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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는 ‘부재중’

오무전기 사건 이후 김선일씨가 살해되기까지 약 2백일간 정부 당국은 무엇을 했는가. 대테러 안전 시스템은 과연 존재하는가.

박성준 기자 ㅣ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06.29(Tue)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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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무역 김선일씨 피랍 및 피살 사건은 지난 6월20일과 22일 한국에 알려졌지만, 그 기원은 오무전기 근로자가 이라크 반미 저항 세력에게 피살된 지난해 11월30일로 거슬러올라간다. 오무전기 사건 이후 김씨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약 2백일간, 이미 한국군이 나가 있었고 추가 파병이 예정되어 있었던 이라크에 한국 정부는 ‘부재’했으며, 국가 기능은 정지되어 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테러 방지라는 국가 의무를 게을리한 결과는 국가의 존립 근거를 뿌리째 흔들고 있지만, 대통령은 사과 한마디만 던진 채 다시 무대 밖으로 사라졌다. 과연 국가는 있는가? 국민은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

너무도 짧은 시간에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들이 잇달아 터지고 있다. ‘24시간 안에 (한국군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김선일을 참수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이라크 무장 단체의 비디오 테이프가, 아랍권 위성 방송 알 자지라를 통해 한국의 일반 시민에게 알려진 것은 6월20일께 새벽이었다. 그로부터 만 이틀이 지나지 않아 납치범이 넘긴 비디오에서 ‘나는 살고 싶다’고 애타게 울부짖었던 가나무역 통역 김선일씨는 결국 싸늘한 주검이 되어 이라크 바그다드와 팔루자를 잇는 길에 버려졌다. 그로부터 또 이틀이 지나지 않아 김씨 죽음과 관련된 각종 의혹이 새롭게 불거져 나오는 바람에 대한민국은 혼돈 상태에 빠져들었다.

김선일씨가 납치된 것은 지난 5월31일이었지만, 피랍 사실이 알려진 6월20일 이후로는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사실상 이라크 무장 세력의 볼모가 되었다. 김선일씨 피랍과 살해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폭력이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전쟁’이었다. 그것도 안보 전문가들이 ‘21세기의 새로운 위협’이라고 동의하는 전형적인 비대칭 전쟁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 전쟁의 본질을 읽어내지 못하고 완벽하게 참패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출발점은 김씨가 납치된 것으로 알려진 5월31일이 아닌, 지난해 11월30일의 오무전기 근로자 사망 사건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라크 현지에서 외국 민간인을 상대로 한 무장 세력의 폭탄 테러가 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훨씬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때부터 무장 세력의 공격 대상에 한국의 민간인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정부, 나아가 국가는 이라크 무장 세력에 의해 한국인 근로자 2명이 죽고 2명이 다친 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당연히 이 사건으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

오무전기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도 정부가 국제 테러와 관련해 전반적인 상황을 점검하고 준비할 기회는 몇 번 더 있었다. 지난 4월5일 민간 구호단체 운동가 한재광씨(‘지구촌 나눔의 벗’ 사무국장)와 가나무역 직원 박원곤씨가 이라크 나시리아에서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무크다드 알 사드르가 이끄는 메흐디군에 붙잡혔다가 만 16시간30분 만에 풀려난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이라크의 주요 도시는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이라크 미군 군정 당국은 주권 이양을 앞두고 방해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이라크 시아파의 대표적인 무장 세력 지도자 무크다드 알 사드르가 운영하는 알 하우자 신문을 강제 폐간시키고 측근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알 사드르측이 강력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이라크 곳곳에서는 무장 충돌이 일어났다. 이같은 위험한 상태에서 재외 국민의 안전을 1차로 책임진 현지 공관이 한 일은 단순한 설득과 경고뿐이었다. 한재광씨와 박원곤씨는 4월16일 새벽 5시30분께 풀려나 당일 11시에 바드다드의 숙소로 돌아갔지만, 그 때까지 현지 공관에서 두 실종자를 수소문한 직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만약 이 때 영사 업무 당국이나 정보 당국이 한씨 일행 피랍 사건의 엄중함을 깨닫고, 뒤늦게라도 사건 경위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분석했더라면 어땠을까. 김선일씨가 실종되고 나서 20일이 지나도록 실종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겨우 피랍 사실을 전해 듣고 허둥지둥 달려가는 식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4월14일 한씨가 귀국한 뒤에도 정부 당국자 중 누구도 진지하게 피랍 경험담을 청취하지 않았다. 한씨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귀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정원에서 한 차례 전화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용건은 ‘이라크 현지로 다시 갈 계획이 있느냐’고 간단하게 묻는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정보 당국은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어쩌면 유용하게 쓸 수도 있었을 매우 기초적인 정보조차 수집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한씨가 귀국한 날짜는 국내의 모든 이목이 지난 4·15 총선에 쏠려 있던 지난 4월14일이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값비싼 정보를 그대로 서류더미에 묻어버린 일은 또 있었다. 한씨 일행 사건과 거의 동시에 터진 것이 허영민 목사(서울 화곡동 신성교회) 일행 피랍 사건이다. 허목사 일행은 한재광씨 일행 피랍 사건이 발생한 지 바로 이틀 뒤인 지난 4월8일 선교 행사 참석차 요르단 암만을 출발해 이라크 모술 지역의 니느웨로 가다가 무려 세 차례에 걸쳐 이라크 반미 무장 세력에게 집단 피랍되기를 반복하다가 풀려났다.

