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 김 사건, 옛 안기부의 추악한 '안보 쇼'
  • 소종섭 기자 (kumkang@e-sisa.co.kr)
  • 승인 2001.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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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 김 사건' 날조, 옛 안기부 · 외무부 합작…
"국정원 역할 조정 계기 삼아야"
'수지 김 사건'은 1987년 1월,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가, 북한이 김옥분씨(당시 34세·일명 수지 김)를 이용해 김씨의 남편인 사업가 윤태식씨를 납치하려고 했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지난11월13일 서울지검 외사부가, 부인 김씨를 살해한 남편 윤씨의 자작극이었다며 윤씨를 구속함으로써 뒤늦게 진상이 밝혀졌다.




평범한 시민이던 김씨가 간첩으로 왜곡·조작된 이 사건에는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뿐만 아니라 외무부도 깊이 개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5공 정권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건이 발생한 1987년 1월 싱가포르 한국대사관에 근무했던 전직 외교 관리는 당시 이장춘 대사(명지대 초빙교수·전 외무부 대사)가 이 일 때문에 나중에 외무부 본부에 불려가 시말서를 썼다고 전했다. 이유는 본부의 지시를 어겼다는 것이다. 이대사가 수지 김 사건과 관련해 시말서를 썼다는 것은 당시 외무부도 안기부와 비슷한 태도를 취했음을 짐작케 한다.


당시 안기부는 이대사에게 싱가포르 대사관에서 윤씨의 기자회견을 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싱가포르 대사관측이 '윤씨가 횡설수설하고 있어 진실이 무엇인지 명확치 않다'고 끝까지 버티자 결국 안기부는 윤씨를 태국으로 데리고 가 기자회견을 했다.


그렇다면 당시 안기부는 왜 수지 김 사건을 은폐·조작한 것일까. 5공 말기인 1986년은 전두환 정권의 철권 통치에 금이 가기 시작한 해였다. 인천에서는 '5·3 사태'로 불리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10월에는 건국대에서 대학생 천여 명이 '전두환 정권 타도'를 외치며 농성을 한 '건대 사태'가 발생해, 날로 5공 정권에 대한 저항의 강도가 높아가고 있을 때였다. 게다가 국회에서는 당시 통일민주당 유성환 의원이 "반공은 국시가 아니다"라고 발언해 구속되는 등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7년 벽두에 터진 수지 김 사건은 정권측이 볼 때 국면을 전환할 수 있는 호재였다. 안기부가 1987년 1월 윤씨로부터 범행을 자백받고도 불문에 부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에 대해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일부러 속이려고 그런 것은 아니고 당시 상황에 휩쓸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5공 핵심 세력이 수사 라인 장악


당시 수지 김 사건을 다룬 안기부의 계선은 정주년 국장(전 국제협력단 총재)-이학봉 2차장(전 국회의원)-장세동 부장이었다. 이차장과 장부장이 하나회 출신으로 5공의 핵심 세력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정씨는 "출장을 갔다가 사후 보고를 받은 것 같기도 하지만 명확치 않다. 또 윤씨가 국내에 들어온 뒤부터는 해외 파트의 손을 떠났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11월15일 수지 김 사건의 진상과 책임 소재를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철저한 진상 규명과 함께 간첩으로 몰린 김옥분씨에 대한 명예 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일부에서는 국정원의 역할 재조정론도 불거지고 있다. 한 전직 외교 관리는 북한과 관련한 사안이 터질 경우 겉으로는 외교통상부가 나서지만 모든 것은 국정원이 통제하는 것이 관행이라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정원의 독주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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