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지면 끝장” 사활 건 승부처
  • 徐明淑 기자 ()
  • 승인 1996.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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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DJ, 제1당 결정하는 최대 승부처 인식…민주당 대약진, 자민련 표 잠식이 변수
가장 넓은 땅, 가장 공략하기 힘든 땅, 정치 변수가 가장 민감하게 반영되는 땅, 그 누구도 우리 땅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땅, 마지막 승부를 좌우하는 땅. 수도권이 바로 그곳이다. 수도권에는 의석이 무려 96개(서울 47, 인천 11, 경기 38) 걸려 있다. 국회의원 의석 수의 3분의 1에 이른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이 지역에는 언제나 ‘최대 승부처’라는 상투적인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런데 올해 4월 총선에서 수도권이 갖는 정치적 상징성과 전략적 무게는 훨씬 더 크고 더 무거워졌다. 수도권은 말 그대로 총선 결과를 좌우하고 제1당 여부를 가름하는 최대 승부처로 떠올랐다.

왜 수도권이 최대 승부처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해 지방 선거를 계기로 3김이 이끄는 세 정당이 각 지방을 공고하게 분점했고, 그런 정치 지형은 이번에도 고스란히 재현되거나 심지어 더 공고해질 가능성마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3김의 영향력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수도권에서 얼마나 성과를 거두는가에 따라, 어느 당이 제1당이 되고 어느 당이 지역 정당에 머무르느냐가 판가름날 수밖에 없다.
신한국당 인기, 3당 중 ‘부동의 꼴찌’

현재의 지역 분할 구도를 감안할 때, 신한국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정가의 중론이다. 신한국당의 현실적 목표는 제1당 유지이다. 신한국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여소야대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제1당 자리를 뺏기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김대통령은 임기 후반기의 국정을 끌고나가기 힘들고, 정계 개편도 신한국당이 주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신한국당이 제1당 자리를 지키느냐 내주느냐 여부는 수도권에 달려 있다. 집권당의 ‘파워 블록’이던 충청도와 대구·경북이 지방 선거 과정에서 떨어져 나갔거나 사실상 와해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국민회의 또한 수도권에 당의 명운을 걸기는 마찬가지이다. 국민회의의 4월 총선 목표는 백석을 얻어 제1당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영남·충청·강원에서 의석을 기대하기 힘든 국민회의가 제1당으로 도약하려면 호남권 싹쓸이는 물론 수도권에서 압승을 거두어야만 가능하다. 수도권에서 선전하지 못하면, 제1당은커녕 ‘제2의 평민당’ ‘지역 정당’으로 고착될 수도 있다. 수도권은 국민회의에게 ‘전국 정당’이라는 명분을 심어줄 유일한 지역인 셈이다.

민주당은 당의 정치 생명을 수도권에 걸고 있다. 확고한 지역 뿌리와 조직 기반이 없는 민주당은 ‘정치 의식이 높고 지역 의식은 희박한’ 수도권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민주당은 최근 최고위원 6명과 당 3역이 모두 서울에 출마하고, 지명도 높은 인물을 가능한 한 수도권에 총투입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민련 또한 수도권에서 손을 놓을 처지가 아니다. 현재 자민련은 수도권 지역에 의석을 1개만 보유해 매우 궁색한 처지이다. 자민련은 ‘지역 정당’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서라도 이번 총선에서는 어떻게든 수도권에 교두보를 만들겠다고 벼르고 있다. 자민련이 노재봉 전 총리에게 서울(서초 을) 출마를 끈질기게 권유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이다.

최근 실시된 여러 여론조사에서 수도권 유권자들은 민주당·국민회의·신한국당 순으로 ‘좋아하는 정당’을 지목했다. 여론조사에 따라 민주당과 국민회의의 1,2위 순위가 달라지기도 했지만, 신한국당은 선두 3당 가운데 ‘부동의 꼴찌’ 자리를 지켰다. 신한국당 서울시지부의 한 관계자는 “YS가 3당 합당의 한계에서 벗어나 전직 대통령 비자금과 5·18 문제를 정면 돌파함으로써, 신한국당은 정치 의식이 높은 수도권에서도 당당히 치고 나갈 여건을 마련했다. 다만 역사 바로잡기와 개혁에 보내는 갈채가 당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 게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민주당 선전하면 신한국당 어부지리?

DJ의 고민은 6·27 선거 때 수도권에서 얻은 ‘호남 고정표 플러스 알파’를 어떻게 지키고, ‘20억 플러스 알파설’로 생긴 부정적 이미지를 어떻게 상쇄하느냐 하는 데 있다. 국민회의는 대선 자금을 둘러싼 YS의 부도덕성을 최대한 부각하는 ‘공세적 반격’에 나선다는 작전을 세워놓았다.

