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시대 유물 조작극, 왜 일어났나
  • 채명석 ()
  • 승인 2000.11.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고고학자 유물 조작극 진상과 배경
일본의 역사 왜곡 체질을 보여주는 한 치부가 최근 드러나 일본 안팎으로부터 큰 화제와 비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에 70만 년 전 전기 구석기시대(12만년 전 이상)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세계적으로 주목되고 있었던 미야기(宮城)현 가미다카모리(上高森) 유적이 날조되었음이 지난 11월5일 <마이니치 신분>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이 신문은 구석기시대 유적 발굴에 혁혁한 공적을 올린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부이사장의 행적이 수상하다고 느껴 6개월 전부터 구석기취재반을 특별 편성해 유적 발굴 현장에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해 왔다.

<마이니치 신분>이 유적을 날조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한 것은 가미다카모리 유적 6차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던 지난 10월22일 새벽이었다. 가미다카모리 유적은 후지무라 부이사장 등이 1992년 발견한 것인데, 당시에는 13만년 이전의 구석기시대 유적이라고 발표했었다. 후지무라 팀이 도호쿠후쿠시(東北福祉) 대학 고고학연구회와 협력해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을 개시해 1995년에는 약 40만년 전 지층에서 형석기(形石器) 등을 발견했으며, 1998년에는 60만년 전 지층에서 석기를 발견해 큰 화제를 모은 유적이었다.

<마이니치 신분>은 조사단장을 맡고 있던 후지무라 부이사장이 이 날 새벽 어둠을 틈타 호주머니에서 꺼낸 돌을 유적 발굴 현장 여섯 군데에 매장하고 발로 밟는 모습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후지무라 부이사장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지난 10월27일 발굴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약 60만년 전에 원인(原人)이 살았다고 보이는 구멍과 석기를 규칙적으로 배열한 유적 11개, 그리고 70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을 포함한 석기 31점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마이니치 신분> 기자는, 후지무라 부이사장이 발견했다고 발표한 석기들을 살펴본 뒤 22일 새벽에 묻은 돌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마이니치 신분>은 이같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후지무라 부이사장에게 사실 관계를 직접 확인해, 지난 11월4일 일련의 석기 발견이 그의 자작극이었음을 알아냈다. 후지무라 부이사장의 자작극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날조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11월5일에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9월 홋카이도의 소신후도자카(總進不動板) 유적에서 발굴한 석기 29점도 전부 자신이 매장한 것이라고 실토했다.

후지무라는 유적 현장에 매장한 돌은 전부 자신이 개인적으로 수집해 소장한 것이라고 밝히고, 이 두 유적 이외에서는 돌을 미리 숨겨 놓은 사실이 없다고 극구 변명했다. 그러나 후지무라가 관계한 유적 발굴 현장이 지금까지 1백80 여 군데에 달하고 있어 날조 파문은 일본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예컨대 지난 1월 사이타마(埼玉) 현 치치부(秩父)에서 발견된 오가사카(小鹿板) 유적도 후지무라 부이사장이 발굴에 직접 참가한 곳이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서 발견한 석기 1점의 재질이 치치부 지방 것이 아니었다. 한 취재 기자가 이 점을 확인했더니 그는 “원인(原人)은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이타마 현은 오가사카 유적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유적 발굴 과정에서의 날조 행위를 집중 검증하기로 했다. 후지무라가 발굴에 관여했던 1백80여 유적지에서도 똑같이 재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유적을 날조해 수십만년 전 일본에도 구석기시대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고고학계의 스타로 떠올랐다가, 하루아침에 ‘더러운 손’으로 전락한 후지무라 부이사장은 어떤 인물인가.

<마이니치 신분>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센다이(仙臺) 시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전기 회사에 취직했다가 고대사 붐이 일어나자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했다. 1972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에 참가한 그는 1981년 미야기 현 자자라기 유적에서 당시의 최고 기록을 만년 이상 앞서는 약 4만6천 년 전 석기를 발견한 뒤 잇달아 최고 기록을 갱신하는 석기를 발견해 왔다. 그가 자자라기에서 발견한 석기는 일본에 전기 구석기시대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일본 고고학계의 오랜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공로로 1992년 민간 고고학 연구자에게 주어지는 아이자와 상을 첫 번째로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고, 유적 발굴 때마다 새로운 석기를 발견해 ‘석기 시대의 스타’ ‘신의 손을 갖고 있는 천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도호쿠 구석기문화연구소는 후지무라가 본격적으로 유적 발굴 조사 활동을 펼치기 위해 동료 3명과 함께 설립한 민간 단체이다. 올해 비영리 조직(NPO) 자격을 취득했지만, 항상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게다가 후지무라는 지난해 말 직장을 그만둔 이후 일정한 수입이 없었다.

