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명절은 남자도 괴로워'
  • 박민규(소설가) ()
  • 승인 2003.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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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명절’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별 생각 없다는 사람은 남자, 괴롭다는 사람은 여자, 즐겁다는 사람은 아이. 동의가 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남자다. 물론 항변하는 이들도 있다. 내놓고 불평하지는 않지만남성의 괴로움도 만만치 않다는 것인데…. 최근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써 유명해진 신세대 소설가 박민규씨가 남성들의 감춰진 고충을 콩트로 표현했다.


호기야. 화장실 가고 싶지 않니?
아뇨. 지윤이는? 나도 괜찮아. 고개를 젓는 딸아이와 아들 녀석을 한 대씩 쥐어박고 싶었지만, 한번 더 다리를 꼬며 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래, 화장실 가고 싶으면 바로 아빠에게 말해야 한다, 알겠니?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버스는 대구와 구미의 중간 정도 되는 지점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한 시간째다.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물밀 듯이 밀려 있는 차량의 행렬, 그리고, 그리고 설사. 다리를 바꿔 꼬며, 나는 또다시 강렬한 웨이브에 휩싸인다. 전율한다. 아아.

설사의 조짐을 느낀 것은 북대구 톨게이트를 막 지나쳤을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거의 두 시간을 참았다고 봐도 좋다. 엉금엉금 기어온 차가 멈춰선 후로, 그러니까 세 번의 거대한 웨이브가 나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특히 두 번째 웨이브에선, 하마터면, 우우.

침을 삼키며, 나는 차창 너머의 풍경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러고 보니 엘빈 토플러라는 사람이 ‘제3의 물결’이란 책을 썼지, 아마? 그리고, 그래, 그 책을 읽었던 건 아내와 연애를 하던 무렵이었지, 아마? 그리고, 그래, 그래, 호기야. 정말 화장실 안 가도 괜찮니? 괜찮다니까 아빠, 왜 자꾸 그래? 괜찮다구? 그래, 그래, 오오.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키로 결심한 것은, 지난 설 때 귀향 길에서만 꼬박 23시간을 운전하고 나서였다. 23시간…. 나는, 차를 갓길에 세워두고, 펑크를 내고, 견인차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면, 그래, 해인사의 표지판을 보았을 때는 차를 세우고, 차와 가족을 내버린 채 곧장 절을 찾아가 중이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무, 관세음보살.

추석 때문에, 회사 일은 더욱 많았다. 추석 대목을 겨냥한 기획서에서, 거래처 키맨들에 대한 선물 발송까지 …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는 일주일을 보내고 나자, 어김없이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다. 잘 다녀오게. 본가가 서울, 하고도 명륜동인 사장이 부서를 방문해 일일이 악수를 하며 그렇게 말했고, 뒤따라 - 푹 쉬고 오게. 본가가 서울은 아니지만 교문리인 국장이 그렇게 말을 이었지만 하, 하, 하. 본가가 통영, 하고도 배를 타야 하는 나는 그 자리에서 사장과 국장의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록 기차는 놓쳤지만, 용케 표를 구한 고속버스에 올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내는 귀향의 스트레스로, 두 아이는 자가용이 아니란 이유로-옆자리에 앉아 불만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지난 일주일의 격무가 기차처럼 나를 깔아뭉개고 지나갔다. 한숨처럼, 나훈아의 ‘고향역’이 흘러나왔다. 코스모스 피어 있던 정든 고향역.