정치인 사정은 수도권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칠 또 다른 변수다. 신한국당은 수도권 민심 변화를 유도하는 무기로 ‘정치인 사정’을 활용할 수도 있다. 신한국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치권 사정이 총선 전에 이뤄져야 한다. 야권의 도덕성에 확실한 흠집을 내야만, DJ를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수도권 표를 차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약진은 수도권의 정치 지형을 바꾸어 놓을 최대 변수로 꼽힌다. 수도권 유권자들은 민주당을 가장 좋아하는 정당으로 꼽고 있다. 물론 민주당의 인기는 비자금 정국에서 일시적으로 빚어진 이상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 민주당의 한 지구당위원장은 “우리 당은 뿌리와 조직이 없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될 정당을 밀어주자는 분위기가 지배할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당 전체가 ‘박찬종’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고 말했다. 당 인기를 표로 연결시키기 위해 상품성 높은 인물을 수도권에 집중 배치하려는 것이 민주당의 선거 전략이다. 민주당은 수도권을 ‘클린 벨트(Clean Belt·깨끗한 정치 구역을 뜻함)’로 설정하고, 박계동 의원을 비롯해 이 철(서울 성북 갑) 원혜영(부천 오정구) 제정구(경기 시흥) 의원과 서경석(양천 갑) 홍성우(강남 갑) 김부겸(과천시)씨 를 내세워 ‘변화의 바람몰이’를 할 계획이다.

신한국당은 민주당이 선전하면 할수록 여당에게 나쁠 것이 없다는 판단이다. 자력으로 1등할 수 없는 곳에서 야권 분열을 최대한 활용하면 어부지리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한국당이 서울에서 우세 지역으로 꼽은 네 군데는, 공교롭게도 민주당이 강세를 보이는 지역과 일치한다.
그러나 신한국당이 자민련에 잠식 당할 표도 만만치 않다. 신한국당 서울시지부의 한 관계자는 “불안감을 느낀 보수층과 충청권 표가 자민련으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다. 여당은 평균 15%에 이르는 충청권 표를 잃는 반면, 30%에 육박하는 국민회의의 호남 고정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서 전황을 매우 비관적으로 판단했다. 충청 출신들이 20%에 가까운 안양·인천 지역에서는 더 큰 타격을 입으리라는 것이 신한국당의 자체 분석이다. 정치 의식이 높고 지역성이 비교적 엷은 수도권에서도 ‘출신지 연고 의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복합적인 변수가 얽히면서 4당이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일 수도권에서도 역시 최대 격전지는 서울이다. ‘수도권 대폭 물갈이’를 눈앞에 둔 신한국당은 특히 서울에 개혁성과 도덕성을 갖춘 변호사·전문 경영인·교수 같은 전문직 인사를 집중 투입해서, 현재 14석인 의석을 17개로 늘린다는 복안이다. 이회창 전 국무총리, 이홍구 전 국무총리, 최병렬 전 서울시장 같은 거물급을 영입해 서울에 내세우는 ‘특급 작전’을 구상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수도권 유권자 ‘반란’ 일으킬 것인가

국민회의는 이미 서울 지역 47개 지역구 가운데 43개 지역구의 공천을 사실상 마쳤다. 서울 47개 지역구 가운데 35석을 차지하고, 성남·부천·부평·안양 등 ‘텃밭(호남 출신 주민이 많은 지역)’이 좋고 야세가 강한 지역을 다 휩쓴다는 것이 국민회의의 야심적인 목표이다.

서울에서 가장 시선을 모으는 지역은 야권 중진이 ‘마의 벽’으로 꼽히는 4선의 벽을 넘어서려는 종로와 중구이다. 종로는 이명박 의원(신한국당)과 4선 거물 이종찬 의원(국민회의)의 맞대결이 예상되는 곳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사이 좋게 정치권에 나도는 ‘사정 대상 정치인 명단’에 올라 있다. 두 의원이 사정권에서 벗어나 맞대결을 벌인다면 매우 흥미진진한 싸움이 될 것이다.

중구 역시 4선 의원이자 야권의 차세대 주자로 꼽히는 정대철 의원의 아성에 KBS 앵커 출신 박성범씨가 도전하는 곳이다. 여당은 텔레비전 방송의 위력을 감안해서 일찌감치 박성범씨를 비롯해 최영한 의원(영등포 을)과 SBS 앵커 출신 맹형규씨(송파 을)를 영입했다. 최의원은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김민석 씨(국민회의)와 세대간 대결을 벌이게 된다.

민주당 박계동 의원(강서 갑)이 지역구에서 살아 남을 것인가도 관심거리이다. 이 지역은 관악구와 함께 서울에서 호남 출신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결속력도 매우 높은 지역구로 꼽힌다. 국민회의는 이 지역에 신기남 변호사를 조직책으로 공천했다. 정치권에서는 박의원이 비자금 정국에서 스타로 떠오르기는 했지만, 지역구의 특성상 쉽지 않은 싸움을 치를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베스트 셀러 작가 3김씨’도 작은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국민회의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작가 김진명씨를 맹형규씨가 나서는 송파 을에 배치했다. 신한국당은 <남자의 여자>를 쓴 김한길씨, 민주당은 <인간시장>의 김홍신씨에게 지역구 출마를 권유하고 있다. 입맛이 까다로운 수도권 유권자를 잡으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권 유권자들이 어떤 반란과 변혁을 예비하고 있는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워낙 복합적인 변인이 작용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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