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싸인 고대사, 단군의 진실
  • 李興煥 기자 ()
  • 승인 1995.08.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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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은 檀君王儉에 의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상고사 부분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글이 역사학계로 넘어가면 수십 권의 책으로 엮이게 된다. 고조선은 고고학 인류학 사학 신화학 언어학은 물론, 화학 건축공학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를 밤새워 진땀나게 만들기도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게도 만드는 고대사의 가장 매력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나라의 존재 여부에서부터 위치와 건국 연대, 사회·경제·정치 등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그냥 섣불리 넘길 만한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단군이라는 인물의 신상명세서에 써넣을 수 있는 것은 단 몇 가지의 신화적 사실뿐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桓雄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원래 곰이었는데 마늘과 쑥을 먹고 여자가 된 인물이고, 평양성에 도읍을 세웠다는 것 등이다. 그가 단군조선을 건국했다고 추정되는 기원전 24세기에도 물론 인간은 존재했다. 그러나 여전히 단군왕검은 고대사의 베일에 가려 있다.

북한은 93년 이 고대사의 비밀을 벗겨냈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대박산에서 단군릉을 발굴해 단군과 부인의 뼈를 찾아냈다면서 남녀 두 사람분의 유골을 공개한 것이다.

몸뼈는 모두 86개였다. 넓적다리뼈 손뼈 갈비뼈 외에 팔다리뼈와 골반뼈도 나왔다. 그 중 42개가 단군의 뼈이고 12개는 여자의 뼈이며 나머지 32개는 어느 개체의 것인지 확인할 수 없는 뼛조각들이었다고 했다.
북한 학자들 ‘학술적 모험’ 감행

북한의 사회과학원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단군릉을 발굴한 결과, 북한 학자들은 단군의 신상명세서에 몇 가지 새로운‘사실’을 추가했다. 70세 이상 고령의 장수자였으며, 키는 1백70㎝가 넘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체격이라는 것이다. 또 단군은 비록 나이가 들었어도 허리가 곧바른 체형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같이 묻혔던 부인은 젊은 여성이라고 했다.

빈칸으로 남아 있던 단군의 이력난을 채우기 시작한 93년 초 이후 지금까지 북한 학자들은 거대한 학술적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 한국 상고사에 대한 기존 학설을 전면 뒤집는 학설들을 쉼없이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한 배에 탄 듯이 보인다. 새롭게 주장하는 단군의 존재와 고조선사에 관한 한 북한 학계에서는 단 한마디의 반론도 나오지 않고 있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단군 뼈를 전자상자성공명법(電子常磁性共鳴法)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기존의 기원전 2천3백33년보다 6백85년이 앞서게 잡혔고, 중국 요동 반도에 있었을 것으로 북한 학자들도 그동안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고조선의 도읍지는 평양으로 옮겨왔다. 물론 개천절이라는 말도 새로 쓰기 시작했다.

단군릉 발굴 이후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서는 수많은 고대 유적들도 발굴하고 있다. 이 유적 발굴은 물론 기존의 모든 학설을 뒤엎는 것들이다. 북한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평양이 한반도 고대 문명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한국측 반응은 반론 제기라기보다 대응 차원이었다. 안기부는 북한의 주장에 대처하기 위해 관련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북한문제연구소의 ‘단군릉 발굴 관련 자료’(93년 10월)가 그 결과물이다. 통일원도 움직였다. 94년 7월14일 통일원 국제교류협력실이 앞장서 역사 학자들과 자리를 마련했다. 여러 얘기가 오갔지만 주제는 단순했다. 과연 믿어도 되느냐였다. 결론은 쉽게 나왔다. ‘말도 안된다’는 쪽이었다. 대응 방안도 어렵지 않게 도출되었다.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학자들의 반응도 꽤 냉랭하다. ‘정치적인 쇼일 뿐이다’ ‘애들 장난도 유분수지 고구려 시대에 개축된 무덤에서 나온 사람 뼈를 단군 부부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등 일고할 가치도 없다는 주장이 대부분이다. ‘북한의 사상적 변화를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 않느냐’라는, 긍정적이지만 꽤 조심스런 지적도 나오고 있다.

단군릉 발굴과 대동강 유역 유물 발굴 결과를 놓고 남북한 학계는 지난 2년7개월여 동안 줄곧 서로 일방 통행만 해온 셈이었다. 지난 8월4일부터 6일까지 일본 오사카 경제법과대학이 주최한 국제 학술회의는 고대사를 전공하는 남북한 학자들이 광복 이후 처음으로 특정 주제(원시·고대 사회의 문명)를 토론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남북한 각각 8명씩이라는 참가 학자 인원 수에서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던 이 학술회의는, 무엇보다도 단군릉 발굴과 고조선 시대에 토론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까닭에 남북한 학자들 사이에 일대 격론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이 됐다. 더구나 회의 마지막 날인 6일에는 남북한 학자들끼리만 토론할 예정이었다.
단군이 실존 인물인 증거는?

