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혈3대의 수난 반세기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5.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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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나라’는 냉담, ‘아버지 나라’는 외면…미국 정부는 시민권 주어야
미국이 자국산 농축산물 수출과 관련해 한국을 불공정 무역 대상국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키로 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 지난 4월13일,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ㄷ나이트클럽에서는 난데없이 이 문제로 소동이 벌어졌다. 무대 위에서 한창 팝송을 열창하던 흑인계 혼혈인 가수 박운선씨(45)에게 좌석에 앉아 있던 취객이 덤벼든 것이다. 그는 박씨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며 “야, 이 미국놈아, 너희 나라로 썩 꺼져!”라고 외쳤다.

박씨는 “나는 한국 사람이오”라고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일행인 듯한 손님들이 일제히 백원짜리 동전을 던지며 “이런 데서까지 돈 긁어 가려고 한국말은 되게 잘 배웠네. 이 돈 주워 가지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가세했다. 삽시간에 수라장이 된 무대 위에서 박씨는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대기실로 쫓겨났다.

박씨는 한국인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 지난 45년간 ‘국적 없는 한국인’으로 살아오고 있다. 이 날 소동은 기가 막히고 억울할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분노도 치밀지 않는다. 한·미 간에 마찰이 생길 때면 늘 그런 봉변을 당해 왔던 탓에 이내 체념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통상 마찰로 여론이 안 좋을 때는 평소 친하게 지내는 동네 사람들마저 저를 보는 눈길이 싸늘해져 미칠 지경입니다.”

이럴 때면 그는 자신을 때리고 욕하는 한국인보다 무책임하게 낳아두고 이렇게 방치해온 미군 출신 부친과 ‘아버지 나라’ 미국에 원망과 증오심이 생긴다.

박씨의 출생 배경은 현재 겪고 있는 험난한 인생살이만큼 기구하다. 대구가 고향인 박씨는 3남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기를 제외한 세 남매는 모두 한국 혈통이다. “6·25때 아버지는 제 형님과 어머니, 할머니를 남기고 군에 들어갔어요. 어머니가 세탁소 일을 거들면서 생계를 이어가다가 왜관에 주둔하던 한 흑인 병사에게 강간당해 제가 태어났던 겁니다. 군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기가 막혔겠지만 모든 걸 업보로 여기고 저를 곱게 길러 주셨지요.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와 저를 끝내 버리지 않고 포용해준 한국인 할머니, 아버지, 집안 어른들은 모두 천사나 다름 없었습니다.”

주위의 눈총과 손가락질이 심했지만 가족의 인내와 배려로 박씨는 차츰 검은 피부에 곱슬머리를 가진 소년으로 구김살 없이 자랐다. 박씨의 유년 시절에는 대구 파티마병원장이던 미국인 수녀가 기회 있을 때마다 집에 찾아와 어른들에게 그를 해외에 입양시키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박씨는 그때마다 어머니와 가족의 품에서 떨어지기 싫어 도망쳤다가 수녀가 돌아가면 들어갔다. 어른들도 어린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입양을 포기하고 조심스럽게 키웠다.

“깜둥이 받아주는 직장은 없더라”

그러다가 그는 열네 살 때 가족의 품을 떠나 당시 펄벅재단이 혼혈아를 교육하던 경기도 부평 ‘명성원’으로 유학했다. 이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박씨는 취직을 하려고 했으나 ‘깜둥이’라며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2년 동안 취직하기 위해 안 가본 데 없이 뛰어다녔지만 결국 포기하고 밤무대에 서서 오늘까지 살아 왔습니다.” 그는 밤무대에서 만난 혼혈인 여성과 결혼해 21년째 살고 있는데 두 남매를 두고 있다.
박씨는 자기가 비뚤어진 길로 나가지 않도록 키워준 한국인 부모님과 이복 형제들에게 늘 감사하며 살고 있지만, 자녀들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게 하고 싶은 심정이다. 45년간 한국인으로 살면서 혼혈인에 대한 차별과 손가락질이 이렇게 심한 나라는 세계에 다시 없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의 절규는 끝내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나라로 향한다. “세계 곳곳의 전쟁 터지는 데마다 미국 정부는 군대를 보낸다. 그 다음에 생기는 결과는 혼혈아이다.”

한국 사회에서 혼혈인이 처한 일반적인 상황을 놓고 볼 때 박씨의 경우는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밤무대나 체육계로 진출해 ‘유명 인사’가 된 혼혈인은 극히 일부분이다. 대다수 혼혈인은 사회의 냉대로 극한 상황에 내몰린 채 숨어 살듯 지내고 있다. 전통적으로 단일 민족이자 인종의 순수성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혼혈인이 설 땅은 없는 것이다.

