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왜 우익이 야단인가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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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이념·대중성 확보 못해…극렬한 행동·주장으로 세몰이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우익 단체의 집회와 시위가 부쩍 잦아졌다. 삼일절 집회, 6·25 기념 집회, 8·15 국민대회 등 올해 들어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대규모 우익 집회만 세 차례. 보수 기독교 단체의 집회까지 합하면 시청앞 집회만 다섯 번이다. 소규모 집회나 시위도 끊이지 않는다. 우익 단체 회원들의 주장도 날로 과격해지고 있다.

8월29일 서울 광화문 집회를 주도한 ‘반핵반김 자유통일국민대회 청년본부’대표 신해식씨(36·인터넷 <독립신문 designtimesp=12732> 대표), 청와대 앞에서 이틀 연속 인공기를 불태워 물의를 일으킨 이준호씨(32·민주참여네티즌연대 대표), 이씨와 함께 대구 유니버시아드 미디어센터 앞에서 ‘김정일이 죽어야 북한 동포가 산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기자회견을 하다가 북한 기자들과 마찰을 빚었던 박찬성씨(48·목사, 북핵저지시민연대 대표) 등이 현재 국내 우익 진영의 대표적인 행동가로 꼽힌다.

그리고 시스템사회운동본부 대표 지만원씨와 <월간 조선 designtimesp=12735> 발행인 조갑제씨가 우익 논객으로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들은 거의 매일 자기 홈페이지에 과격한 선동성 글을 올린다. 반북과 반김대중(반호남) 정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젊은이들의 투쟁을 선동하는 내용으로 일관한다는 점이 이들 글의 특징이다. 가령 지만원씨가 쓴 <이북과 호남, 나는 이래서 싫다 designtimesp=12736>는 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호전적인 북한 사람, 호전적인 좌익이 너무 싫다. 도대체 내게 왜 북한이 중요하며, 왜 북한인들 때문에 매일같이 피끓는 분노를 느껴야 한단 말인가? 북한의 악바리가 남한의 애국자를 때리고 욕하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누구 편을 들어 줄까? 대통령이 나를 미워할수록 나는 북한이 싫고, 95.2%의 표를 던져준 호남인이 싫어진다. 나는 통일이 정말 싫다. 남북은 각각 서로에 참견 말고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

지씨는 또 U대회 기간에 쓴 <북한이여 제발 지금 곧장 돌아가라 designtimesp=12741>는 글에서 ‘환호하는 남한 사람들을 보면, 다시 인민군 세상이 오면 저들이 바로 부자와 지식인과 애국 인사 들을 죽창으로 찌르고 다니겠구나 하는 섬뜩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서 북한 선수단을 환영하는 국민들을 위험한 친북 세력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조갑제씨는 U대회 기간에 자기 홈페이지에 군부 쿠데타를 선동하는 듯한 글을 올렸다가 ‘진보 단체’인 국민의힘 회원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다음은 <‘친북 비호’ 독재정권 타도는합헌>이라는 글에서 문제가 되었던 대목이다.

‘정권이 나서서 반역과 독재에 대한 국민의 합법적 대응의 길을 막으면 국민은 국가와 헌법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서 그런 정권을 반역 독재 정권으로 규정하고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다. 국민 속에는 물론 군인도 포함된다. 이런 저항권은 4·19처럼 물리력을 동원하더라도 합헌적이다.’

조씨는 또한 <나라의 원수를 보면 머리가 아프다 designtimesp=12747>라는 글에서 ‘원수들을 보면 머리가 아프고 미워하고 이를 갈고 복수를 다짐하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내일의 지도자가 나올 것이다’라며 진보 세력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침묵하는 다수’로만 존재하던 우익 세력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진보 세력이 사회 전반에 진출하면서부터다. 특히 문민 정부가 들어서고 개혁 세력이 각 분야에서 약진하면서 보수 세력들의 위기감도 커지기 시작했다. 이런 위기감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 김대중 정부의 등장이었다. 보수 세력은 주로 햇볕정책을 비난하며 정부와 정면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진보·보수 단체 간의 갈등도 격화해, 2001년에는 우익 단체 회원들이 평양 축전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학생들을 김포공항에서 구타한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어 김대중 정권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노무현 정권이 등장하자 보수 세력의 실망감도 극에 달했다. 출범도 하기 전에 좌파 정권이라는 비난을 퍼붓는가 하면(서청원 한나라당 대표), 일부 극단적인 우익 단체들은 대통령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우익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대형 집회를 통해 세몰이에 나서는 것도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현상이다. 하지만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약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재 국내 보수 세력의 이념 성향은 중도에서 극우까지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처럼 흩어져 있는 상황일수록 극렬한 행동과 주장을 펼치는 단체나 인사들이 눈에 잘 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보수 세력 내부에서도 일부 극우 단체의 주장과 행동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우익 단체의 중간 간부는 “대중성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청년 행동주의자들과 한총련의 극단적인 투쟁이 무엇이 다른가. 그들은 40대 후반인 나보다 사고가 더 경직되어 있다”라고 비판했다.

우익 집회에서 마주친 일본 <산케이 신분 designtimesp=12756> 서울 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 씨는 “정부가 인공기 소각을 문제 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라면서도 “스포츠 행사장에 나타나 인공기를 태우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라며 국내 우익 단체의 태도를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민족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선점하지 못한 우익은 전세계에 한국 우익뿐이다”라면서 국내 우익 세력이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를 나름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8월29일 광화문 집회장에는 광복 직후 좌우 대립 때 우익의 기수였으며 국내 보수 세력의 대부 격인 이철승씨의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그는 단상의 사회자가 “소석(素石;이철승씨의 아호) 선생님 올라와 주십시오”라며 애타게 부르는 것을 외면하고 자리를 떴다. 기자가 다음날 전화를 걸어 왜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이씨는 “대의는 공감하지만 너무 무질서했다”라고 말했다. 그런 자리에 얼굴을 내밀기가 꺼려졌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가 말을 이었다. “우익 운동은 개인적인 쇼맨십이나 영웅심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을 야단치자는 논의가 민족 진영에서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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