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총성과 죽음, 안전 지대가 없다
  • 동 티모르 딜리/글 崔寧宰·사진 尹武泳 기자 ()
  • 승인 1999.09.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본지 특파원, ‘내란의 도시’ 동 티모르 딜리 탈출기
<시사저널>은 지난 8월25일 최영재(국제팀·사진 왼쪽)·윤무영(사진부) 기자를 동(東) 티모르 주민 투표 현장에 특파했다. 두 기자가 총탄이 쏟아지는 현장을 누비며 취재한 기사와 사진을 본사에 송고한 과정 자체가 현장 상황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윤기자는 투표가 끝난 뒤 딜리 공항이 마비 상태에 빠지자 필름을 두 꾸러미로 나누었다. 한 꾸러미는 먼저 귀국하는 참여연대 실무자에게 맡겼고, 한 꾸러미는 본인이 직접 갖고 `‘딜리 탈출’을 시도했다. 사진의 절반만이라도 마감 시간에 대기 위해서였다. 윤기자는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9월3일 오후 영국 BBC 방송 전세기에 편승해 딜리를 빠져나와 4일 귀국했으며, 참여연대 실무자는 5일 새벽 서울에 도착해 사진은 마감 시간 전에 편집국에 모두 들어왔다. 최기자는 묵고 있던 호텔에 자치파 민병대가 난입하기 직전까지 현장을 지켰다. 9월4일 오전 유엔파견단(UNAMET)이 투표 결과를 발표한 뒤 전쟁터로 변한 딜리 상황을 취재하고 6일 저녁 포르투갈 전세기편으로 빠져나왔다. 다음은 투표 결과가 발표된 뒤부터 최기자가 한국 기자로서는 마지막으로 딜리를 탈출하기까지 약 35시간 동안의 숨막히는 현지 상황을 시간대 별로 구성한 것이다. <편집자>
■ 9월4일 오전 8시30분, 딜리 ‘유엔파견단 시민경찰 본부(UNAMET CIVILIAN POLICE HEAD QUARTER·유엔시민경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각국에서 파견된 유엔 경찰들이 긴장한 얼굴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유엔파견단 요원들은 모두 대피하고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유엔시민경찰 관계자는 “오늘 투표 결과를 발표한다. 장소는 마코다 호텔, 시간은 9시15분께이다”라고 귀띔해 주었다. 원래 투표 결과는 9월7일 이후에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국 경찰청이 동 티모르 투표 현장을 감시하는 유엔시민경찰 요원으로 파견한 안정호 경위는 “오늘부터는 전혀 새로운 상황이다. 우리들은 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임무를 받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마코다 호텔로 달려가는 기자에게 유엔시민경찰 사령관은 “동 티모르 전역에서 반독립파와 민병대인 밀리샤가 수도 딜리로 몰려들고 있다. 대규모 소요 사태가 예상된다. 딜리에서 가장 큰 호텔인 마코다 호텔을 빼고는 어느 곳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니, 그 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 9월4일 오전 9시15분, 딜리 시내 중심부 마코다 호텔 1층 유엔 기자회견장.

세계 각국 취재진이 유엔파견단 이안 파틴 단장의 투표 결과 발표를 기다리며 술렁이고 있다. 4백50여년 동안 포르투갈의 식민 통치를 받다가, 다시 25년간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받은 동 티모르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발표가 시작되었다. “유효표 43만8천9백68표, 독립 찬성 34만4천5백80표(전체 투표자 수의 78.5%), 독립 반대 9만4천3백88표(21.5%), 무효표 7만9천85표(1.8%).”

압도적인 표차로 독립이 결정되었다. 현장에서 만난 유엔파견단 고문 손봉숙 박사(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는 “예상 밖으로 표차가 워낙 커 부정 투표라는 잡음이 일어날 수가 없다. 유엔에 투표 보고서를 내기도 한결 수월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 순간은 한국으로 치면 45년 8월15일 일왕의 항복 메시지가 방송되는 감격적인 순간과 같다. 그렇다면 모두들 길거리로 뛰쳐나와 목청껏 만세라도 부르련만 딜리 시내는 고요하기 짝이 없다. 유령의 거리 같은 시내에서 움직이는 물체는 얼룩무늬 전투복과 M16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인도네시아 병사들과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를 활개치고 다니는 반독립파 민병대 병력뿐이다.

