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문 나오니 실업 문이 활짝
  • 이문환 기자 (lazyfair@e-sisa.co.kr)
  • 승인 2000.12.0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5만명 앞에 일자리는 고작 8만5천 ··· 기업 채용 규모 준 데다 '묻지마 지원' 까지 극성
35만 대 8만5천 시대. 사회에 막 첫발을 내딛으려는 새내기들이 처한 현실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대졸 미취업자와 내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할 졸업 예정자 숫자는 모두 35만명. 하지만 이들에게 돌아가는 일자리는 고작 8만5천개이다.

지난 10월까지만 해도 취업 전문가들은 올 하반기 채용 시장이 ‘밝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경기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던 지난해에도 허리띠를 졸라맸던 기업들이 올 상반기부터 신입 사원을 뽑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 취업과 신현호 취업담당은 “9월까지는 취업 박람회도 여러 차례 열었고 기업으로부터 추천 의뢰도 많이 받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부도 이후 경제 분야에서 잇달아 악재가 터지면서 기업들은 다시 긴축 경영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난 9월까지 신입 사원 9백명을 뽑았던 현대전자는 내년 상반기까지 신입 사원을 아예 채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의 경우 삼성중공업이 100명에서 80명으로, 삼성물산이 40명에서 20명으로 신입 사원 채용 숫자를 줄였다. 이렇게 채용 계획을 백지화하거나 수정하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올해 초 전문가들이 1만2천명 선으로 내다보았던 30대 그룹·금융기관의 신입사원 채용 규모는 만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내년은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상황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신입 사원을 필요로 하는 기업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계 회사가 한국에 투자를 늘리며 채용 시장의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이들이 채용하는 사람은 경력자와 ‘값싸게’ 부릴 수 있는 임시직이다. 현재 우리나라 시장에서 임시직이 차지하는 비율은 53%이지만, 대졸 인력 상당수가 임시직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연세대 김농주 취업담당관의 전망이다. “앞으로 정규직 채용 시장에서 경쟁률은 100대 1이 넘을 것이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이미 김담당관의 말은 현실화하고 있다. 지난 10월 채용을 마친 효성그룹의 경우 신입 사원 3백명 모집에 1만2천명이 지원해 경쟁률 40 대 1을 기록했지만, 지난 11월 중순 입사지원서를 받은 신세계의 경우 100명 모집에 1만5천2백명이 지원해 152 대 1의 ‘살인적인’ 경쟁률을 보였다. 1·2월에 신입 사원을 모집하는 기업의 경쟁률은 이보다 훨씬 더 높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지원자 수가 많은 만큼 그 중에는 명문 대학 출신이나 외국에서 경영학 석사 자격을 따 온 인재도 많다. 하지만 기업 처지에서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묻지마 지원’을 한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지원자들은 만약 채용된다고 해도 더 좋은 직장이 나타나면 주저 없이 직장을 옮긴다. 1998년 말 신입 사원을 공채한 중견 기업 ㄷ산업의 경우,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 대학 출신이 대거 입사를 희망하자 회장의 특별 지시로 응시생 전원을 채용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전부 다른 회사로 이직하고 말았다.
“공채 제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특히 인터넷으로 입사지원서를 받게 된 뒤부터 이런 양상이 더욱 심해졌다. 인터넷으로 지원을 받는 기업들 중에는 자기소개서를 꼼꼼하게 검토하기보다 학교별·학과별·학점별로 각각 점수를 매겨 나온 총점으로 1차 서류 전형을 마치는 곳이 많다. 서울 시내 대학이더라도 ‘서열’이 낮은 대학이나 지방 사립 대학은 서류 전형을 통과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한 대기업 인사 실무자는 “현실적으로 그 많은 지원서를 꼼꼼하게 검토하기란 불가능하다”라고 고백했다.

‘묻지마 지원자’들 때문에 다른 구직자와 해당 회사가 입는 손해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우선 구직자들이 그만큼 취업 기회를 놓친다. 회사로서도 신입 사원을 채용하는 데 드는 비용부터 시작해 사원 교육비까지, 상당한 돈을 투자하고 한푼도 회수하지 못하는 지경에 빠진다. 입사지원서 만~2만 장을 접수해 처리하려면 인사팀 전원이 꼬박 매달려도 최소한 보름이 걸린다. 채용 후 신입 사원을 교육하는 데 드는 비용도 사원 1명당 4백만~5백만 원이 소요된다.
이런 부작용을 막으려면 공채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효성그룹 인사팀 임광식 팀장의 말에 따르면, 공채 제도가 아직까지 존재하는 이유는 채용 시장이 덜 발달했기 때문이다. 회사가 원하는 인재를 골라 쓸 수 없는 탓에 실무에 대해서 ‘백지’인 신입 사원을 뽑아 훈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채용 시장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대학이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학생과 대학이 갖고 있는 ‘공급 마인드’. 우선 학생들 중에는 학점 관리 잘하고 토익 시험에서 고득점을 올리는 것을 취업의 전부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보통 대학생들이 취업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이르면 3학년이지만 보통은 4학년부터이고, 이때 취업 준비란 토익 시험 공부가 거의 전부이다. 또한 일단 취업하고 보자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이 어떤 분야에 적성이 맞는지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지원서를 내는 이도 많다. ㅅ대학교 인문대 취업대표 박 아무개씨는 “회사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어디든 붙고 보자는 심리에서 지원한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적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입사 지원을 하다 보니 ‘뽑아만 주면 뭐든지 다 하겠다’고 읍소하는 ‘마당쇠’형도 종종 출현한다. LG EDS 홍보팀 박철현 대리는 “뼈를 묻는다고 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뼈를 묻을 것인지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전혀 없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합격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학생들의 대기업 선호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것도 문제점. ‘대기업에서는 중소기업으로 이직할 수 있지만, 중소기업에서는 대기업으로 이직할 수 없다’는 사회 편견이 강한 탓이다. 중소기업에는 아예 갈 생각을 하지 않거나, 들어간다고 해도 오래 근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직업 전문가들이 권하는 것은 ‘작은 곳에서 알차게 경력을 쌓으라’는 것이다. 외환 위기 이후로 대기업도 경력 사원을 영입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효성그룹 임광식 팀장의 말이다. 임팀장의 말에 따르면, 사무직의 경우 해당 분야에서 3~5년 근무한 경력자에 대한 수요가 높다.

학생들의 취업 마인드가 취약한 데에는 부실한 취업 교육 탓도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취업 교육에 대한 수요는 있지만 대학이 제때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희대학교의 경우 1997년부터 ‘여성직업론’, ‘진로설정 및 자기관리’ 등 취업 강좌 7개를 개설하자, 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수강 신청을 받자마자 마감될 정도였다. 숭실대학교 취업과 김장겸 과장은 “그만큼 취업 강좌에 대한 학생들의 수요가 높았던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대학의 부실한 취업 교육도 문제

한국노동연구원 동향분석실 강순희 연구위원은 전체 실업자 중 대졸 이상 고학력 실업자 비중이 높아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60쪽 표 참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식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고학력자에 대한 수요는 늘었지만 개인의 눈높이가 지나치게 높을 뿐만 아니라 대학 역시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를 공급할 교육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대학은 학문의 전당인 동시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공급하는 ‘인프라’라는 것이 김연구위원의 주장이다.

대졸자 취업 문제의 핵심은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취약한 취업 마인드를 지니고 구직 전선에 뛰어든 대졸자가 ‘35만 대 8만5천’ 시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대학의 부실한 취업 교육은 이를 키워낸 보모나 다름없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