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현대 독주 막을 자 없다
  • 郭晩淳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金芳熙 기자 ()
  • 승인 1996.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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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재벌 판도/다른 그룹과 격차 엄청날 듯 현대는 업종 구성, 삼성은 자금 부문 ‘강세’
30대 재벌이라는 말을 버릇처럼 내뱉으면서, 우리는 두 가지 선입견을 드러낸다. 우선 이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비슷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어느 정도 타당할 뿐이다. 일단 기업을 비교하는 데 흔히 쓰는 규모와 업종에서 큰 차이가 있다. 5대 그룹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쌍용·한화 그룹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그룹은 아무렇게나 다각화돼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전문 업종을 갖고 있다.

이들의 규모에 대한 우리의 생각 역시 지난 10여 년 전 상황에 머물러 있다. 그동안 30대 그룹 간에 벌어진 격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5대 그룹의 규모는 다른 그룹과 격차가 크게 벌어졌고, 이들 가운데서도 현대와 삼성 그룹의 성장 유형은 다른 그룹과 큰 차이를 보여왔다. 대부분의 그룹 매출액은 현대와 삼성 그룹의 대표적인 한 계열사 매출액에 훨씬 못미친다.

이 두 그룹과 30위권 그룹을 비교하는 것은 백화점과 구멍가게를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짓 같아 보인다. 현대는 삼성과, 30위 그룹은 31위 그룹과 비교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또 하나 30대 재벌의 면면이 크게 바뀌지 않은 것처럼 느끼는 것도 잘못이다. 매출액 기준으로 65년 30대 그룹에 속했던 기업들 가운데 90년대에도 30대 그룹에 포함된 기업은 단 한 군데도 없다. 30대 그룹이라는 분류는 행정편의주의의 소산일 따름이다. 공정거래위원회를 비롯한 행정기관이 규제 대상으로 규정한 ‘30대 기업집단’을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 또한 높다. 이들은 또한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 경제의 가장 역동적인 부분이다. 따라서 앞으로 매 시기 두각을 나타낼 소수의 기업이 어디가 될 것인지를 따져보는 것은 30대 그룹이 어떻게 되어 나갈 것인지 만큼이나 흥미롭다.
무조건 몸집 키우기 시대 마감

과거 10여 년간 높은 성장을 기록하는 대신 이윤을 희생해야 했던 기업들은, 93년 이후 사상 유례 없는 수익성을 기록하고 있다. 기업들은 이제 비로소 무조건 몸집을 부풀리는 성장의 시대, 두자리 수 성장의 시대를 마감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들에게 이 시기는 단순한 호시절은 아니다. 재벌 판도가 뒤바뀌는 결정적 시기다.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일 여건이 마련됐고, 이 일의 성패에 따라 각 그룹의 부침이 결정된다. 더 이상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 안팎의 경쟁 또한 거세진다. 21세기로 가는 길목은 모든 기업이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기회와 위험의 시기인 것이다.

각 기업에게 왜 이 시기가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우선 그동안 한계가 드러난 각 그룹의 주력 업종을 대신할 새로운 유망 업종을 찾아 떠나야 할 때다. 대부분의 그룹에서 2, 3세 경영인들이 등장한 것도 변화를 재촉하는 중요한 요인이다(34~35쪽 딸린 기사 참조). 각 그룹이 2, 3세에게 경영권을 승계한 이후 이른바 ‘공격 경영’을 경영 전략의 한 축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이런 판단의 다른 표현이다.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재벌 판도가 어떻게 바뀔지 미리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그들의 30년 뒤를 상상한다면 마치 앞일을 <토정비결>에 맡겨버리는 것만큼이나 허황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의 운명을 좌우할 앞으로의 5년 정도라면, 예측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재벌들의 진로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은 점쟁이와 달리 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안다는 점이다.

지금 각 그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과거 어느 한순간 자금이 중요하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지금처럼 중요한 적도 흔치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상위 재벌이 대부분 참여하고 있는 장치산업과 같은 주력 업종의 벌이가 영 시원찮다. 규제가 완화되고 국내 시장이 개방되면서 독과점 구조가 깨져 이윤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돈이 되는 유망한 업종에 들어가야 하는데, 전처럼 쉽게 밖에서 돈을 빌릴 수가 없다. 결국 그룹 내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야말로 지금 각 재벌 그룹에서 핵심적인 돈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5대 재벌 중에서도 삼성그룹이 가장 유리한 상황이다. 삼성전자의 내부 이윤이 급격히 증가하는 데다가 오래 전부터 금융업에 진출해 자금 동원 능력이 가장 앞서기 때문이다. LG와 현대 그룹도 최근 수익률이 높아 신규 업종 진입에 유리한 상황이다. 반면 대우나 선경은 그룹 안에 뚜렷한 ‘돈줄(cash cow)’이 없어 고통스러울 전망이다.
다음은 어느 그룹이 유망한 업종에 발을 많이 걸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현재의 업종 구성도는 앞날의 판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현대·삼성·LG·대우 등 상위 4대 그룹은 상당히 다각화돼 있고, 전기·전자, 건설, 석유화학, 무역 등 대부분 업종에서 경쟁 관계에 있다.

