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 재벌’에 수갑 채울까
  • 李敎觀 기자 ()
  • 승인 1995.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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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한보·동방유량 등 사법 처리 여부로 좌불안석…정부, 선거 의식해 손익 저울질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가장 불안해 하는 곳은 재계이다. 당초 그가 비자금을 조성한 경위가 밝혀지지 않았던 상황에서 재계가 느낀 불안은 어느 정도 막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씨가 11월27일 대통령 재임 때 약 5천억원을 비자금으로 조성했다고 사과 성명을 발표하면서 그러한 불안은 공포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 비자금은 기업인들로부터 ‘성금’을 받아서 조성했다고 그가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재계의 불안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노씨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한 재벌 총수들이 법적으로 처벌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노씨 비자금 사건을 계기로 김영삼 정부가 재벌 규제를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간 정부는 재벌 정책이 사실상 실종되었다는 비판을 들을 만큼 재벌에 유화 정책을 펴왔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가 재벌의 소유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재계는 불안해 하고 있다.

물론 재계가 느끼는 첫 번째 불안이 현실화하려면 어느 기업이 얼마를 정치 자금으로 노씨에게 제공했는지 구체적인 내역이 밝혀져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노씨는 사과 성명에서 자신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한 기업인들이 처벌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어느 기업에서 얼마를 받았는지 밝히지 않았다. 때문에 검찰이 노씨의 비자금 조성 내역을 실증적으로 밝혀내기 전에는 정치 자금을 제공한 기업인들을 처벌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검찰도 일단 노씨의 비자금이 숨어 있는 은행 계좌를 추적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면서, 정치 자금을 제공한 기업인들에 대한 수사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검찰이 노씨의 비자금 계좌를 완전히 밝혀낸다 하더라도 어느 기업이 얼마를 제공했는지 알아낸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럴 경우 정부가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재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재계는 어쨌든 정부가 노씨의 비자금과 관련된 기업인들을 그대로 놓아두고 이번 사건을 마무리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 근거는 두 가지이다. 우선 이미 이형구 전 산업은행장과 안병화 전 한전 사장의 수뢰 사건에 연루된 기업인들이 실형을 선고 받은 데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다. 그보다 규모가 엄청나게 큰 이번 사건과 관련된 기업인들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은 법의 형평성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결의 단호” “선거에 불리” 엇갈린 전망

또 하나는 정부보다는 집권 여당의 입장 때문이다. 즉, 민자당이 노씨 비자금 사건을, 지난 6·27 지방 선거 패배를 기점으로 악화하고 있는 여론을 되돌릴 호기로 판단할 가능성이 많다고 재계는 보고 있다. 때문에 정부로서는 노씨에게 정치 자금을 건넨 기업들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6공 시절 정치 자금을 제공하고 특혜를 받았을 가능성이 많은 기업들 중 몇몇을 골라 희생양을 만들지도 모른다고 재계는 우려하고 있다.

