서 이미 여야 구도를 역전시켜 버렸다. 대전과 충남의 민자당 조직원들도 속속 이탈하고 있다. 충북에서도 주병덕 후보의 고향인 음성과 이종근 의원의 아성인 충주 등에서 도의원과 기초 의원, 그리고 조직원들의 이탈이 계속되고 있다.

민자당 대전 중구지구당 소속 한 시의원의 행보는 민자당이 현재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지 잘 말해준다. 당 소속 지방의회 의원들이 속속 탈당하는 가운데 열린 지구당 단합대회에서 그는 김종필 총재와 자민련을 맹렬히 비난해 당원들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는 자민련에 대한 대전 시민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 없다며 민자당에 끝까지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흘 뒤에 열린 충남·대전 지부 창당대회에서 그는 김종필 총재와 손을 맞잡고 단상에 나타났다. 그는 김총재와 같이 만세를 부르면서 자민련 입당을 선언했다. 그는 정부·여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산업 쓰레기 폐기업자이기도 하다.
대전과 충남의 재력가들도 자민련에 줄을 대기 시작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민자당의 한 관계자는 “누구누구가 이미 대리인을 내세워 자민련에 입당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말도 한다. 이 지역의 관변 단체장들도 어떻게든 자민련과 연줄을 맺기 위해 뛰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대전시 한 지역의 동정자문위원회의에서는 민자당 관계자가 공공연히 자민련 지지를 종용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여당 관계자와 지역 유지들이 모여 동의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인 동정자문위원회의에서 야당 지지 발언이 나온다는 것은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지방 선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이 지역 의원들의 이탈은 심상하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지역 사정에 밝고 여론의 동향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선거에서 당락이 걸려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으면 쉽게 몸을 움직일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마치 지진을 예감한 짐승들처럼 줄을 지어 자민련 쪽으로 달음박질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민자당이나 민주당은 이같은 현상을 나름대로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기는 하다. 민자당 대전시지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자민련이 쓰레기 처리를 도와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현 정부의 개혁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지역의 부패한 토호들이 자민련 쪽으로 달려가고 있다면서 “자민련으로 옮긴 사람들은 진작부터 물갈이 대상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민련이 겉으로는 집안이 북적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속이 없다. 충청도의 바닥 정서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고 되풀이해 강조한다.
내각제 위해 JP·DJ 연대할 것인가

그러면서도 민주당 쪽에서는 자민련이 민자당 조직을 급속도로 무너뜨리고 있다는 데는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는다. 민주당 대전시지부에서는 충남과 대전의 민자당 하부 조직은 이미 3분의 2 가량이 자민련 쪽으로 넘어갔다고 파악하고 있다. 민주당 쪽에서는 자민련이 민자당 조직을 적당히 무너뜨리면 자민련 출범 이후에도 야당 지지자들은 별반 동요를 보이고 있지 않아 선거에서 승리할 수도 있다고 계산하고 있다. 민주당의 대전시장 후보로 유력한 변평섭씨 진영에서는 “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는 자민련의 기세가 강해 지금으로서는 민자당이 좀 선전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현 정부의 개혁에 불만을 느낀 세력들이 자민련에 들어가고 있다는 민자당측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충청도민의 정서 속에는 여론조사로 포착할 수 없는 이상 기류가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민련에 입당하는 세력들은 그 점을 높이 사고 있는 것 같다. 여론조사와 정치 현실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또 다른 각도에서 김총재와 자민련의 득세를 점친다. 지역 할거주의에 바탕한 3김 구도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발광체라고 한다면 김총재는 반사체라는 것이다. 양쪽의 싸움이 소강 상태에 있을 때는 김총재도 낮달처럼 숨어 힘을 못쓰지만 양쪽이 빛을 발하면 김총재도 일정한 지분을 챙기게 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지금은 지방 선거를 앞두고 두 김씨가 강렬한 빛을 내고 있기 때문에 김총재도 덩달아 덕을 보게 돼 있다는 논리이다. 그는 특히 김대중 이사장이 민주당 선거에 직접 개입하는 인상을 주면 줄수록 충청 지역의 정서는 김총재 쪽으로 돌아설 공산이 크다고 내다본다.
김총재가 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내각책임제 개헌이다. 김총재는 내각제를 위해서는 김대중 이사장과 연대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동안 ‘무언의 연대’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최근 들어서는 무언의 연대가 유언의 연대로 발전하는 것 같은 양상이다. 김대중 이사장이 4월26일 한 강연회에서 ‘내각제 개헌이 통일을 위해서 반드시 바람직하지 않은 제도라고는 할 수 없다’고 얘기하자 김총재는 대전에서 즉각 ‘옳은 말씀’이라고 화답했다. 지난 3월 중순에는 ‘비지’(비판적 지지:87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김대중 이사장을 지원했던 그룹)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대전의 재야가 반JP 시위를 준비했던 일이 있었는데, 동교동이 한화갑 의원을 대전으로 급파해 시위를 막았다는 얘기도 들린다.