연휴 첫날을 고속도로에서, 추석 당일을 선산에서, 또 선산에서 돌아와 큰집으로, 다시 저녁이 되어 본가로, 우리 가족은 이동했다. 어머니는 내가 말랐다고, 아침을 못 먹어 그런 거 아니냐고, 아내가 들으란 듯 큰 소리로 곡을 했고, 달그락 달그락-아내는 여러 말 못할 이야기들을 설거지라는 행동거지로 표현했으며, 쿵쿵쿵쿵. 안방과 거실을 불안한 마음으로 오가는-말 그대로, 아침을 못 먹는 나는-89kg다. 아침을 못 먹어, 그 얼마나 다행이냔 말이다. 보름달아, 누구보다 둥근 너는 내 마음 알겠지? 달아, 밝은 달아. 그리고 밤새, 동생들과 사는 얘기, 정치권의 동향, 재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의 관리 문제, 유산 문제, 또 그 때문에 둘째와 약간의 마찰이 일고, 일었다가-자자, 형들 이거 좀 드시죠. 셋째가 권하는 소주와 닭백숙에 화를 풀고, 화해를 하고, 고도리를 치고, 간간이 송편을 집어먹고, 잠시 눈을 붙인 후 아침을 먹고, 어머니를 위해 두 그릇을 먹고, 오전 내내 여러 친척집을 순례하고, 남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친척 어른들로부터 미주알 고주알 온갖 소리를 다 듣고, 문중의 대소사에 대해 별별 얘기를 다 듣고,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요?

속으로 소리 치고, 어쩔 수 없이 돼지수육과 잡채, 밤과 떡, 전과 부침개, 나물과 생선, 부사와 배, 한과와 커피를 먹고, 다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어머니께 인사를 올리고, 조용필 좋아하시는 어머니께-그래서 이번에 열린 35주년 기념 공연 못 본 걸 세 번이나 얘기하는 어머니께-혹 내년에 36주년 기념 공연 하면 반드시 보여드릴 것을 약속하고, 또 한번 아이고, 어쩜 이리 말랐냐는 곡을 듣고, 손을 흔들고, 배를 타고 다시 통영으로, 다시 서울로 오기 위해 터미널로…. 오오. 누구라도 이쯤 되면 마를 수밖에…

그리고 그래, 그래, 그런 생각의 와중인데-드디어 백숙과, 송편과, 돼지수육과 잡채, 밤과 떡, 전과 부침개, 나물과 생선, 부사와 배, 한과와 커피, 그리고 점심이… 초대형 웨이브가… 숨이… 애들을 앞세우면 좋으련만, 말똥말똥한 애들 표정에 절망하고, 문득 얼굴을 마주친 아내에게 - 여보, 당신은 화장실 가고 싶지 않아? 라고 할 뻔했다가, 벌떡 일어나고, 땀을 잔뜩 흘리며 기사에게 걸어가고, 창백한 내 표정에 감 잡았다는 듯,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어주고, 승객 전원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며-끄응, 도로의 울타리를 넘고, 덤불이 우거진 한참 아래의 비탈 밑에 자리를 잡고, 주위를 살피며 몸을 숨긴 후, 나는 바지를 내렸다.

파. 언뜻, 탤런트 최불암의 웃음소리와 같은 어떤 소리를 나는 들었고, 전율했고, 어쩔 수 없이 목을 한번 뒤로 젖힌 후, 손수건을 찾아 이마의 땀을 닦고, 셔츠 주머니 속의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파. 가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높고, 공활했다.

그때였다. 버스가 움직인 것은. 그리고 제법 버스가 이동을 시작한 것은. 무척 큰일이란 표정으로 호기와 지윤이의 얼굴이 번갈아 차창을 기웃거렸지만, 나는 바지를 올리거나 담배를 비벼 끄지 않았다. 가면, 얼마나 가겠니. 천천히 마무리를 지은 후 조금 걷다 보면, 다시금 멈춰 선 버스를 만나게 되겠지. 눈앞에서 맴도는 한 쌍의 고추잠자리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이마를 식히며 지나갔다. 한 마리 고추잠자리처럼-외로운 작은 마음으로 하늘을 보면 흰 구름만 흘러가고, 그리고, 그리고 아뿔싸.
휴지가 없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아내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왜, 안 받는 거지? 리다이얼. 오오, 그러다 전화를 걸면 뭐하지? 라는 깨달음에 나는 직면하고, 느릿느릿 버스는 코너를 돌고 있었고, 그래서 두리번 두리번, 나도 모르게 나는-뭐랄까 절의 표지판이랄까, 그런 비슷한 것이라도 눈에 띄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가을 들판을 내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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