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재건 급한 '부실 탑' 현대건설
  • 소성민 기자(smso@e-sisa.co.kr) ()
  • 승인 2000.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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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구조 엉망, 그룹 자금위기 뇌관 구실
현대그룹 자금난은 이미 지난 5월 표면화해 금융 시장에 충격을 던졌으나 ‘정씨 3부자 동반 퇴진’이라는 발표와 함께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현대 자금위기설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에 7월24일 한국기업평가(한기평)는 현대 8개 계열사에 대한 신용 등급을 전격적으로 하향 조정했다(도표 1 참조).

특히 현대건설은 투자 부적격 등급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투자 부적격 등급이란, 해당 기업이 회사채 만기를 연장하거나 기업어음(CP)을 할인할 길이 막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행의 지원 없이는 부도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그룹 자금 위기의 뇌관은 현대건설이다. 현대건설은 지난 7월29일 만기가 몰린 회사채와 기업어음 1천9백66억원어치를 은행권과 계열사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틀어막았지만, 1차 어음 마감 시한을 넘기면서까지 고전했다. 지금 같은 상태가 지속된다면 올해 말까지 1조원 넘게 돌아올 부채를 감당할 수가 없다.

현대건설은 과연 김윤규 사장이 주장하듯 ‘미스 매치(miss match)’ 때문에 일시적 유동성 위기에 빠진 것일까. 현대건설측은 △5월부터 7월까지 상환해야 할 차입금이 월 5천억원대였지만 연말까지는 2천억∼3천억 원대로 줄어드는 데다 △연말까지 만기가 되는 기업어음 3천9백억원 가운데 제2 금융권 물량이 17%(6백70억원)에 불과해, 적어도 연말까지는 유동성 위기가 재연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대건설의 신용을 투기 등급으로 끌어내린 한기평의 시각도 현대건설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현대의 신용 등급을 담당한 한기평 평가사업본부 최강수 평가1팀장은 “현대건설이 부채가 많고 2년 연속 경상 적자를 기록하는 등 재무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세계적 시공력과 기술력을 보유한 데다 지금도 20조원이 넘는 공사 물량을 확보한 회사이다. 금세 어떻게 될 회사는 아니지만 문제는 시장의 신뢰다”라고 현대건설을 평가했다.
영업 현금 흐름 마이너스…차입금도 막대

하지만 현대건설의 재무 구조만을 놓고 보면 이 회사가 과연 자력으로 소생할 수 있는 회사인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영업 현금 흐름이 1천1백22억원 마이너스를 기록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최근 현대건설은 영업에서 전혀 현금을 창출하지 못하는 회사가 되어 있다(도표 2 참조).

특히 지난해에는 영업 활동에서 발생하는 현금흐름에다 투자 활동·자금 차입 등 재무 활동에서 발생하는 현금 흐름까지 고려한 순 현금 흐름이 4백61억원 마이너스를 기록해 재무 상태가 심각한 지경에 처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기업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신규 자금을 차입하거나 만기가 도래하는 대출금을 연장할 수 없다.
현대건설의 영업 현금 흐름이 이처럼 악화한 데는 건설 경기가 침체한 탓도 있지만 방만하고 짜임새 없는 경영 관리가 더 큰 문제로 지목되고 있다. 채산성을 배제한 무리한 공사 덤핑 입찰이나, 발주처의 신용 상태를 무시한 채 공사부터 하고 보는 자세가 그렇다. 지난 1/4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현대건설의 공사 미수금은 2조7천억원에 달한다(도표 3 참조).

현대건설의 자금난은 악화한 영업 현금 흐름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차입금 규모가 막대하다는 데 있다(도표 4 참조). 또 단기성 차입금 비중이 전체 차입금의 60%가 넘을 만큼 비정상으로 높아 재무 구조가 대단히 부실하다.
그에 비해 자기자본은 실제보다 터무니없이 부풀려져 있다. 지난 1/4분기 보고서에는 자기자본 총액이 2조3천1백38억원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이라크 공사 장기 미수금 9천7백91억원과 지분 보유 계열사의 주식 가치 하락분 6천1백47억원을 빼면, 현대건설의 실질적 자기자본은 약 7천2백억원 정도여서, 보고서에 기록된 총액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다(8월 초 현재 보유 주식 가치는 훨씬 더 떨어져 있다).

