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받는 아줌마여, 궐기하라!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9.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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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무례’ 등 부정적 이미지로 왜곡… 정체성 되찾기 ‘조용한 아우성’
다시 ‘아줌마론’이 일고 있다. 왜? 몇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우선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아줌마전〉(3월13일∼4월25일)이 일등 공신. 이 사진 전시회는 아줌마는 물론이고, 아줌마가 아닌 이들에게 아줌마 이야기를 풀어놓게 했다. 한 여성 운동가 그룹이 이끌고 있는 ‘아줌마 내공 프로그램’이라는, 아저씨들이 보기에는‘불온한’ 교육도 알음알음 아줌마들의 생활을 파고들어가 그들을 뒤집어놓기 시작했다.

또 한가지. ‘아줌마 씹기’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대학생들이 인터넷에 사상 최초로 아줌마 토론방(연세대 가상 대학의 가족 사회학 강의)을 개설한 ‘이변’도 일어났다. 이 토론방을 개설하는 데 앞장선 이는 조한혜정 교수(연세대·사회학). 그는 지금 ‘아줌마 제대로 보기’를 열심히 ‘강요’하고 있는 중이다. 이외에도 요즘 통신 공간에서는 97년에 이어 아줌마 논쟁 제2 라운드가 벌어지고 있다. 도대체 아줌마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리 야단법석일까. 도대체 한국 사회는 아줌마라는 집단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먼저 노래 하나를 들어보자. ‘우리나라 아줌마 세상에서 젤 빨라. 칼 루이스, 벤 존슨도 따라오다 지치죠. 옆에 생긴 빈 자리에 않으려고 어디선가 느닷없이 번개처럼 날아와 그 큰 궁뎅이… 두꺼운 얼굴 체면 양심 소용없다(DJ.DOC가 부른 <서울 트레인>)’. 하나 더, 소화제 광고를 보자. ‘여러분 친구가 낸다고 해서 평소보다 3인분 더 먹었어요. 치마 허리가 튿어질 것 같아요’라고 한 여성이 말하자 그 음식점의 주방장은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참 무서운 아줌마들이야.’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아줌마는 뻔뻔스럽고 무례하며 탐욕스러운 존재로 그려진다.
기혼 여성 집단 매도하는 ‘아줌마’ 호칭

이뿐인가. 공공 장소에서 늘 큰소리로 떠들며 10원을 깎기 위해 쩨쩨한 일을 밥먹듯 하는 부류가 아줌마들이다. 아줌마는 우리 사회에서 수다·무례·탐욕·억척·무식·무능의 대명사인 것이다. 그래서 아줌마가 조금이라도 지적으로 보이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되면 ‘아줌마가 이런 일을…’ 하며 놀라워 한다. 매춘이나 도박 같은 반사회적 행위에 아줌마가 한 사람이라도 들어가면 언론은 ‘아줌마 매춘’‘아줌마 도박’이라며 아저씨의 그것에 비해 훨씬 큰 비중으로 다룬다. 하다못해 아줌마는 립스틱을 발라도 탈이 나고, 안 발라도 흉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나도 아줌마이지만 이런 아줌마는 싫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아줌마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최근 〈뉴 휴먼 丹〉이라는 잡지가 99명의 아줌마들에게 물어본 결과 △자리 다툼(31명) △퍼머 머리·쫄바지 같은 무신경한 외모(17명) △흐트러진 자세(16명) △큰 목소리(12명) △못말리는 허위 의식(9명) 같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현재 아줌마란 말에 얹혀 있는 온갖 부정적 인식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아줌마가 아주머니의 줄임말이 맞다면, 원래 아주머니는 부모와 같은 항렬의 여자나 항렬이 같은 남자의 아내 등 부인네를 높여 정답게 부르는 말이었다.

그런데 아주머니라는 정겨운 호칭이 언제부터인가 아줌마로 줄면서 기혼 여성들을 집단으로 매도하는 말로 심하게 변질되었다. 여성학 동호회에서 아줌마 제대로 보기를 ‘선동’하고 있는 오조영란씨(ID:해마부인, 캐나다 토론토 대학 과학사학 박사 과정)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의 아줌마 죽이기 풍조에 대해 그 원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여성을 차별하는 한국의 악명 높은 가부장적 문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집단적·위계적 사회 관습의 산물이다. 여성은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나이에 따라 계집애·노처녀·아줌마·할머니로 통칭되면서 늘 비하되고 억압당해 왔으며, 여기에 개인의 기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불감증이 겹쳐 빚어진 현상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아줌마로 부를까. 우선 아직 할머니 소리를 듣지 않는 기혼 여성을 아줌마 집단에 넣을 수 있다(직업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취업한 아줌마 역시 살림하며 아이 키우는 것이 본업이라고 하니까).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이 집단은 전체 인구(99년 추계)의 20.4%(9백56만명)를 차지한다. 여자 중에서는 41.1%(중년 남성은 41.7%). 물론 30∼50대에서도 미혼 여성이 있을 터이지만, 20대 가운데에서도 기혼 여성이 있으니까 한국 사회에 천만명 가까운 아줌마가 있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그런데 천만명에 육박하는 아줌마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되, 사회적으로는 여성이 아니다. 영화 〈코르셋〉은 유명한 대사를 하나 남겼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성이 있다. 남자, 여자, 그리고 아줌마.’ 아줌마는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을 갖지 못한 ‘제3의 성(性)’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인간의 성을 남성·여성·임신부로 분류했다. 그는 임신부는 자신과 다른 염색체(남성)를 배 안에 가지는 복잡한 존재라는 점에서 여성과 구별한 것인데,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아줌마는 일부 여성과 구별되는 존재이다. 대표적으로 아가씨들은 같은 여성인 아줌마를 싫어한다. △이른바 ‘줌마 빠마’라는 뽀끌뽀글한 퍼머넌트 머리 △얼룩덜룩하게 프린트된 웃옷과 ‘몸뻬 바지’ 혹은 ‘고무줄 치마’ △목 언저리에 반짝이는 가짜 장신구 따위 전형적인 아줌마 패션을 촌스럽다고 경멸하는 것이다.

