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울창한 숲으로 돌아가자
  • 글 朴晟濬 기자·사진 全瑛宇 교수 ()
  • 승인 1999.08.0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족 정서의 근원”…환경 넘어 ‘문화의 보고’로 다시 보아야
20여 년간 숲이 좋아 전국의 두메를 누빈 연극 평론가 안치운씨는 최근에 나온 그의 기행 수필집 〈옛길〉(학고재)에서 강원도 인제군 점봉산의 산골 마을 강선리를 찾았던 기억을 회상하며 이렇게 적었다. ‘강선리로 가는 길은 숲 속에 나 있는 오솔길이다. 그 길은 산으로 들어가는 나무와 풀로 된 시간의 동굴 같다. 숲 속의 길로 들어간다는 것은 인공의 삶을 포기하고 자연의 삶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숲으로 들어간다고 하지 말고 숲으로 돌아간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성철 스님이 입적하기 전에 남긴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오랫동안 숲을 아껴온 안치운씨 같은 사람들에게 성철 스님의 말은 다음과 같이 변주된다.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다.’ 더 나아가 이들에게 산은 숲이요, 나무요, 물이요 심지어 문명 또는 문화이다. ‘둘러보아야 할 관광지’가 아니라 ‘돌아가야 할 고향’이다.

왜 그런가. 이 문제는 먼저 숲이 산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서부터 해명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외국의 경우 평야에도 거대한 숲이 자리잡고 있다). 숲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보기에는 정서적이지만 이면에는 과학이 숨어 있다. 임학 전문가들은 한국의 숲이 산일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인 지리학적 특성과 농경 문화 전통에서 찾는다. 전영우 교수(국민대·산림자원학과)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 조상이 본격적으로 땅을 개간하기 전 한반도는 온대 활엽수가 극상림(숲이 성장하는 데 가장 안정을 이룬 상태)을 이룬 하나의 거대한 숲이었다.

당시에는 당연히 인구도 적었다. 3만∼만 년 전 한반도의 인구 밀도는 5㎢당 1명에 불과했으며, 만∼4천 년 전까지도 1㎢당 1명 정도에 그쳤다는 것이 전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추산이다. 바꾸어 말해 본격적인 농경 시대가 열리기 직전 한반도는 인구가 고작 22만 명이고, 산과 들이 한데 뒤섞인 거대한 전원이었던 셈이다. ‘태고의 신비’ 살아 있는 점봉산 숲

숲과 땅에 경계가 생기고 우리 숲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철기 시대 이후이다. 인구는 팽창을 거듭하고, 조상들은 먹고 살기 위해 숲을 개간했다. 농지와 주거지를 늘리기 위해, 땅심을 유지하기 위한 퇴비를 만들기 위해, 또 겨울철의 땔감을 확보하기 위해 평야 지대의 숲을 파괴했다. 그 바람에 숲은 산으로 쫓겨 올라갔다. 이것이 현재 한국인이 숲을 산과 동일시하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 가장 일반적인 추론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평야에 숲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로 들어오는 물길 주변에 조성했던 ‘수구막이 숲’이나, 최치원이 치수(治水)를 위해 조성한 것으로 잘 알려진 경남 함양의 숲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숲은 모두 국지적이고 인공적이어서 엄밀하게 따지면 천연의 평지 숲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전영우 교수의 설명이다. 전교수는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유럽처럼 평지에 우거진 숲을 삼림(森林)이라고 하고, 우리 숲을 산림(山林)이라고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라고 덧붙인다.

설악산 국립 공원을 비롯해 산을 중심으로 구획된 국립 공원들, 그리고 설악산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점봉산, 울릉도 선인봉의 원시림 따위는 한반도 중부 이남에 드문드문 남은, 최소한 수백 년간 천연 상태를 유지해온 숲으로 꼽힌다. 이 숲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사람이 접근하기 어렵거나, 굳이 힘들여 접근할 필요가 없었던 곳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천연생 전나무들이 주변 활엽수들과 함께 경쟁하면서 생태의 보고를 이루고 있는 강원도 인제군 점봉산 숲은 국내의 허다한 숲 가운데 ‘태고의 원시성을 가장 진하게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전문가들 사이에 통한다. 주된 근거는 점봉산이 신갈나무 군락 등 한반도 숲의 조상 격인 ‘온대 활엽수 극상림’을 오랫동안 자연 그대로 보존해 오고 있다는 점이다.

