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분야] 비틀린 민족주의’ 경향 뚜렷
  • 李文宰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5.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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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서적 강세·세계적 예술인에 응답 집중… 피해 의식·우월주의 반영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과 ‘핵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번 조사에서 우리나라 국민에게 가장 영향을 크게 미치는 문화예술인과, 우리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꼽은 결과다. 이 두 조사 결과는 현재 우리 사회 ‘집단 무의식’의 한 켜를 드러내고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문화·예술·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 가운데 우리나라 국민에게 가장 영향을 크게 미친 인물을 3명만 말씀해 주십시오’라는 설문에 대한 응답 결과는 정명훈 최불암 백남준 조수미 김혜자 김건모 이문열 임권택 순이었다. 상위 5위 가운데 1, 3, 4 위가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예술가들이다. 이 가운데 백남준·조수미 씨는 지난해 조사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다.

정명훈씨는 89년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 감독 및 상임 지휘자를 맡으면서 국내는 물론 세계 음악계의 마에스트로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지난해 9월 오페라단측과 불화가 발생해 세계 음악 팬들은 물론 국내 팬들에게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정씨는 법정 소송에서 승소하고 지난 9월 성공적인 고별 무대를 마친 뒤 명예롭게 퇴진하여 국내외에서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 백남준씨는, 광주 비엔날레와 그 직전에 있었던 개인전(‘95 백남준 예술-소통전’)과 같은, 집중적인 국내 전시 활동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을 빛내는 세계적 예술가들이 음악 분야에 치중해 있는 현실에서 백씨의 위치는 도드라진다. 그러나 그의 예술 세계에 대한 국내의 이해는 아직 부족한 편이다(<시사저널> 제312호 인터뷰 참조).

세계 5대 오페라극장 프리마 돈나를 맡아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성악가 조수미씨는 93년 내한 공연 이후 고국 팬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카라얀이 ‘신이 내린 목소리’라고 평가한 것처럼 그의 고음은 독보적이다. 특히 지난해 국내 순회 공연 실황을 음반으로 만들어 클래식 음반으로서는 처음으로 서태지와아이들·김건모에 이어 음반 판매 3위를 기록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인류 공영 향한 ‘건강한 민족주의’라야

한편 최근 5년간 발간된 책 중에서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선정된 책들에서는 이른바 ‘민족주의 열풍’이 발견된다. 1위로 뽑힌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3위 <아리랑> 4위 <토지> 5위 <일본은 없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마다 일본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소설 분야가 강세를 보인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특히 <무궁화꽃…>과 <일본은 없다>는 일본과 ‘정면 대결’을 벌인다(<시사저널> 제288호 <비틀린 민족주의, 일본 죽이기> 참조).

<무궁화꽃…>은 또한 교육자(36.8%)와 사회단체(29.6%)로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응답률을 보이고 있어서 주목된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민족주의를 ‘비틀린 민족주의’라고 우려한다. 일본에 대한 피해 의식과 보상 심리, 비과학적인 우월주의 따위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가 지향하는 바는, 그 민족주의가 비판해온 제국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예술가들. 그들이 한국인라는 사실은 자랑스럽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같은 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열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열광은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아직 검증이 덜 된 자의식과 연관되는 것은 아닐까. 정명훈과 ‘핵 소설’은 그래서 의미 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세방화(세계화와 지방화의 합성어)는 이 대목에서 새삼 되씹어 보아야 한다. 건강한 민족주의가 확립되지 않는 한 인류 공영을 위한 세계화는 불가능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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