그러나 결국 토론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오전·오후로 나뉘어 잡혀 있던 회의 일정은 오전으로 단축되었고, 양쪽 발표자도 각각 4명에서 2명으로 축소 조정되어 중동무이돼 버린 학술 회의가 되고 만 것이다. 회의 시작 전에 기대되었던 남북한 유적 공동 발굴과 학술 정보 상호 교환 합의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깊이 있는 논리 전개보다는 “억지다”(한국측) “왜 안 믿느냐”(북한측)는 신경전만 오간 남북 학자들의 만남은 결국 서로의 입장만 재확인한 채 없었던 일이 돼버린 셈이다. 오사카 학술회의에서 재확인된 북한 학자들의 주장은 몇 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단군릉 발굴로 단군은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실재하였던 인물이며, 그가 지금으로부터 5천11±2백67년 전에 출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단군은 평양에서 나서 평양에서 활동하다 평양에서 죽었다. 따라서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기존 학설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둘째, 고조선은 기존 일반적 학설처럼 신석기 시대의 도읍 국가가 아니라, 청동기 시대가 꽤 진척되었던 시기에 높은 문화 수준을 누렸던 고대 국가이다.

셋째,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된 유적·유물들이야말로 단군조선이라는 고대 국가의 징표라고 주장한다(19쪽 상자 기사 참조). 강동군에서 발굴된 黃垈城은 일종의 산성 형태를 띠고 있다. 산성은 평지의 성이나 목책과 달리 군사 시설이기 때문에 통치자의 지휘처로 사용되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단군조선 시대와 유사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진 이 산성의 존재는 곧 고대 국가의 징표이다.

한국 학자들의 반박 논리는 만만치 않다. 가장 먼저 제기되는 반론은 신빙성 문제이다. 崔夢龍 교수(서울대·고고미술사학)는 “이제까지 발표된 내용을 볼 때 단군릉 발굴 자체와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의 존재 여부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라면서, 단군 뼈라고 주장하는 인골의 측정 방법의 신뢰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북한 장우진 박사의 논문에 보면 단군의 나이를 골반뼈로 추정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골반뼈는 나이가 아니라 성별 추정용이다. 형질인류학의 대부인 장우진 같은 사람이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논문을 썼는지 모르겠다.”
“단군릉은 고구려 무덤 변조한 것”

최교수는 또 단군의 실존 여부를 정확히 가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군이 실재했는지를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단군은 한국의 잔다르크 같은 인물이다. 몽고 침입으로 나라가 어수선했던 고려 말이나 일제 침략기인 조선 말에 민족의 상징적인 인물로 단군의 존재가 부각되었다. 羅 喆의 대종교 출현도 그런 맥락이다. 대박산의 단군릉은 북한 학자들이 밝힌 것처럼 무덤 축조 방식이 고구려 시대 것이다. 결국 단군릉은 주인공을 잃어버린 고구려 무덤이 후대에 단군릉으로 변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장 趙由典 박사는 “북한도 50년대까지는 요동에 고조선의 수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느닷없이 바뀐 것이다. 지금은 평양설을 들고 나왔으니 결국 요동에서 평양으로 후퇴한 셈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는 또 “북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 학계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북한 학자들은 모든 것을 단군에만 맞추고 있다”라고 말한다.

李基東 교수(동국대·사학)는 단군조선 건국 연대인 기원전 2333년설도 엄격히 보면 근거가 희박하다고 주장한다. “<삼국유사>의 고조선조는 고조선 건국 시기를 중국의 堯와 동시대라고 했다. 중국은 지금 요 임금의 실재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국가가 처음 출현한 것은 기원전 1천6백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원전 24세기의 요임금에 의존했다가 동반 자살하는 꼴인데, 북한은 이보다 더 올려 잡고 있다.”

북한은 그 동안 단군신화를 원시 토템의 잔재로 받아들이면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63년에 나온 북한 학자 이지린의 <고조선 연구>에서도 단군신화는 깊숙이 건드리지 않았다. 80년대에 들어와 단군 신화를 토템의 잔재에서 조금 벗어난 것으로 재파악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단군신화 자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북한 “국가 법통은 고구려→발해→고려”

북한은 3국시대사 서술에서 주로 고구려사에 치중하고 있다. 신라에 의한 3국 통일을 국토 일부(남쪽)의 통합으로 규정함으로써 통일국가가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따라서 최초의 민족 통일은 고려에 의한 후삼국통일이라는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왕릉(개성시 개풍군) 증축 공사를 추진하고 개성 왕씨의 족보 등 수십 점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92년 5월에는 김일성이 직접 개성 지방의 현지 지도 과정에서 왕릉 증축 공사를 교시하기도 했다.

또한 북한은 발해와 고구려 유적 발굴 작업도 추진하고 있다. 93년 5월 연해주 일대에서 벌인 발해 유적 조사 작업과 동명왕릉 증축 공사도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입증하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일제 강압기의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임정 요인을 사대주의적 매국매족 행위자로 비방하는 것도 북한의 정치적 역사관의 특징이다. 결국 단군릉 발굴을 계기로 북한 정권은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법통과 정통성의 연장선상에 올라앉게 되는 셈이다. 이제는 고고학자·인류학자 외에 정치학자도 고조선 연구에 끼여들어야 할 상황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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