한국은 긴 역사를 통해 수많은 외적의 침략을 경험했으므로 많은 혼혈인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없다. 또 일제 시대 일본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노코(間の子)’라고 불리던 혼혈인이 태어났다. 하지만 이들은 같은 동양인이어서 외모가 구분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한국인으로 동화되었다고 알려진다.

“딸아이는 온몸을 밀가루로 분칠”
현재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혼혈인 문제는 광복 후 미군과 군정청 관리들이 진주하면서부터 생겨났다. 외모와 피부 색깔이 전혀 달라 한눈에 구별이 가능한 혼혈인이 양산되었던 것이다. 그 뒤 6·25 전쟁으로 한국 땅을 밟는 미군이 늘어나고, 휴전 후 미군기지 주변에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혼혈인은 급속히 증가했다. 90년대 들어서만도 미군과 국제 결혼하는 한국 여성이 연간 2천여 명에 이른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새로운 혼혈인 양산은 멈출 기미가 없다.

상황이 이런데도 그동안 국내에서 태어난 혼혈인의 총 숫자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단 한 번도 이들에 대한 공식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혈인 관련 단체나 지원 단체들의 추산에 따르면 3만~7만명 사이를 오르내린다는 것이 정설이다.

혼혈인들의 친목 단체인 한국혼혈인협회(회장 박근식·45·백인계)는 “73년 협회가 출범하면서 전국을 뛰어다니며 혼혈인 조사를 벌였는데 1만8천명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사가 미치지 못했거나 신분을 숨긴 경우, 또 그후 태어난 혼혈아 등을 고려하면 현재는 4만명쯤 될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여기에 태어나자마자 입양간 혼혈아까지 합치면 5만~6만명 선에 이르리라는 것이 협회의 추산이다.

물론 이들이 모두 한국에 살고 있지는 않다. 82년 10월 레이건 정부가 제정한 ‘혼혈인 이민법(Amerasian Immigration Law)’에 따라 상당수가 미국으로 떠났다. 일찍이 미국으로 입양간 혼혈인들까지 합치면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계 혼혈인 숫자는 3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것이 혼혈인들의 추정이다. 따라서 현재 국내에 살고 있는 미국계 혼혈인은 2만명 안팎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일단 혼혈인으로 태어나면 그들에게 가로놓인 운명은 가혹하기 짝이 없다. 우선 눈에 띄는 외모와 피부색은 어린 시절부터 놀림과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경기도 송탄에 있는 K-55 미국 공군기지 정문에서 미군을 상대로 가죽 점퍼 행상을 하고 있는 흑인계 혼혈인 이성일씨(가명·42)는 혼혈인으로서 자신이 받은 숙명적 고통을 아이들에게 대물림하고 있다는 생각에 요즘 밤잠을 설친다.

“어릴 때 국민학교 동급생들이 ‘튀기’라고 멸시하고 끼워주지 않는 통에 점심도 멀찌감치 떨어져 혼자 먹고 외톨이로 지냈어요. 중학교에 가서는 놀리는 친구를 죽도록 패주고 퇴학 당한 뒤 소년원을 드나들게 됐지요. 그 뒤 목사님의 도움으로 마음 잡고 행상을 하며 지내다 한국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남매를 낳아 기르는데, 첫애는 6학년이고 딸아이는 3학년입니다. 그런데 요즘 또 이 애들이 놀림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는 거예요.”

6학년짜리 아들이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와 ‘아빠 아이노코가 뭐예요’라고 묻더라는 것이다. 이씨는 아들에게 “너는 비록 할아버지가 미국 사람이었지만 누가 뭐래도 한국인이므로 떳떳이 말하고 놀림을 무시해 버려라”고 달랬다.

그러나 아이는 놀림이 계속되자 아빠에게 ‘미국에 들어가지 않으면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조른다고 한다. 게다가 4학년짜리 딸아이는 집에만 왔다 하면 온몸에 밀가루로 분칠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씨는 자기가 입은 상처를 아이들이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음을 알고 밤잠을 설친다고 한다. 그는 이민을 가고 싶어도 전과 기록이 있어서 미국 정부로부터 일찌감치 그 대상에서 제외된 상태이다.