■ 9월4일 오전 10시5분, 마코다 호텔 오른쪽 도로.

호텔 오른쪽 무너진 콘크리트 담벼락 밑에 인도네시아군 병사 6명이 오른쪽 해변 쪽으로 소총을 겨누고 있다. 섭씨 35°, 뜨거운 태양이 내리쬔다. 사주 경계를 펴고 있는 인도네시아 병사도 조금은 맥이 빠진 듯하다.

탕 탕 타타타타, 멀지 않은 곳에서 콩 볶는 듯한 자동소총 소리가 들려 왔다. 인도네시아 병사들이 반사적으로 총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 기자들이 총소리가 나는 쪽으로 민첩하게 움직인다. 독립을 반대하는 민병대인 밀리샤 그룹의 발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듯하다. 투표하기 전부터 독립파와 반대파 간의 교전으로 하루 평균 4∼5명씩 죽어 갔다. 그러나 투표 결과가 발표된 오늘부터는 아주 새로운 국면이다. 예상대로 내전이 벌어진 것이다. 총소리가 난 곳은 호텔 뒤쪽이었다. 호텔 주변에는 인도네시아군과 경찰이 주변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민병대 접근을 막고 있다. 기자들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마코다 호텔 주변뿐이다. 타타타타… 호텔 뒤쪽에서 다시 소총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 저지선에 바짝 접근해 있던 카메라 기자 10여 명이 우르르 호텔 현관 쪽으로 도망쳐 왔다. 모두가 얼굴이 사색이다. 인도네시아군 병력이 취재진에게 고함을 지른다. 바깥으로 나오지 말라는 경고인 것 같다.

■ 9월4일 오전 10시35분, 마코다 호텔 현관.

독립파 정치 조직인 동티모르민족저항평의회(CNRT·민족평의회) 지도자인 마뉴엘 카라스칼라오 일행이 탄 지프가 도착했다.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중 나온 독립운동 참모들과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훤칠한 키에 금테 안경을 쓴 그는 동 티모르의 초대 대통령 0순위인 사나나 구스마오가 91년 이래 자카르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동 티모르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이다. 그는 지난 4월 반독립파 민병대의 습격으로 열일곱 살 난 아들을 잃었다.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마뉴엘은 영어를 하지 못하고 포르투갈말을 쓴다. 취재진의 질문이 쏟아지자 수행 비서가 영어로 통역해 준다(아래 인터뷰 기사 참조). 도착하자마자 그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호텔 2층에는 민족평의회의 임시 상황실이 차려져 있다.
■ 9월4일 오전 11시, 마코다 호텔 오른쪽으로 10여m 도로.

인도네시아 국기가 가슴에 새겨진 검정색 티셔츠를 입은 민병대 대원 10여 명이 권총을 쏘며 취재 기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장검을 휘두르고 기자들을 쫓았다. <시사저널>은 9월1일 딜리 시내에서 민병대 그룹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필라메노 드 지저스 호나이를 만난 바 있다. 그는 “포르투갈·호주·캐나다 언론인들에게 첫 번째 습격 대상이니 조심하라고 전하라. 그러나 당신 같은 아시아 기자들은 안심해도 된다”라고 말했다. 포르투갈·호주·캐나다 세 나라는 동 티모르를 인도네시아에서 분리 독립하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끌고 간 나라이다. 반독립파인 민병대는 그래서 이 세 나라 언론인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다. 문제는 인도네시아 경찰과 군 병력이다. 이들은 자동화기로 무장하고 있으면서도 민병대의 난동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 9월4일 오후 1시, 마코다 호텔 1층 레스토랑.