허목사 일행이 처음 붙잡힌 곳은 당시나 지금이나 이라크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꼽히는 팔루자 입구였다. 허목사 일행 8명은 한때 무장 세력에게 총살당할 위기에 몰렸다가 이라크인 BBC 기자의 만류로 목숨을 건졌다.

정부 관계자들은 한재광씨 일행 사건처럼, 허목사 일행 사건도 간과하고 말았다. 지난 4월 국가정보원 직원 3명이 한목사를 찾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 때 국가정보원 직원들은 2~3시간 정도 사건 경위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뒤, ‘나중에 필요하면 참고 진술을 듣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지만, 그 뒤로 다시 찾아온 적은 없었다”라는 것이 한목사의 이야기이다.

김선일씨 피랍 사건이 알려진 직후 <시사저널>과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허목사는 정보기관의 무사안일을 질타했다. “정보기관에서 김선일씨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협상단을 보내면서, 최소한 이번만큼은 나에게 연락해 정보를 얻어갈 줄 알았는데 결코 그러지 않았다.” 허목사는 비록 아랍어로 씌어 있어 읽을 줄은 몰랐지만, 피랍 당시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BBC 기자의 명함 등 무장 세력의 정체에 접근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같은 사건이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역구의 유력한 국회의원(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원) 사무실에 몇 차례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신의원 사무실에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번번이 면담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약 두 달을 허송한 뒤에 대한민국 정부는 최악의 인질 사태를 맞았다. 이는 2003년 2월 대구 지하철 참사가 벌어진 이후와 비슷하다. 무기력한 공권력이 빚어내는 심리적 공황 상태와 관계 기관 사이의 책임 떠넘기기….
정부 부처 중 가장 곤경에 처한 곳은 김선일씨 납치 날짜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AP 통신의 김선일씨 신원 확인 전화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등 ‘수준 이하’의 업무 처리 과정을 보여준 외교통상부이다. 대통령은 외교통상부를 비롯해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국가정보원 등 유관 기관 전체의 잘못을 가려달라고 감사원에 요청해 놓은 상태다.

하지만 특정 기관이나 몇몇 공무원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하려고 한다면 또 한번 쓰라린 재앙을 자초하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오무전기 근로자 피격 사건이 일어난 뒤부터 김선일씨 피랍 사실이 알려진 지난 6월20일까지 약 2백일간 정부의 상황 판단은 총체적으로 안이했다. 그렇지 않아도 논란이 많은 이라크 파병지에서 테러 또는 인질극이 벌어질 경우 그것이 초래할 결과를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라크에서의 한국인 안전 문제는 국민의 생명이 걸리는 것은 물론, 파병에까지 직접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직접 챙겼어야 할 사안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결단’만 내렸지, 그 결단이 효율적으로 집행될 수 있도록 만들지 못했다.