민자 “JP는 DJ 품에서 정치 생명 마감할 것”

그러나 김총재와 김이사장의 연대에는 양면성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내각책임제 개헌을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 하지만, 김총재의 입지는 김이사장과 연대할 때보다는 대립할 때 더 넓어질 수 있다는 측면도 있다. 아직 충청권에서는 김이사장에 대한 거부감이 가시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도 김총재와 김이사장의 연대에 대해 응답자들은 긍정적인 답변(24.8%)보다는 부정적인 반응(40.1%)을 많이 보였다. 지방 선거에서 승리한 뒤 김총재가 김이사장과 연대를 시도하면 지역에서 뜻하지 않은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 그리고 김이사장과 연대하려는 움직임 자체가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어찌됐든 충청 지역 민심의 저류를 살펴보면 상황이 반드시 자민련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가는 것 같지는 않다. <시사저널>의 이번 여론조사에서 만일 김총재가 9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경우 지지할 것인지 물은 결과, 28.5%만 지지를 표명하고 42.4%는 거부감을 나타냈다. 반면 내각책임제 개헌에는 40.2%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대통령제 지지는 35.4%). 이는 자민련이 내건 내각책임제 개헌 구호가 이 지역에서 어느 정도 먹혀들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민련 총재 비서실장 이긍규 의원은 “광역 의회나 기초 의회까지 싹쓸이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광역 단체장 선거에서 자민련 후보가 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자신한다. 그는 “충청도 여론을 잘 알고 득표력도 있는 사람들이 자민련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 여론조사야 어떻게 나오든 승패는 자명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충청도 3개 광역 단체장과 인천·경기 등을 합쳐 5~6곳의 광역 단체장을 자민련이 휩쓸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민주당과 합쳐 광역 단체장 자리 9~10석을 야당이 가져가면 민자당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김총재와 자민련이 꿈꾸는 최상의 시나리오일 뿐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이번 지방 선거 결과가 여론조사 내용과 같다면 김총재와 자민련은 충남 지역에서만 간신히 승리한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되면 김총재의 처지는 궁색해진다. 손바닥만한 지분을 가진 군소 영주의 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다.

민자당의 한 인사는 “JP는 결국 DJ 품에서 정치 생명을 마감할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JP가 지방 선거에서 실패한 뒤 DJ와 손을 잡았다가 지역 감정이라는 덫에 걸려 충남에서 확보한 작은 지분마저 잃어버리고 몰락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JP는 YS에게나 DJ에게나 종내는 버림 받을 운명”이라고 말한다.

아무튼 김총재는 현재로서는 지방 선거 승리를 목표로 죽어라 뛸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는 과거의 인물들을 대거 거느리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세몰이라는 전형적인 과거의 방식으로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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