이 때문에 후지무라 부이사장은 유적 발굴에서 실적을 올리지 못할 경우 지방자치단체나 관계 기관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강박 관념에 빠져 날조 사건을 일으켰다고 일본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개 민간 연구자인 후지무라의 발굴과 성과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일본 고고학계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전문가들에 따르면, 일본 열도는 화산재가 층층으로 겹친 산성 토양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수만년 전 이상의 뼈나 곡식 껍질은 물론, 토기나 나무 제품이 썩어서 남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전국의 50만여 유적 중 구석기시대 유적은 전체의 1%에 불과하다. 게다가 출토된 석기는 후기 구석기시대(1만∼3만 년 전)에 집중하고 있다. 중기(3만∼12만 년 전)나 전기(12만 년 전) 유물은 극히 미미하다. 따라서 1949년 군마(群馬) 현 이와주쿠(岩宿)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후에야 구석기시대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 발견이 있기 전에는 조몬 시대 이전까지 일본 열도에 인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이 때문에 현재도 구석기시대를 전공하는 연구자가 극히 적은 실정이다. 현재 일본고고학협회 회원은 약 2천3백명이나, 구석기시대를 전공하는 회원은 약 2백명에 불과하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후지무라의 날조 행위를 밝혀내지 못한 원인으로 학회 전체의 검증 과정이 허술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후지무라의 발견이 전혀 의심받지 않은 또 다른 이유로 석기가 출토된 지층이 모두 60만~70만 년 전이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석기는 출토된 지층과 석기의 형상으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게다가 일본 구석기시대 연구의 제1인자가 ‘지층은 형상에 우선한다’고 주장해 왔기 때문에 후지무라가 발견한 석기에 대해 인류학 등 고고학과 관련이 있는 다른 분야의 검증 없이 출토된 지층만으로 연대를 결정하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물론 석기 자체로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도 있다. 즉 석기 중에 포함된 방사선 양을 측정해 석기가 열을 받았던 시기를 추정해 전자스핀 공명법 등이 그 한 예이다. 그러나 석기에 불을 사용한 흔적이 있는 경우에 한해 이 방법을 이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불을 사용한 흔적이 인위적인 것인가, 화산의 분화에 의한 것인가는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방법은 측정 오차가 수십만 년이나 생길 수 있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전문가들은 후지무라가 이같은 연대 측정의 맹점을 잘 알고 자작극을 펼쳤다고 지적한다.

후지무라가 일본의 구석기시대를 10만년 전 단위로 끌어올리는 발견을 연이어 날조해 온 데는 세계 고고학계의 정설을 뒤엎는 ‘새로운 원인(原人)상’을 창조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예컨대 그는 가미다카모리의 약 60만년 전 지층에서 석기를 질서 있게 배열해 놓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 11개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또 올해 7월에는 치치부 나가오네(長尾根) 유적의 약 35만년 전 지층에서 타원형 굴을 발견하고, 석기가 부장품과 같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묘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고고학 상식에서 보면 1백80만년 전에서 25만년 전 사이에 지구에 존재했던 원인은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베이징 원인 등의 뼈는 발견되고 있으나, 묘는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가장 오래된 매장 흔적은 이라크의 샤니달 유적에서 발견된 것인데, 그곳에 매장되어 있었던 것은 네안데르탈인(13만 년 전∼ 3만 년 전)이었다. 만약 후지무라의 발견이 사실이었더라면 세계 고고학계의 정설을 뒤엎는 것이다.

원인은 또 추위가 심했던 곳에서는 살 수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때문에 북위 40°에서 발견된 베이징 원인이 최북단에 살고 있었던 원인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후지무라는 올해 6월 북위 43°인 홋카이도 시모비만니시(下美蔓西) 유적에서 베이징 원인과 비슷한 연대인 50만년 전 지층에서 석기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일본 열도에는 중국보다 훨씬 이전에 원인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부성은 이를 검증하지 않고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에 엉터리 사실이 실리는 것을 묵인했으며, 이에 따라 관련 문제가 대학 입시에 출제되기도 했다. 예컨대 한 출판사는 ‘베이징 원인과 같은 단계의 인류가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것은 약 50만년 전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도호쿠 지방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술했다.

일본의 선사시대를 무한정 부풀려 가려는 이런 작위적인 행태는 모리 총리의 ‘신의 나라’ 발언,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도 일맥 상통한다. 일본이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이런 식으로 왜곡해 간다면 인류와 문명의 발상지가 일본 열도였다고 주장하게 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