사실 6공 당시 재벌들은 돈세탁 과정을 거친 정치 자금을 청와대에 제공한 것으로 검찰 수사에서 드러나고 있다. 청와대도 마찬가지로 제공 받은 정치 자금을 은행에 예치하면서 또 한번 돈세탁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노씨에게는 어느 기업에게서 얼마를 받았는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가 없을 수도 있다. 때문에 검찰은 돈세탁 과정을 거친 노씨의 비자금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를 알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정치 자금을 제공한 기업이 밝혀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부는 6공으로부터 특혜를 받았을 가능성이 많은 기업에 대해 집중 수사를 펼지도 모른다고 재계는 보고 있다. 이같은 예상은, 이번 사건에서 문민 정부의 완전한 도덕성을 보여주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말에 기초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검찰은 이미 노씨 비자금 계좌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한보그룹을 비롯한 몇몇 대기업이 관련되었음을 밝혀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노씨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서 사법 처리를 당할까 봐 불안해 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선경그룹·동방유량·한보그룹을 들 수 있다. 특히 동방유량과 마찬가지로 노씨와 사돈 관계인 선경그룹의 경우는 노씨의 비자금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원길 의원(새정치국민회의)은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이 91년 태평양증권을 인수할 때 동원한 자금이 노씨가 조성한 비자금의 일부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선경과 동방유량이 노씨 비자금을 실명 전환하는 데 관여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한보는 이미 깊숙이 개입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11월30일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금융실명제 실시 직후인 93년 9월 동화은행 가명계좌 2개에 예치된 3백억원 이상의 노씨 비자금이 한보그룹 계열인 한보상사 명의로 실명 전환된 것이 드러났다. 때문에 한보 정태수 회장의 사법 처리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그렇지만 재계의 우려와 달리 정부가 노씨 비자금 관련 기업인들을 처벌할 가능성이 없다는 분석도 있다. 그 까닭은, 노씨에게 수백억원을 웃도는 정치 자금을 제공한 기업을 처벌할 경우 그 처벌 사유가 탈세에 해당해 기업이 도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기업이 대기업일 경우 도산은 곧바로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 이것이 내년 총선과 그 이듬해 대선 전략에 오히려 역행하는 것이 된다는 점을 집권 여당이 모를 리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노씨 비자금 사건 처리 과정에서 관련 기업인에 대한 사법 처리 여부는 집권 여당의 총선·대선 전략을 고려해 판단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민자당이 총선과 대선을 대비해 재벌을 중심으로 한 기업들을 우군으로 끌어안기 위해서는 노씨 비자금 관련 기업인들을 사법 처리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제1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마저 총선 전략으로 대기업을 위한 정책을 강조하는 마당에 더욱 그럴 개연성이 많다고 볼 수 있다.

현 정권이나 야당이 총선을 대비해 기업들을 끌어안고자 하는 까닭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기업을 비롯한 민간 부문이 지난 몇십 년간 엄청나게 성장해 왔다는 점이다. 결국 각 정파가 기업인들과 봉급 생활자들을 끌어안을 수 있느냐 여부가 선거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관건인 것이다. 그리고 전투로 비유되는 선거에서 이기려면 이른바 총알이라 할 수 있는 선거 자금을 여전히 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들 수 있다.

더군다나 기업들이 도산하면 일반 시민들의 가계가 나쁜 영향을 받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 점에서 정부와 집권 여당이 과연 노씨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기업인들을 사법 처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은 것이다. 만약 그와 같은 사태를 각오하고서라도 정치 자금을 제공한 기업인들에 대한 사법 처리를 강행한다면 그것은 곧 총선과 대선에서 집권 여당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금 제공­특혜’ 고리 끊는 장치 마련할 듯

재벌의 소유 구조 개편 문제 또한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많다.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재벌 정책의 핵심은 바로 창업자나 그 일가에 집중된 소유 구조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대 어느 정권도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정경 유착 고리가 질겼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을 통해 유권자들을 계속해서 끌어안기 위해서는 재벌들을 건드릴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점에서 현 정권도 어쩔 수 없을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했다.

다만 정부는 재벌들이 정치 자금 제공을 통해 각종 대규모 국책 사업에서 특혜를 받는 것을 막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 노씨 비자금 사건을 마무리할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전망된다. 바로 이 점에서 재계는 역설적으로 이번 사건을 환영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삼성그룹이 노씨의 사과 성명 발표에 대해 ‘이번 사건은 여러 모로 국가 발전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고 논평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결국 재계의 우려처럼 막대한 정치 자금을 제공하고 6공 시절에 발주된 대형 사업들에서 특혜를 받은 몇몇 기업들이 본보기로 사법 처리될 가능성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6공 당시 청와대에 정치 자금을 상시 제공했다는 30대 재벌을 일괄적으로 사법 처리할 가능성은 집권 여당의 총선 및 대선 전략상 희박하다. 같은 맥락에서, 세계화추진위원회가 구상하고 있는 재벌의 소유 구조 개편 또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추진될 가능성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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