이유는 더 있다. 아저씨들의 아내인 아줌마는 할머니 소리를 들을 만큼 늙지는 않았지만, 아가씨만큼 젊지도 않다. ‘젊지 않은 여자’ 아줌마는 성적 매력을 잃은 무성적 존재로 분류된다.

이러한 세간의 인식은 한 화장품 광고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남자가 여자에게 ‘야, 너 요즘 아줌마 소리 듣는다며?’하고 묻고 다시 한번 말한다. ‘아니라고? 탄력 있게 산다고?’

아줌마라는 말은 때로는 순결하지 않은 여자를 비하할 때도 쓰인다. 가령 영화 〈넘버3〉에서 배우 한석규는 “댁의 따님들 아줌마 만들어 팔아 버릴 테니 알아서 하세요”라고 협박한다.

‘존재의 이유’를 박탈당하는 아줌마들

아가씨들 사이에, 아니 젊은이들 사이에 아줌마 같다는 것은 천박·무능·무식·염치 없음·촌스러움을 뜻한다(최성욱·연세대 2년). 그러니 진짜 아줌마들도 아줌마를 싫어한다. 특히 젊은 아줌마들이 그렇다. 한 30대 초반의 기혼 여성은 “나도 아줌마다. 그러나 나는 남자들이나 젊은이들 사이에 통용되는 의미로서의 그런 아줌마로 불리거나 그렇게 되기는 정말 싫다”라고 말했다. 93년 미시족 바람이 불었을 때 아줌마이기를 거부하는 일부 진짜 아줌마들이 미니 스커트를 입고 처녀처럼 치장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물론 누가 무슨 말을 하건 아랑곳하지 않는 고참 아줌마들도 많다. 어찌 보면 이들은 정말 뻔뻔하고 탐욕스럽게 보인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박미라 편집장은 “어느 집단이나 사회에도 고유한 문화와 생존 방식이 있듯이 아줌마들에게도 그것이 있다. 우리 사회는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분당에서 여성학 강좌를 열 참인 구훈모씨는 가족에 헌신적인, 나아가 사회 변혁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사회 주부’들을 보노라면 아줌마라는 말에 담겨 있는 부정적 의미들은 대부분 정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은 곧 아줌마들이 ‘누구의 어머니’라는 사실에서 한층 설득력을 얻는다. 자기를 죽이고 가족을 위해 밥해 주고 빨래해 주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은 물론 사회가 안녕할 수 있다. 빠듯한 월급 봉투를 쪼개 살림을 하다 보면 설사 눈총을 받더라도 극성을 떨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줌마 이야기에는 남성들도 꾸벅 죽는 어머니가 끼어들 틈이 없다. 특정한 성과 연령과 계층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한국 특유의 사회적 존재인 아줌마에게는 어머니라는 호칭에 깔려 있는 그 끈끈하고 밝은 감정이 없는 것이다(문화 평론가 백지숙씨).

한국에서 어머니, 아니 아줌마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고통과 인내와 희생의 지겨운 학습 과정을 거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줌마들은 자신의 이름을 반납하고 누구의 아내와 엄마로 살아야 하며, 자기를 잊기 위해 반항하거나 분노하는 일 없이 자신을 거세해야 한다(차현숙 소설 〈분노의 강〉). 행복과 항복을 맞바꿀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줌마들은 이렇게 정신 없이 살다가도 아이들마저 더 이상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중년의 나이에 서면 대개 ‘빈 둥지’ 증후군이나 우울증을 경험한다.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살았지만 사회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조차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딸에게 자기처럼 살지 말고 안정된 직업을 가지라는 등의 자기 포기 선언을 하는 ‘늙은’ 아줌마들에 비해 그래도 젊은 아줌마들은 중년의 위기를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친다. 우선 영화·연극 등 문화 생활이나 종교 생활에 눈을 돌려 평정심을 찾으려고 애쓴다. 바늘 구멍처럼 어렵다고 하지만 취업을 준비하기 위해 문화 센터나 학원으로 무엇을 배우러 다니기도 한다. 이런 아줌마들의 수요로 이른바 ‘아줌마 산업’이 떴다는 얘기가 이미 오래 전에 나왔다.