탕 탕. 레스토랑 오른쪽 유리창이 깨지며 총알이 날아들었다. 주방에서 접시 깨지는 소리가 진동했다. 식사를 하던 스페인 기자와 포르투갈 기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주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로비에서 서성이고 있던 취재진도 모두 2층으로 대피하고 없다. 주방 뒤로 난 복도를 따라 정신 없이 뛰다 보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3층 베란다에서 아래쪽을 내다보던 사람들이 계단으로 뛰라고 손짓했다. 있는 힘을 다해 뛰다 보니 앞서 뛰는 기자들이 보였다. 총성은 더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총격에서 한 가지 확인된 것이 있었다. △이 곳도 이제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점 △민병대가 이제 드러내놓고 언론인을 공격한다는 점 △호텔 반경 10m 안으로 민병대가 접근해서 총질을 해대는데도 인도네시아군이 이를 전혀 막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 9월4일 오후 2시32분, 마코다 호텔 현관.

민병대원 2명이 탄 오토바이가 호텔 왼쪽에서 경찰의 저지 바리케이드 옆을 지나 쏜살같이 호텔 쪽으로 달려왔다. 1층에 몰려 있던 취재진은 모두 2층으로 몸을 피했다. 오토바이는 현관 앞에 멈추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군과 경찰은 쳐다보고만 있다. 민병대원 1명이 길이 1m 가량 되는 장검을 빼들고 호텔 유리창을 박살냈다. 다른 1명은 현관 앞에서 서서 조준 사격 자세로 로비 쪽을 겨누더니 2발을 발사했다. 총탄은 현관 유리창에 0.3㎝ 가량 되는 구멍을 내고 호텔 로비 안내 데스크쪽 벽에 날아와 박혔다. 장검으로 유리창을 깬 민병대원은 로비 안으로 난입해 칼을 20초 가량 휘두르다가, 권총을 쏜 다른 대원과 함께 유유히 오토바이를 타고 호텔 오른쪽으로 사라졌다.

■ 9월4일 오후 3시07분, 마코다 호텔 로비.

민족평의회 리더 마뉴엘 카라스칼라오가 깨진 유리창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며 이동 전화로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티모르 섬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경찰 간부에게 항의 전화를 하는 듯하다.

■ 9월4일 오후 3시30분, 마코다 호텔 현관.

동 티모르 주둔 경찰 총사령관 팀블 실라엔이 호텔에 도착했다. 그는 깨진 호텔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마뉴엘과 악수를 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딜리의 치안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나가고 난 뒤 바로 군과 경찰 병력 50여 명이 호텔 주변에 증강 배치되기 시작했다. 경찰 간부 한 사람이 들어와서 1층 로비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을 불러모았다. “이 호텔 밖에는 절대 혼자 나갈 수 없다. 만약 탈출하기 위해 공항으로 갈 사람들은 경찰 트럭을 타고 무장 경찰 호위를 받으며 공항으로 향해야 한다. 개인 행동을 하다 사살되더라도 우리는 책임질 수 없다”라며 엄포를 놓는다.

■ 9월4일 오후 4시40분, 마코다 호텔 현관.

경찰 트럭이 한 대 도착했다. 5일 저녁에 티모르 섬을 탈출하는 임시 전세기를 타기로 되어 있는 일본 기자 30여 명이 이 트럭에 올라탔다. 트럭 뒤에 같이 올라탄 무장 경찰이 일본 기자들에게 모두 바닥에 엎드리라고 주의를 준다.
■ 9월4일 저녁 9시10분, 마코다 호텔 3층 복도.

간간이 총소리만 들려올 뿐, 밤이 되니 그다지 큰 사태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 곳은 난민 수용소로 변했다. 복도마다 세계 각국 취재진이 쌓아놓은 장비와 짐으로 꽉 차 있다. 식사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저마다 통조림 같은 응급 식량을 꺼내 먹고 있다. 아예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자는 이들도 눈에 띈다.

■ 9월5일 아침 10시05분, 마코다 호텔 앞 도로.

