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잘 만나…‘아버지’ 잘 만나
  • 신호철 (eco@sisapress.com)
  • 승인 2002.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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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갑부들의 두 갈래 ‘성공 조건’/IT 부자는 엔지니어가 주류, 재벌 2세는 MBA로 무장



자수성가 부자 1위 김택진. 40세 이하 부자 1위 이재용. 두 사람은 젊은 부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자라온 환경이나 경영 방식은 큰 차이가 난다. 두 사람은 자수성가형 부자와 승계형 부자의 서로 다른 삶을 대변하고 있다. 두 사람은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서울대를 같이 다녔지만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 김택진씨는 캠퍼스 오른쪽 끝 공대를 다녔고, 수업이 끝나면 동아리방에서 프로그램을 만들며 밤을 새웠다. 캠퍼스 왼쪽 끝 인문대를 다닌 이재용씨는 수업이 끝나면 학내 명문가 자녀 모임에 가거나 삼성 기업을 돌아보며 후계 수업을 받았다.


김택진은 엔지니어로 경력을 쌓은 ‘공돌이’출신이지만 이재용은 어릴 때부터 경영자 수업을 받은 경영학 석사(MBA) 출신이다. 김택진은 전자공학을 전공해 박사를 받았고 컴퓨터 마니아였다. 학창 시절부터 전자게시판(BBS)을 만드는 소문 난 프로그래머였는데, 학교 선배 이찬진과 함께 ‘아래아 한글’을 만든 4인 중 한 사람이었다. 이후 <한메타자>와 같은 소프트웨어를 제작하고 현대전자에서 일하며 <아미넷> 등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후 <리니지> 게임으로 유명한 엔씨소프트를 창립했다.



이재용은 학부 시절 동양사학을 전공했다. 이후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경영관리연구로 석사학위를 따고 미국 하버드 대학 비즈니스스쿨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외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인터넷 지주회사 e삼성을 이끌었으나 경영 성과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지금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일하고 있다.



두 사람의 이력은 ‘엔지니어’ 자수성가 부자와 ‘MBA’ 승계형 부자의 축소판이다. 변대규 사장(제어계측공학과 박사)이나 김도현 사장(전자공학), 이재웅 사장(전산학과)이 모두 이공 계열에 국내 대학 출신인 반면, 승계형은 유학파가 대부분이다.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아들 정의선씨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를 마쳤다. SK 최태원 회장도 학부는 물리학이지만 시카고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경영 방식·가치관도 대조적



자수성가형 부자와 승계형 부자는 문화 면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김택진 사장은 자유분방한 옷차림으로 유명하다. 기자들과 인터뷰할 때도 면바지나 트레이닝복을 연상시키는 편한 옷을 입고 나설 때가 많다. 현대전자에서 일할 때 반바지를 즐겨 입어 윗사람을 곤혹스럽게 했을 정도다. 반면 이재용 상무보는 세련된 말씨에 귀족적 풍모와 패션 감각, 몸에 밴 예의 범절을 지니고 있다. 김택진씨는 친구였던 정의정씨와 결혼했지만 이재용은 부모의 소개로 대상그룹 장녀 재령씨와 결혼했다.





엔지니어 자수성가형 최고경영자와 MBA 승계형 최고경영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능력이 뛰어나다고 쉽게 말하기는 힘들다. 기술이 중요한 벤처 기업에서 엔지니어 최고경영자가, 방대한 조직을 운영해야 하는 대기업에서 MBA 최고경영자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김택진씨는 엔씨소프트의 핵심 기술진 가운데 한 사람이다. 몇 명의 창업 동기가 있지만 아직도 엔씨소프트의 역량은 김택진씨의 역량과 오버랩되어 평가된다. 따라서 중요한 경영 판단을 참모에 의존하기보다 자기가 직접 내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삼성그룹 이재용씨는 정식으로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더라도 참모진과 연구그룹에 의존해 의사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 한 대기업 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승계형 최고경영자가 운영하는 회사의 경우 그의 역량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자수성가형이 다소 도전적이라면 승계형은 안정적인 경영을 지향하려는 경향도 있다. 한 자수성가형 최고경영자는 “자수성가형 부자들이 자신들의 욕망 실현에 목표를 둔다면, 승계형 부자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더 신경을 쓴다”라고 말했다.



김택진씨가 5년 동안 병역특례업체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허리 디스크로 군 면제를 받은 이재용씨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외국어 구사 능력과 국제 감각, 폭 넓은 인맥 네트워크를 갖추었다. 김택진씨가 ‘맨주먹’ 경험을 가졌고 약육강식의 시장에서 검증받았다는 장점이 있다면, 이재용씨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엘리트 교육을 받은 준비된 경영인이라는 강점이 있다. 지금까지 이 두 사람은 ‘시대’와 ‘아버지’를 잘 만난 행운을 누려 왔다. 누구의 재운이 더 오래가는지가 한국 사회 부의 흐름을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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