현대그룹은 기술 파급 효과가 큰 중공업 분야를 축으로 해 성장해온 만큼, 업종 구성에서 가장 앞서고 있다. 신임 정몽구 회장은 중공업의 기반이 되는 제철산업 외에도 삼성의 업종 구성에 비해 다소 취약한 금융과 항공 산업 진출을 선언했다. 이밖에도 유통과 정보통신 부문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느냐 여부가 형제간 그룹 분할과 함께 앞으로 5년간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삼성은 현대에 비해 업종 구성에서 약간 처져 있는 상황이다. 금융업을 제외할 경우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의 매출액 비중이 65%에 이르는 반면 중공업을 비롯한 다른 업종에서는 선두 기업을 키워내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산업의 호황이 계속되는 동안 자동차·항공 산업이 얼마나 뿌리를 내릴 수 있느냐가 현대와 벌일 몸집 경쟁의 최대 승부처다.

LG그룹은 선대 구자경 회장이 그동안 공격적인 다각화 전략을 자제함에 따라 기술이나 시장 측면에서 주력 업종과 비슷한 업종 진출에 주력해 왔다. 멀티 미디어 산업, 유통 부문, 그리고 유전공학 분야도 새로운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으나 아직 결실을 기대하기는 이르다. 그룹 전체를 지탱할 기업이나 업종이 부족한 것이 흠이다.

대우그룹은 구성 면에서는 현대와 유사해 흠 잡을 데가 없으나 각 업종에서 선두 기업을 확보하지 못해 지난 10여 년간 유망한 산업에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5대 그룹 가운데 선경그룹은 섬유겮????업종에 전문화가 되어 있고, 정보통신 부문으로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을 뿐이다. 높은 이윤을 올리는 기업을 얼마나 갖고 있으며 또 업종 구성이 얼마나 좋으냐 하는 점을 놓고 볼 때, 앞으로도 당분간 현대겭竊?그룹과 다른 상위 그룹 간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현대와 삼성이 다른 그룹에 비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구조 조정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돈을 벌어들이던 주력 기업이 쇠퇴하면, 새로운 유망 기업이 떠올라 공백을 메워 주었다. 현대그룹의 경우 현대자동차써비스·현대정공·현대전자 등이 70년대의 주력 기업인 현대건설·현대중공업을 대신했으며, 삼성에서는 삼성전자·삼성전관·삼성중공업 등이 과거 주력 업체인 제일제당·제일모직·제일합섬의 쇠퇴를 보충해 주었다. 80년께 매출액 5조원 미만으로 엇비슷했던 5대 재벌 가운데 삼성·현대는 현재 다른 세 그룹 매출액의 두세 배를 기록하게 됐다.

금융업 분야 매출액을 포함시키느냐에 따라 1, 2위 자리가 엎치락뒤치락하는 현대와 삼성 그룹의 경쟁은 점입가경이다. 현재 자금 동원 능력에서는 삼성이 앞서나 업종 구성도에서는 현대가 낫다. 장기적으로는 전자산업, 그 가운데서도 반도체산업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삼성그룹이 현대그룹보다는 불리한 처지이다.
준재벌 급성장… 보수적 그룹은 몰락

5대 재벌을 제외한 그룹들은 대부분 2∼3개 업종으로 전문화돼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건설·섬유·철강 산업처럼 최근 들어 이윤율이 크게 떨어진 업종을 중심으로 성장해와 사업구조 조정(restructuring)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 그룹 간의 승부는 누가 어떤 방식을 통해 유망한 산업으로 진입할 것이냐에 달려 있다.

금융업·통신업·유통업처럼 규제자로서의 정부 역할이 서서히 감소하고 있는 분야나 멀티 미디어 분야처럼 아예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시장을 선점하느냐 하는 경쟁이 볼 만할 것 같다. 문제는 모든 그룹이 거의 비슷한 분야에 뛰어들 각오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고려할 수 있는 대안은 그리 많지 않은데, 한계 업종이나 정체 업종을 과감히 처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니면 선진국의 선도 기업들과 합작이나 공동 기술 개발 형태로 전략적 제휴를 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돈이 없으면 어떻게든 만들어내야 하고, 혼자 투자하기가 두렵다면 앞선 기업을 끌어들이려는 개방적인 경영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데 하위 재벌일수록 소유권과 경영권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과감히 사업을 정리하거나 외국 기업을 끌어들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신흥 준재벌의 성장과 함께 일부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재벌 그룹의 몰락은 금세기 말 좋은 얘깃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제일제당이 영상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미국의 드림워크사에 엄청난 자본을 투자한 것은 개방적인 경영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핵심적인 경영 자원 확보나 업종 구조 같은 것이 하드웨어라면, 경영 체제나 조직 개편 문제는 소프트웨어이다. 이 분야에서도 재벌 그룹들은 우위를 놓고 다투게 될 것이다. 이들이 직면하게 될 가장 큰 문제는 첨단 업종에 필요한 두뇌가 절대 부족하다는 점이다. 서구적이고 합리적인 경영 관리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2, 3세 경영인들은 더 극적인 처방을 강구할지도 모른다.