그러나 정작 혼혈인이라는 ‘낙인’이 안겨주는 주변의 따가운 눈길과 놀림은 이들이 성장하면서 겪을 다음 단계의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혼혈인들에게는 생계 유지를 위한 사회적 기회 자체가 거의 봉쇄되다시피 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공무원으로 취직한 횬혈인 단 1명도 없어

한국혼혈인협회 박회장은 혼혈인들의 취업 실태를 이렇게 말한다. “혼혈인 중에서 지금까지 공무원으로 취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대학을 나오고 능력이 있어도 혼혈인은 면접에서 탈락합니다. 그러다 보니 가장 선망하여 진출하는 곳이 혼혈인의 체력적 장점을 살린 스포츠 계통이나 연예계입니다. 그것도 전부 합쳐야 백명 안팎이고, 나머지는 막노동과 미군 클럽 웨이터, 기지촌 주변 행상으로 살아가고 있지요.”

물론 이들에게 취업을 위한 기술교육 등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정부는 78년 수원에 ‘혼혈인 기술교육센터’를 설립해 3년 동안 약 3백명에게 기능공 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기업들이 이들을 한 명도 채용하지 않아 사실상 헛수고에 그치고 말았다.
취업만이 문제가 아니다. 결혼은 이들에게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일만큼 어려운 일에 비유된다. 엄청난 상처를 안고 결혼에 실패한 뒤 동두천 미군부대 앞에서 기지촌 여성으로 어머니의 길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는 강주아씨(27)의 사연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엄마는 충청도가 친정인데 지독히 가난한 집안에서 7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일찍 외할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동생들 생계와 교육을 떠맡고 미군부대 앞으로 찾아온 겁니다. 그러다 아빠와 만나 저를 낳았는데, 아빠가 귀국해 버리니까 처음에는 저를 입양 보내려 했답니다. 그때는 대개 딸을 낳으면 입양을 보냈다고 해요. 엄마가 저를 계속 키운 것은 다른 혼혈아들과 비교해 볼 때 제가 몸매도 좋고 얼굴도 나은 편이라, 엄마 같은 일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으리라고 믿은 것이지요. 어릴 때부터 엄마는 항상 입버릇처럼 ‘이왕 혼혈아로 태어났으니까 한국에서 유명한 무용수가 되라’고 말씀하셨어요.”

강씨는 중학교를 마친 후 서울로 올라와 밤무대 무용수로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이해해 주는 한국인 남자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시댁의 반대로 식도 올리지 못한 채 우선 동거 생활부터 시작했다. “불안했지만 그때까지 남편은 아이를 낳아 데리고 들어가면 부모님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달랬어요. 적어도 2세가 나 같은 놀림은 받지 않게 해야 한다는 욕심도 커서 기어이 한국 남자와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었지요.”

결혼은 올려다보지 못할 나무
92년에 강씨는 아들을 순산했다. 그러나 그것은 파경의 서곡이 되고 말았다. 시부모가 다짜고짜 아이를 데려다 해외에 입양시키고, 남편을 데려가 버린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남편도 마음이 돌아섰는지 발길을 끊었다. 빼앗긴 아이 이름을 부르며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그에게는 엄마가 걸었던 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혼혈인으로서 한국인과 결혼하려 했던 제가 바보라는 것을 뒤늦게야 깨닫고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어요. 저는 역시 미국인과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부대 근처에 다시 오게 된 거예요.”

얼마 전 강씨는 미군 병사를 만나 국제 결혼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이런 생활이 적어도 엄마처럼 서럽지는 않다고 말한다. 7남매의 맏이로 기지촌 생활을 하여 동생들을 키운 엄마이지만, 그가 어릴 적에 엄마 손을 잡고 외가에 들를 때마다 겪었던 수모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은 집안 망신이라며 튀기 데리고는 친정 문턱도 넘지 말라고 쫓아냈던 기억을 잊을 수 없어요. 저는 엄마처럼 그런 문제로 속상해 할 친정이 없어 다행이지요.”

강씨는 젊은 혼혈 여성들 중에 자신처럼 결혼할 길을 찾아 기지촌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제 결혼을 한다고 해서 이들의 결혼 생활이 끝까지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미군들이 혼자만 귀국한 후 본국에서 이혼 수속을 밟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기지촌 여성의 대물림과 혼혈인의 비참한 인생살이가 악순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같은 혼혈인끼리 결혼해 사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한국 혼혈인의 성비가 8 대 2(추정치) 정도로 남자가 월등히 많기 때문에 대개 혼혈인끼리의 결혼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사정으로 25세 이상 성인 혼혈인 중 결혼한 사람은 30%밖에 안된다는 것이 펄벅재단의 추계이다.

