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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소 귀에 경을 읽지”

군 의문사 유가족 진상규명 요구 번번이 좌절…특별 조사기구 설치해야

정희상 기자 ㅣ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2.09.02(Mon)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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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군대 의문사 유가족(군가협)들이 대책 회의를 갖고 있다(왼쪽). 지난해 11월27일 의문의 총기 사망 시체로 발견된 강의택 하사 사건의 타살 정황을 설명하는 누나 강숙희씨(오른쪽).



'사필 귀정이다.” 4년 전 판문점에서 의문사한 김 훈 중위 부친 김 척 예비역 중장은 허원근 일병 타살과 군부대의 은폐 조작 진상이 밝혀진 것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뒤늦게야 진상이 드러난 허일병 사건을 접한 김장군의 심경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아들 김 훈 중위의 죽음을 계기로 1998년 말 군대 의문사에 대한 공론화가 이루어졌지만 재조사를 한 군 수사당국(특조단)은 1999년 4월 김 훈 중위 사건을 또다시 자살로 처리했다.


당시 특조단은 허원근 일병 사건도 다시 조사하는 시늉만 하고 말았다. 허일병 사건은 `‘민주화운동 관련 사건’으로 분류되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재조사를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타살로 밝혀졌다. 이를 계기로 희망의 한 자락을 보았다는 김 척 장군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시한을 연장해 초동 수사 때 자살로 처리한 모든 군대 내 의문사에 대한 진상 조사를 다시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허일병 사건의 진실이 18년 만에 드러난 것은 군에 자식을 보냈다가 주검으로 맞은 수많은 군대 의문사 장병의 유가족에게 한 줄기 단비이다.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군 수사기관의 일방적인 자살 통보를 믿지 못해 유족들이 생업마저 팽개치고 진상 규명 운동을 벌이는 군대 의문사 장병은 40여명(46~47쪽 표 참조)에 달한다. 천주교인권위원회 산하 ‘군폭력 희생자 유가족 협의회’(군가협·회장 김정숙)는 허원근 일병 사망의 진상이 밝혀지자 다시 힘을 얻었다.



김 훈 중위 사건 이후 4년째 힘겨운 싸움



이들은 김 훈 중위 사건이 터진 이후 벌써 4년째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소복을 입은 어머니들이 국방부 앞에서 메아리 없는 농성도 했다. 그 와중에도 군내 사망 사건 소식을 들으면 천릿길을 마다 않고 단체로 부대를 방문해 사건 축소와 은폐 기도를 막느라 몸싸움을 벌였다. 이미 이들에게 군에서 죽은 장병은 모두가 `내 자식'이 된 지 오래다.



“고위층들은 자식을 군대에 안 보내려고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선량한 백성들만 20년 고이 키운 자식을 군에 보냈더니 개죽음 만들어 돌려주며 나몰라라 하는 국가에 이중, 삼중으로 배신감을 느낀다.” 지난해 3월6일 육군 22사단에서 아들이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된 후 자살 통보를 받고 1년 반 동안 진상 규명에 매달리고 있는 고 주정욱 이병의 아버지 주종우씨는 이렇게 말한다.



주씨만이 아니라 군부대로부터 아들이 자살했다는 통보를 받은 대다수 유족은 군 당국의 문턱을 넘을 때부터 가슴에 못질을 당하기 시작했다고 호소한다.
사고가 나면 우선 해당 군부대 지휘관들부터 진상을 덮고 싶어한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문제가 부대 내부에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지휘관이 책임을 져야 하고, 이는 고스란히 진급 심사 등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특히 타살일 경우 지휘관은 치명적인 인사상 불이익을 당한다. 초동 수사기관인 군 헌병대가 일반 사회와 달리 부대 지휘관(사단장)의 지휘를 받는다는 점도 불신을 부르는 구조적인 요인이다.






군 의문사 유족에게 군대에서 사망한 병사는 모두 내 아들이다. 장병이 의문사한 공군부대 담장을 넘으며 항의하는 유족들.



3년 전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준 판문점 군기 문란과 김 훈 중위 의문사 사건을 계기로 국방부는 모든 군대 의문사를 재조사하겠다며 특조단을 결성했다. 그러나 김중위 사건을 다시 애써 자살로 몰아가려는 듯한 특조단의 수사 방식을 보고 대부분의 유족은 크게 실망했다. 이런 유족들의 불신에도 아랑곳없이 특조단은 일방적으로 재조사에 착수해 군 수사기관(헌병대)의 자살 결론을 굳혀 주었다. 군내 사망 사건 총 1백61건을 조사했다는 특조단은 지난해 10월 처음 수사 결과가 완전히 뒤집힌 사례는 없다고 발표했다. 다만 최초에 자살·병사·일반사로 처리했던 사건을 순직으로 조정해준 경우만 20건 있었을 뿐이다.



“군·수사기관이 하는 재조사는 믿을 수 없다”



가뜩이나 특조단을 불신하던 유족들이 재조사 결과를 수용할 리 만무했다. 이들 가운데 15명은 법원의 문을 두드렸다. 보훈처에 국가유공자 신청을 냈다가 거부당하자 행정 소송을 낸 것이다. 법원은 소송에서 속속 유족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특조단이 자살이라고 재차 확인한 공군 장승완 상병과 육군 엄흥룡 이병 사망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나머지 사건에 대한 재판도 현재 진행 중이다.



이런 실정이기 때문에 유족들이 국방부가 초동 수사기관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특조단을 설치하지 않았는지 의심하는 것도 지나친 일은 아니다. 그나마 지난해 하반기 이후 발생한 군대 내 의문사는 어떤 국가기관도 형식적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아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다.



지난해 11월27일 제5군단 145정보대대 벙커에서 의문의 총상 시체로 발견된 강의택 하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강하사 사망 사건은 여러 측면에서 김 훈 중위 의문사와 닮은꼴이다. 군 당국은 강하사가 진급 누락을 비관해 K2 소총을 들고 밀폐된 벙커에 들어가 자기의 이마에 대고 선 자세로 쏘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런 자세에다, 양손에 화약흔이 있는 점, 국내외 법의학자들이 외부 강타 결과라고 소견을 펴는 가슴의 상처 등은 철저히 외면했다.


강하사의 누나 강숙희씨는 지난 9개월간 독자적으로 조사한 타살 정황과 증거들을 들고 줄기차게 청와대와 국회의 문을 두드렸다. 결국 국회 국방위원회가 최근 국방부에 이 사건을 재조사하도록 요구하자 국방부는 마지 못해 오는 10월 재조사하겠다는 답을 보내왔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힘겨운 싸움을 벌여온 강숙희씨는 “지난 5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초청해 방한한 일본 법의학자 가미야마 박사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타살로 볼 수밖에 없는 여러 정황과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라고 전한다. 그러나 군 당국만이 재조사하는 이 사건 역시 진상이 밝혀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유족과 인권 단체들은 본다.



결국 군대 내 의문사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가 보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인물이나 기구가 객관적으로 재조사를 해야 한다. 허원근 이병 사망 사건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유가족은 물론 일반 국민까지도 군 수사당국이 주도하는 재조사는 믿지 못한다. 군대 내 의문사 유가족이 의문사진상규명위의 법개정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회 지도층 인사 자녀 병무 비리와 군대 의문사 축소 조작이 온국민적 이슈가 된 요즘 국방부 홈페이지 게시판은 ‘무얼 믿고 자식 군에 보내겠느냐’는 부모들의 아우성으로 가득차 있다. 군대 의문사에 대해 이번에도 어물쩍 넘어간다면 대규모 병역 거부 운동이 벌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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