더욱이 이라크는 미군 당국과 반미 저항 세력간 교전으로 ‘불바다’로 변해가고 있는 상태였다. 대통령은 6월18일 이라크 파병을 재확인하기 전, 이미 현지 교민 체류 상황을 정확하게 점검하고, 파병 확인 발표에 따른 대책을 세우라는 특별 지시를 했어야 옳았다.

정부의 테러 대책에 대한 연구 부족은 심각한 지경이다. 정부는 김선일씨를 구출하기 위한 협상단을 파견하면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테러범들의 최대 정치적 요구인 ‘이라크 내 한국군 철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인질 사건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다’는 미국의 방식을 본뜬 것이었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처사였다.
미국 정부는 인질 사건을 처리할 때 두 가지 큰 원칙을 따른다. 이미 알려진 ‘양보 불가’라는 원칙 못지 않게, ‘자국 국민의 무사 귀환을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한다’는 원칙도 중요하게 여긴다. 또 ‘사건 배경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미국 정부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규범도 설정해놓고 있다. 이것은 미국 중앙정보국 비밀 문서철에 있는 ‘1급 국가 기밀’이 아니다. 미국 국무부가 매년 전세계에 발표하는 <전세계 테러 유형> 보고서에 연례적으로 등장하는 공개된 내용이다.

한국 정부가 지난해 5월 종전 선언 이후 ‘테러 전용 극장’이나 다름없는 이라크에 발을 들여놓겠다고 하면서, 테러에 대비한 기본 원칙마저 정하지 않은 것은 ‘나침반 없이 거친 파도를 헤쳐 가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김선일씨 구명 과정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국제 테러의 기본 속성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이해는 ‘절망적인 수준’이다.

미국의 저명한 테러 전문가 허브 코언은 국제 테러의 본질을 ‘정치적으로 무력한 테러리스트들이 협상력과 합법성을 갖추어 가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테러리스트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테러 행위의 최대 목적인 선전 효과’를 무력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질극은 그야말로 ‘연극’이다. 구경꾼이 많을수록, 상대 국가가 초조해하는 모습을 많이 보일수록 상대의 의도에 말리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김선일씨 피랍 사건의 본질을 완벽하게 분석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그것도 ‘전면적으로’ 사건 해결에 달려들었다. ‘현지 미군에 지원 요청’ ‘파병 철회 불가’ 등을 섣불리 들먹이고, 중국에 출장 가 있던 반기문 외교부장관이 급거 귀국하는 우를 범했다.

김씨의 유해는 김해공항을 통해 고향 부산으로 돌아왔지만, 테러 상황은 여전히 현재 진행중이거나 오히려 악화하고 있다. “김씨 살해 사건 이후 미국이 반미 무장 세력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고 있다. 이라크인이 이를 한국 탓으로 돌리는 등 반한 감정이 더 거세게 일면서 한국인에 대한 추가 테러 소문까지 떠돌고 있다”라는 국정원 한 해외 파트 담당자의 상황 묘사는 현재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일러주고 있다.

미국 정보 당국에 긴밀한 공조 요청해야

정부는 여전히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다. 감사원도, 국회도 김씨 참사의 충격파를 수습하기도 전에 누가 더 책임이 큰가부터 따질 태세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골문이 자꾸 뚫리는데, 경기 중인 수비수를 모조리 불러들여 잘잘못을 따지겠다는 셈이다.

시스템 구축의 첫 출발은 기관간 유기적인 상호 협조 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AP통신 기자처럼 중요한 정보를 가진 이들이 전화를 걸어 문의할 수 있도록 국정원 대테러센터 같은 기관이 정비되어야 하지 않을까.

시스템 구축 작업에는, 미국 정보 당국에 더 밀접한 공조 체제를 요청하는 것 또한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테러 방지의 기본은 ‘국제 공조’이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한국에 위험 부담이 큰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이라크 현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한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정보 제공에는 인색하다. 미국은 우선 이라크 상황과 이에 대한 미국의 장래 구상을 정확하고 솔직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는 또 노무현 정부가 국민을 대표해 미국에 최우선으로 물어보아야 할 사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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