자기자본을 조정하고 나면 현대건설의 실질적 부채 비율은 900%가 넘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금융기관들이 현대건설로부터 자금을 회수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건설의 자금난을 일시적 유동성 위기로 치부하기에는 부실 상태가 너무 심한 것이다.
더구나 현대건설은 순이자 비용을 지급이자·세금·감가상각비 공제 전 이익으로 나눈 이자 비용 부담 비율이 1에도 못 미칠 만큼 수익성이 악화해 있다(도표 5 참조). 여신 전문가들은 이 비율이 적어도 3을 넘는 기업이라야 안정적으로 채무를 상환할 능력이 있다고 본다. 결국 현대건설은 정상으로 빚을 갚을 능력을 상실한 기업인 셈이다.

하지만 현재 현대건설이 내놓은 자구 계획은 △광화문 사옥 및 압구정동 사원 아파트 등 보유 부동산 매각 △이라크 공사 미수금 할인 매각 등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거나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한 것들이다.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장 김상조 교수(한성대·무역학)는 “현대건설을 이대로 두었다가는 국가 경제가 다시 위기에 처한다. 지금처럼 은행장들이 모여 지원을 논의하는 방식으로는 악순환만 계속된다. 그런 식으로 가다 부실만 심해지면 금융노련인들 가만 있겠는가. 결국 재벌·금융 어느 쪽도 구조 조정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최악의 경우 현대건설을 워크아웃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지금처럼 도덕적 해이가 성행할 수밖에 없는 워크아웃 제도에서는 금융 부실만 심해질 뿐이라고 보았다. 다만 워크아웃 제도를 △채권단이 부채를 출자 전환하고 △오너 경영자가 퇴진하도록 개선할 수 있다면, 이 제도가 현대건설을 처리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자금난 주범은 재벌 지배 구조”

금융 전문가들은 현대 사태가 이처럼 꼬이게 된 근본 원인이 재벌의 지배 구조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머니투데이 이종환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현대건설은 지난해 막대한 유상 증자를 통해 확보한 자금을 한푼이라도 더 빚 갚는 데 써야 했다. 그런데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현대상선 등 계열사들이 증자할 때마다 여기 참여해 보유 지분을 늘리거나 유지하는 데 썼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현대건설이 지주회사 자격을 유지하기를 포기하고 보유 지분부터 매각하지 않는 한 현대그룹 전체가 동반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현대건설이 유상 증자나 해외 주식예탁증서(DR)를 발행해 모은 자금은 총 7천67억원. 현대건설 집계에 따르면, 현대건설은 그 가운데 2천3백77억원을 계열사들의 유상 증자 물량을 받아 보유 지분율을 유지하는 데 썼다. 영업 현금 흐름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이자 비용 부담률이 1에도 못 미치는 회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처사이다.

회사 운영이 이런 식인 탓에 증시에서 현대건설은 이미 ‘찬밥’ 신세가 된 지 오래다. 여의도의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지난해 가을부터 우리 회사는 현대건설을 매수 대상 목록에서 지워 버렸다”라고 밝혔다.

투자전략가인 굿모닝증권 이근모 전무는 “가장 좋은 대안은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재벌들이 ‘배째라’는 식으로 나갈 때마다 정부가 나서서 금융권에 압력을 넣으니 도덕적 해이가 계속되는 것이다. 구조 조정의 핵심은 죽든 살든 기업들을 내버려 두되 그 여파로 은행이 부실해질 경우 여기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국회는 한시가 급한 공적 자금 추가 조성 문제를 9월에 논의하겠다고 한다. 증시에 신뢰감이 조성될 리가 없다”라고 비판했다.
현대그룹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 이후에 다른 기업들이 뼈를 깎는 감량에 몰두하고 있을 때 LG반도체·기아차를 인수하는가 하면 현대아산을 통해 대북 사업에 무리한 투자를 강행했다. 그러다 보니 현대중공업이나 현대자동차 정도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자금 사정이 좋지 못한 편이다. 현대상선·현대전자 등의 실질적 부채 비율이 300%를 훨씬 넘는 것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건설을 제외하면 자금 문제가 당장 심각한 계열사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국가 경제를 볼모로 삼아 버티기 작전을 펴는 현대나, 급한 충격만 모면하고자 그런 기업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는 정부의 태도부터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국 경제는 올해를 넘기기 전에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고 금융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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