그러나 아줌마들 앞에 놓인 현실의 벽은 너무 높다. 한 30대 중반 아줌마는 신문의 구인난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았지만 성별이나 연령 제한의 벽에 걸려 늘 주저앉았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 도처에 ‘여성 출입 금지 구역’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0대 후반인 한 아줌마는 “세상이라는 톱니바퀴 중에서 아주 작은 나사로라도 살아 보려고 기를 썼지만, 1년이 못가 나는 어디에도 끼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라고 토로했다. 그는 소외감과 자격지심에 심하게 위축된 채 다시 자신의 동굴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30대 여성 90% “성공하고 싶다”

이런 아줌마들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이른바 성공한 여자들의 이야기는 하등 도움이 안될 뿐만 아니라 더욱 자기 분열을 가속화시킨다. 물론 아줌마들도 성공을 꿈꾼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가 97년 서울과 경기 지역의 30대 여성 1백29명에게 성공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무려 90%가 성공하고 싶다고 답했다. 자아를 실현하고(32%), 명예와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때를 성공한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해지고(32%) 주위에 떳떳하고 싶어서(25%) 성공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육아(51%)와 여성 취업 제한(22%), 남편의 보수성이 성공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

평범한 아줌마들에게 조안 리·전여옥·최유라 등으로 상징되는 커리어 우먼의 성공담과, 정덕희·조양희·엄앵란 류 전업 주부의 화려한 변신을 담은 성공서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들 성공한 여자의 이야기에서는 여성으로서의 고민과 갈등을 담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최대 약점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성공하기에 어떤 현실적 걸름돌도 없었던 ‘특별한’ 여성들인 것이다. 이들은 남자들로서는 천사표 아내인 ‘돈도 잘 벌고 살림도 잘하는 현대판 슈퍼 우먼이 되라’고 아줌마들을 윽박지르고 있을 뿐이다(여성학자 박혜숙씨).

따라서 성공 신화에 기대기보다 ‘아줌마 내공 프로그램’ 같은 훈련 과정에서 자기의 미래를 모색해 보는 것이 훨씬 현명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는 이숙경씨는 “사실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평범한 아줌마들은 우선 자기 조건과 현실에 맞게 수위 조절을 해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이 프로그램 역시 우선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준비와 사회 관계망을 구축해야 할지를 돕는 훈련 과정이라는 것이다.

만약 한국 사회가 여전히 아줌마들을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가두어 놓는다면 잃는 것이 무엇일까. 호주제 폐지 운동을 벌이고 있는 고은광순씨(한의사)는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라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생명 존중 사상을 갖게 된다. 그것은 사회를 살리는 원초적 힘이 된다”라고 지적했다. 시인 김지하씨가 자신의 생명 사상을 실천할 주체로 아줌마를 꼽은 것은 그런 이유라는 것이다.

문화 평론가 김종엽씨는 아줌마에게 깃들인 힘의 승화가 가능하다는 실례를 성교육 전문가 구성애씨에게서 찾았다. 구씨는 자신의 전형적인 아줌마 신체에서 솟아나는 활달함과 자기 긍정의 아름다움으로 새로운 영역을 확실하게 개척했다.

사회의 저력으로 키워야 할 ‘아줌마의 힘’

아줌마의 힘을 끌어내려는 노력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두 가지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하나는 아줌마들의 못말리는 가족 이기주의. 내 새끼 내 남편 잘먹고 잘되게 하기 위한 일인데 무엇이 나쁘냐고 항변할 수 있지만 가령 생필품 사재기나 학교에 대한 치맛바람, 금품을 동반한 남편 승진운동 같은 행위는 종종 사회 질서와 정의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치닫게 한다. 물론 이런 지적이 억울한 아줌마들도 많다.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작은 공동체운동을 하면서 자기 가족이 아닌 또 다른 가족을 힘껏 도와 살맛 나는 세상으로 바꾸는 데 헌신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34~35쪽 기사 참조).

또 하나는 조직적 노력이다. 가족 이기주의를 극복해 사회를 살리는 모성을 발휘할 때 아줌마는 다른 이름으로 승화되지만, 오랫동안 집에 ‘갇혀’ 지낸 아줌마들에게는 그들을 유인할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여성운동가 오한숙희씨). 이미 많이 생겨나고는 있지만, 동네마다 뜻을 같이하는 아줌마 조직이 활성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종이꽃’이라는 통신 아이디(ID)를 가진 한 아줌마는 ‘억울한 일 안 당하려면 아줌마들이 뭉쳐야 한다.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 힘을 키워야 한다. 이젠 더 이상 아줌마라는 이유로 설움을 참지 말자. 더 이상 절대 자기 인생을 포기하지 말자’고 아줌마 인권 선언과 행동 강령을 선포했다.

‘아줌마가 뭐 어때서’라고 외치는 씩씩한 아줌마들이여. 총궐기하라. 아줌마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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