외모와 피부색 때문에 사실상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취급을 받는 혼혈인들이지만, 그들이 한국 땅에서 모질고도 질긴 생명의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된장과 김치 맛을 벗어나 사는 법을 모르며, 말도 한국말밖에 할 줄 모른다. 그 정도라면 냉대를 피해 미국으로 떠날 법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인 혼혈인들을 이 땅에 붙들어매고 있는 커다란 요소는 바로 그들의 늙은 ‘한국인 어머니’ 때문이다.

미국 정부, 필리핀 혼혈인에겐 ‘특별대우’

미국 이민이 가능한 혼혈인 가운데 한국에 남은 사람은 홀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인 경우가 많다. 인천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김진주씨(여·25)는 “제 나이를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미국으로 떠나 결혼 상대를 만나고 싶지만, 저만 바라보고 사시는 병든 엄마를 생각하면 도저히 떠날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80년대 미국 이민 바람이 불 때 늙은 홀어머니를 놔두고 혼자 떠난 일부 혼혈인들에 대해 국내에 남은 혼혈인들이 ‘배신자’라는 비난을 퍼붓고 있다는 것이 한국혼혈인협회 박회장의 설명이다.

그렇다고 혼혈인이면 누구나 미국 이민을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 정부의 혼혈인 대책 때문이다. 45년 9월 미군이 진주한 이래 오늘까지 혼혈인이 수만 명 태어났지만 미국 정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인도적 지원은커녕 혼혈인의 미국 입국도 법률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다가 베트남전에서 패한 후 베트남 혼혈인이 공산 베트남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고, 여론이 악화하자 82년 혼혈인 이민법을 제정했다. 이 법 덕분에 비로소 베트남계·한국계·타이계 혼혈인들이 미국으로 이민갈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비인간적 요구 조건을 달고 있는 이 법은 시행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혼혈인 스스로 부친이 미국 군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데, 이들은 거의가 부친의 성조차 모르는 형편이다. 또 미국에 이민할 때 어머니는 함께 갈 수 없도록 규정해 유일한 혈육인 모자 간의 생이별을 강요하는가 하면, 한국에서 전과가 있을 경우 이민 대상에서 제외한다. 자격도 52~82년에 태어난 혼혈인으로 국한해, 한국의 경우 이민을 거부당하는 혼혈인이 많을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의 이런 태도는 유럽계 아시아 혼혈인에 대한 유럽 각국 정부의 지원 대책에 비춰 볼 때 매우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프랑스의 이민법은 아시아 혼혈인에 대해 ‘프랑스계 혼혈아는 프랑스 시민권을 받고, 친어머니를 프랑스로 초청할 수 있으며, 태어난 나라에서 살고자 할 경우 그 나라에서 생산적인 국민이 될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가 교육과 직업 훈련을 지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실정 때문에 한국 혼혈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원망과 증오심이 뿌리 깊다. 미국이 어머니의 나라를 이용해 자기 이득은 다 챙기면서도 숙명적 산물인 자신들을 무책임하게 내팽개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혼혈인들의 보편적인 정서이다. 그들은 필리핀의 미군 혼혈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혼혈인들에게도 미국 정부가 시민권을 주어야 하며, 친어머니를 모시고 자유롭게 두 나라를 왕래하면서 살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한국 정부의 혼혈인 대책은 보건복지부가 불우이웃돕기 성금 중 연간 2억6천만원(95년)을 펄벅재단에 보조하는 것이 고작이다. 펄벅재단은 이 보조금으로 18세 미만 혼혈인 3백80여 명에게 매달 4만1천원씩 생계비를 지원하고 있다. 혼혈인을 위한 민간 자선단체인 펄벅재단은 64년 미국인 펄벅 여사가 설립한 재단으로, 그동안 4천 5백여 혼혈인의 교육·생계를 지원했다. 펄벅재단 변창남 원장은 “자원봉사 제도가 정착한 미국의 민간 후원자 개개인과 혼혈 어린이 1명씩을 연결해 편지 거래와 소액 후원금으로나마 보호자 노릇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해 왔는데, 현재 5백여 후원자와 혼혈아가 맺어져 있다”고 밝힌다.

한국의 혼혈인들은 주민등록증도 있고, 선거 때 투표도 하며, 세금도 낸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 생활에서는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요, 또 하나의 소수민족으로서 설움을 톡톡히 겪고 있다. 그만큼 한국 사회 구성원이 이들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혼혈인에 대한 편견과 냉대는 요즘 누구나 시대의 조류라고 강조하는 ‘세계화’의 한국적 수준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도 있다. 세계화의 궁극적인 취지는 인종과 피부색을 떠나 상호 화합과 이해를 도모하자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한국의 혼혈인에게는 아무리 외면하고 싶을지라도 절반은 한민족의 피가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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