기자들이 로이터 TV와 AP TV의 송출 장비를 경찰 트럭에 싣고 있다. 공항으로 가는 트럭이다. 아침부터 경찰은 세 차례나 언론인들을 공항으로 탈출시켰다. 위성을 이용해 생방송을 하는 CNN도 오늘까지 모든 장비를 철수할 예정이다. CNN은 유고 전쟁이 몇 달 계속될 때도 베오그라드 현지에서 취재진을 철수시키지 않았고, 걸프전 때도 바그다드에서 취재진을 철수하지 않았다. CNN 관계자들은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철수 이유를 밝혔다. 걸프전이나 유고 전쟁 때에도 저널리스트들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은 생기지 않았는데 동 티모르에서는 민병대가 저널리스트에게 총질을 해대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 9월5일 오전 11시30분, 딜리 공항.

아수라장 그 자체다. 탈출하는 비행기를 타려고 몰려든 기자와 자원봉사자 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발리 섬으로 날아가는 메르파티 항공의 정기 비행기 편은 예약이 끝난 지 오래다. 그러나 이 항공사 티켓 판매 창구 앞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여러 줄을 이룬 채 길게 서 있다.

■ 9월5일 낮 12시35분, 딜리 여객선 터미널.

오후 1시에 서(西) 티모르의 쿠팡으로 가는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항구로 왔다. 배를 타고 동 티모르를 탈출하기 위해서였다. 인도네시아 깃발을 단 군함 1척이 군경 가족들을 급하게 군함에 태우고 있다. 터미널 입구에서 이 장면을 찍으려던 일본 사진기자가 1.2m 정도 되는 칼을 빼든 민병대원에게 쫓기고 있다. 현장을 순찰하던 인도네시아군 장교에게 보호를 요청한 뒤 선착장으로 향했다. 인도네시아군 장교는 “사진기를 꺼내면 당장에 칼이나 총탄을 맞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사방에 권총을 손에 들고 칼을 빼든 민병대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그들이 아시아 사람들을 헤치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뿐이다. 여객선 앞으로 갔다. 세간살이를 싣고 피난을 떠나는 주민들로 선착장은 아수라장이다. 그러나 30분 뒤에 떠난다는 이 배는 서 티모르 쿠팡으로 가는 배가 아니라 자바 섬으로 가는 배였다. 쿠팡으로 가는 배는 5시에 있다고 했다.

■ 9월5일 오후 3시45분, 투리스코 호텔.

M16으로 무장한 인도네시아군 병력에 경호를 요청한 뒤 딜리 시내 동쪽의 투리스모 호텔로 왔다. 마코다 호텔 앞에서 취재하다 이곳으로 피신해 왔다는 한 일본 사진기자가 민병대가 마코다 호텔에 불을 질렀다고 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마코다 호텔 일대가 온통 불바다이고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다. 마코다 호텔 앞은 여객선 터미널이 있는 항구이다. 배를 타기는 힘들 것 같다.

■ 9월5일 오후 5시10분, 딜리 시내를 달리는 인도네시아 경찰 트럭.

무조건 공항으로 향했다. 안전한 곳은 공항뿐이다. 유엔 직원들도 이 시간 현재 투표감시단 본부 건물에 고립되어 있다는 소식이다. 트럭 뒤에 같이 올라탄 무장 군인이 자세를 바짝 낮추라고 주의를 준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총소리가 들려온다. 마코다 호텔에서는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다.

■ 9월5일 오후 6시, 딜리 공항.

푸른 베레를 쓴 인도네시아 공수부대 요원 2백명 가량이 군 수송기에서 빠져나오고 있다. 공수부대원들은 대기하고 있던 군 트럭에 올라탔다. 인도네시아는 티모르 섬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유엔평화유지군을 투입하려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하고 속속 자국 병력을 동 티모르 섬으로 증파하고 있다.

■ 9월5일 오후 6시15분, 딜리 공항.

포르투갈 정부가 자국 언론인을 대피시키기 위해 임시로 마련한 전세기에 다행히 자리가 났다. 저녁 8시에 자카르타로 날아가는 비행기이다. 탈출하는 언론인과 유엔 요원 들은 모두 1번 대합실에 모여 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으면 민병대의 습격으로부터 지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 9월5일 저녁 8시, 딜리 공항 활주로.

임시 전세기가 기수를 서서히 들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불바다가 된 동 티모르를 탈출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창 밖으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