점봉산(더 정확히는 진동계곡) 숲의 가치는 전국의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연구 활동을 펴고 있는 서민환(환경부 국립환경연구원)·이유미(산림청 임업연구원) 부부의 감격 어린 목격담 한 구절에서 단박에 확인된다. ‘신갈나무는 가장 높은 곳에서 군락을 이루며 자라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지만, 이곳의 신갈나무처럼 오래되고 굵은 무리는 본 적이 없었다. 가슴 높이의 지름이 1m가 넘는, 그러니까 둘레로 치면 3m가 훨씬 더 되는 굵은 나무가 하늘을 가리며 자라고 있다. … 그 숲의 나무가 숲의 군집 이론에 대해 얼마만큼의 정보를 줄 수 있는지 따져보기 전에 벌써 이런 숲을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를 느꼈다’(〈숲으로 가는 길〉 현암사).

강원도 산골에 워낙 외따로 떨어져 있었던 덕분에 전문 산악인이나 자연 생태 연구자들을 빼고는 사람의 발길을 타지 않았던 점봉산이 자신의 신비한 자태를 세상에 드러낸 때는 90년대 초반. 이곳에 양수 발전소를 건설하려는 논의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굳어지던 무렵이었다. 수령 3백년이 넘는 전나무가 살고, 자작나무·거제수나무·신갈나무 잎사귀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인공의 이입(移入)’을 거부했던 이 숲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가장 은밀한 곳을 문명 앞에 ‘희생’으로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존재 가치를 온전하게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오대산 국립 공원 상원사 일대의 전나무 숲, 충남 태안군 안면도의 소나무 숲, 경북 울진군의 소광리 금강송 숲, 제주도 북제주군 평대리에서 약 5㎞ 떨어진 곳에 있는 비자나무 숲은, 비록 사람의 발길이나 손때를 타기는 했지만 그나마 천연림의 명맥을 이어 가고 있는 숲들이다. 반면 서울 한복판에 있는 창덕궁 후원(비원)이나 종묘 숲, 얼핏 천연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공 숲인 대관령 소나무 숲(20∼30년대 일제가 직파 조림했다고 함),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숲, 경기도 포천의 광릉 숲은 오랜 세월 사람이 매만지고 가꾼 숲들이다. 인공 숲 명단의 한켠에는 한때 방치되었다가 70년대 이후 20년 이상 계속된 보호 정책 덕분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찾아 가는 남산 숲도 있다.

오늘날의 숲은 나무와 꽃과 물과, 그 숲에 깃들어 사는 각종 동식물의 보금자리가 되어 줌으로써 빼어난 자연 경관을 제공할 뿐 아니라, 사람이 자연 경관을 즐기고 지친 생활에 활력을 얻는 휴식처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숲을 ‘언제 어떤 모습으로 찾아가도 포근하게 감싸 주는 어머니 품과도 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숲을 단지 자연을 즐기고 휴식을 얻는 공간으로만 파악하면 이는 ‘도대체 숲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10분의 1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70년대 산림 녹화 사업, 과소 평가하면 안된다”

물론 아름다운 숲에서 얻게 되는 심리적 만족감이 숲 체험의 편익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것은 사실이다. 구미의 전문가들 사이에는 각종 실험을 통해 이같은 편익의 과학적 근거를 입증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미국의 딤버그라는 심리학자는 90년대 초반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아름다운 숲 풍경을 담은 슬라이드 사진과 그렇지 못한 사진을 조사 대상자에게 보여주며 심장 박동을 조사했더니, 아름다운 사진을 본 사람들의 심장 박동 수가 증가했다는 내용이다. 80년대 초반 미국의 울리치라는 학자는 숲 환경이 인간의 뇌파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해, 사람들이 숲을 감상할 때 알파(α)파의 진폭이 두드러지게 커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산업화 시대가 도래한 이후 숲은 인간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뛰어난 담수 능력, 맑은 물 공급원, 산소 공급 능력 및 먼지 흡수를 통한 대기 정화 기능 따위가 입증되면서 숲의 생태적 기능이 주목되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 태생 자유 기고가 펠릭스 파투리의 저서 〈숲〉에 따르면, 1㏊(만㎡)의 숲이 거를 수 있는 먼지 양은 침엽수의 경우 연간 30∼35t, 활엽수는 연간 약 68t이다. 국내 임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근 펴낸 〈숲이 있는 학교〉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높이 25m짜리 너도밤나무 한 그루는 낮 동안 산소를 1.7㎏ 방출하는데, 이는 성인 3명의 하루 필요 산소량에 맞먹는 양이라는 것이다.