대만에서는 이런 싹이 이미 움트고 있다. 대만의 반도체 업체인 타이완반도체사는 창업주인 모리스 창이 반도체 분야 전문가인 미국인 도널드 브룩스를 사장으로 영입했다. 최대 반도체 시장인 미국의 중요성을 감안한 조처이다. 도널드 브룩스 사장은 필립스사와 합작해 사업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기업들은 일부 해외 현지 법인이나 해외 연구개발센터 소장을 현지인으로 채용하는 정도이나, 머지 않아 이들을 대상으로 스카우트 경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높다.

전문 경영인의 권한이 확대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과거 창업주들은 스스로 새로운 업종을 개척했기 때문에 소유주이면서 동시에 전문 경영인 노릇을 해냈다. 2, 3세 경영자들은 그룹 차원의 핵심적인 판단 외에는 할 수도 없고, 하려 들지도 않는다. 만일 이들이 전문 경영인을 불신해 이들의 열정이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사장해 버린다면 회사는 가망이 없다. 어떻게 하면 전문 경영인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이들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나 하는 점이 앞으로 재벌들 간의 대격돌에서는 대단히 중요해진다.
30대 그룹 중 얼마나 살아남을까

90년대 들어 각 그룹이 채택한 조직 개편의 성과가 어떻게 나타나느냐도 관건이다. 각 그룹이 취한 조직 개편의 방향은 그룹내 일부 사업 부문이나 기능을 전략적으로 독립시켜 주는 방향이었다. 계열사끼리 내부 거래를 통해 몸집을 키우고 자본을 연결해 총수의 지배권을 확보하던 그룹식 경영의 이점이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다. 점차 정보나 핵심 기술, 기획이나 전략 수립 기능만 서로 공유할 수 있으면 되는 조직 형태로 재벌 그룹들은 변해가고 있다.

최근 팀제가 급속하게 보급되는 것은, 이 조직이 전략 독립 경영체제에 가장 적합하다고 기업들이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팀제는 현행 6∼7단계의 결재 라인을 3∼4개로 축소시켜 의사 결정을 신속하게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경우 경영진의 역할은 여러 팀을 관리하고 이들 간에 원활하게 의견을 조정하고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해주는 정도에 머무르게 된다.

현재의 경향처럼 팀의 규모 자체가 커지기 시작하면 팀은 하나의 독립적인 회사가 된다. 이렇게 회사를 분사화(分社化)하게 되면, 각 사업 부문을 평가하기도 쉽고 해당 부문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정리하기도 쉬워진다. 일본 전자산업의 대표 주자 격인 NEC와 SONY 사의 이런 조직은 첨단 업종을 쫓아 사업 구조를 바꾸는 여러 나라 기업들에 곧 광범위하게 보급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대만의 최대 컴퓨터 제조업체인 에이서사는 스탠 쉬 회장의 결정으로 단일 기업을 21개 독립 기업으로 쪼갰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분사화 전략에 대한 유인과 통합에 대한 유인이 같이 존재한다. 일단 여러 부문의 사업이 합쳐지면, 돈을 벌어들이는 부문이 그보다 좀 못하지만 장기적으로 유망한 부문에 투자를 뒷받침해 주기가 쉽다. 현재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반도체산업이 큰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가전이나 컴퓨터 제조, 통신 부문과 결합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 모두를 한 회사 안에 두면 자금 여력을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 기업들은 세계적인 추세에 역행하면서까지 계열사를 통합하려 해왔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유망한 업종이 아니라 단지 포기하기 아까운 업종을 먹여살리기 위해 통합하는 방식은 곧 문제점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분사화 전략의 대표적인 예로는 기아자동차가 생산과 판매 기능을 분리하고, 전국의 판매망을 10개의 독립 판매법인으로 분할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을 꼽을 수 있다.

21세기까지는 우리나라 재벌 그룹들의 모습이 안팎으로 크게 변하게 될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볼 수 있는 거대 다국적 기업의 초기 형태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숫자는 이 위기의 시대를 슬기롭게 견뎌낸, 30대 그룹 가운데 극히 소수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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