국내에서 산림 녹화 사업, 즉 숲 가꾸기 사업이 본격화한 때는 70년대로 알려진다. 생물학자이자 환경 분야 원로인 김준호 교수(서울대)의 최근 회고에 따르면, 당시 산림 녹화 사업은 순전히 일제 수탈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민둥산이 되거나 폐허로 변한 국토를 복구하는 차원에서 기획해 추진되었다. 산사태를 막고 홍수를 예방하는 일이 워낙 급해 꼼꼼하게 조림 계획을 세울 틈도 없이 척박한 땅에 쉽게 뿌리 내릴 수 있는 나무를 위주로 대규모 녹화 사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평지와 산지 어디에서나 잘 자라고 재질도 좋아 산림 녹화에 이바지한 현사시나무도 이같은 필요성에서 탄생한 나무이다. 이 나무는 56년 설립된 임목육종연구소 초대 소장 현신규 박사가 수원에 자생하는 사시나무와 외래종인 은백양을 교배한 잡종 나무로, 교배자 성을 따 ‘현사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당시 현소장 밑에서 공부한 김준호 교수는 오늘날 전국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아까시나무·물오리나무·사방오리·리기다소나무 따위가 모두 ‘쉽게 양묘할 수 있고 사태가 난 메마른 땅에서 자랄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집중적으로 심어졌다고 술회한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지난 30년간 전국에 심어진 나무(묘목)는 약 1백30억 그루. 국민 한 사람당 나무 3천 그루를 심은 셈이다. 문제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산림 녹화 사업의 성과를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전국 산재한 소나무 숲은 또 다른 ‘문화 유산’

지난 50년 사이 한국의 숲은 임목 축적량이 6배 늘어났다. 한국인들은 국토 면적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백50만㏊의 숲을 새로 얻게 되었다. 더욱이 새로 조성된 숲이 지니고 있는 환경적·공익적 가치가 연간 35조원을 헤아린다는 자랑스런 계산서도 얻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처럼 숲을 계량화한 수치로만 파악하거나, 금액으로 환산해 이해하려는 경향에 반대한다. 전영우 교수는 그의 책 〈숲과 한국 문화〉(수문출판사)에서 자기 입장을 확고하게 밝혔다. ‘숲이 있음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심리적 안정과 정신적 만족, 숲이 있음으로 해서 탄생되는 수많은 신화와 설화 그리고 숲에서 탄생된 문학·음악·미술 작품은 도저히 돈으로 환산하여 계량화할 수 없는 정신적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숲이 가진 직·간접 효용 가치와 더불어 문화적 효용 가치 또는 문화적 기능이라고 감히 부른다.’ 요컨대 전교수는 숲을 좀더 ‘문화적으로’ 바라보기를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숲 가운데 ‘문화 유산’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일까. 전문가들은 우선 전국에 산재한 소나무 숲을 지목한다. 조선 시대에 임금으로부터 벼슬까지 하사받은 속리산의 정이품송, 나무가 자리잡은 땅의 소유권을 나무 이름으로 등기해 세금을 내고 있는 경북 예천의 석송령,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 토종 소나무의 양대 거점으로 알려진 안면도의 소나무 숲과 경북 울진 소광리 금강송 숲에 이르기까지 소나무(또는 소나무 숲)는 나무 중에서 민족사(또는 민족 문화)와 가장 인연이 깊다.

소나무가 이처럼 한민족에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다시 철기 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농경 문화가 발달하면서 우리 숲의 ‘조상’이었던 온대 활엽수는 차츰 ‘주인’ 자리를 잃게 되었다. 소나무는 나쁜 토양 조건에서도 강한 생명력을 자랑할 뿐 아니라, 재질이 단단해 쓰임새도 좋았다. 소나무는 궁궐이나 가옥을 짓는 건축재로서는 물론, 자동차나 기차가 등장하기 전 가장 중요한 수송 수단이었던 배를 만드는 조선재로도 쓰였다. 당연히 역대 왕조는 소나무를 중시하게 되어 질 좋은 소나무 숲을 ‘금산(禁山)’ 또는 ‘봉산(封山)’으로 지정해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등 소나무 보호 정책을 펼쳤다. 조선 왕조 5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송목 금벌(松木禁伐)’ 제도는 이같은 소나무 보호 정책의 대표적인 예다. “숲은 꾸준히 학습해야 할 대상”

그러나 오늘날, 왕년에 ‘사사로운 벌채’가 금지될 정도로 대우받던 소나무들이 쭉쭉 곧게 뻗은 모습으로 자라는 숲을 만나보기는 쉽지 않다. 일제 시대를 통과하면서 질 좋은 소나무 숲이 엄청나게 수탈되어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의 추정에 따르면, 일제가 한반도 강점기에 수탈해 간 삼림 벌채량은 약 5억㎥. 전영우 교수에 따르면, 이같은 수치는 오늘날 국내에서 1년간 필요한 목재 총 수요량의 1.5배에 이르는 막대한 양이다.

안면도 소나무 숲과 울진 소광리 소나무 숲은 일제의 수탈을 용케 피하고 살아 남은 몇 안되는 토종 소나무 숲으로 꼽힌다. 한때 핵 폐기물 처리장 건설 문제로 홍역을 앓았던 안면도의 소나무 숲은 조선 시대에 ‘황장 봉산’으로 지정되어 왕실에 올려보낼 재목을 공급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황장봉산이란 황장목을 생산하는 곳을 이르는데, 황장목은 몸통 속 부분이 누런색을 띤 재질이 좋은 토종 소나무를 말한다. 한반도 서쪽에서는 보기 드물게 쭉쭉 뻗은 모습을 보이는 안면도 소나무 숲은 전국에 다섯 곳밖에 없는 소나무 유전자 보존림 가운데 하나로, 현재 체계적인 보호·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경북 울진 소광리 소나무 숲 역시 ‘우리 소나무 숲의 원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숲의 소나무는 금강소나무라고 불리는데, 과거 이 숲의 소나무 목재가 봉화 인근 춘양역에 모였다고 해서 춘양목으로도 불린다. 이들 소나무의 특징은 키가 유난히 크고 곧게 뻗는다는 것. 몇년 전 이 숲을 돌아본 임업연구원 이유미 박사는 “소나무 키가 20m 정도는 보통이고 35m에 달하는 것도 있다”라고 말했다. 소광리 소나무 숲은 안면도 소나무 숲과 마찬가지로 황장 봉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아 왔다.

오늘날 숲은 그것이 지닌 다양한 매력과 가치를 평가받으면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숲에는 생성과 소멸이 있고, 생명의 유전이 있으며, 자연의 법칙과 역사의 흔적이 있다. 숲은 전영우 교수가 자신의 저서 〈숲과 한국 문화〉 〈나무와 숲이 있었네〉에서 지적했듯이 ‘민족 정서의 근원이자, 문명 발달의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숲을 단순히 보기만 해서는 안되며, 학습하고 공부하며 최소한의 윤리 규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92년 발족한 이래 7년째 소리 나지 않게 숲 공부 활동을 벌이고 있는 ‘숲과 문화 연구회’가 대표적이다(79쪽 딸린 기사 참조).

숲을 사랑하고, 숲과 바르게 관계 맺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금과옥조처럼 따르는 경구가 있다. ‘문명 앞에는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 프랑스 혁명기 작가·언론인이었던 샤토 브리앙의 이 말에 기대어 상황을 짚어보자. 그나마 있는 숲도 ‘생존권’을 내세워 밀어 버리고, 역대 정부 정책 중 거의 유일하게 자랑할만했던 그린벨트 제도마저 ‘재산권 보장’이라는 명분으로 대폭 축소하고 있는 지금, 한국은 과연 문명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뒤를 향해 달리고 있는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