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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합리적 보수, 자갈길이냐 탄탄대로냐

‘통일 지도자’ ‘체제수호 지도자’ 사이에서 대권 전략 고심

김종민 기자 ㅣ 승인 2000.08.03(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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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최근 남북한의 3김씨로부터 비슷한 내용의 공격을 당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메시지라고 보아도 좋을 북한 평양방송 논평이 이총재를 ‘반통일 분자’로 몰았는가 하면,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이 차기 정권의 대북 정책을 우려하고 있다”라며 차기 경쟁의 선두 주자인 이총재를 겨냥했다. 그나마 위로를 기대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마저 “다음 대선에서 쉽지 않을 것이다”라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아 이총재의 기대를 저버렸다. 각각 얘기의 맥락은 다르지만 결국 요지는 이총재가 차기 지도자로서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16대 총선 이후 차기 대선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여 온 이총재로서는 남북한의 실력자들이 비슷한 시기에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 관계가 요동 치면서 그 여파가 차기 대선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최근 <시사저널>이 정치학자 1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59%가 다음 대선에서 통일 문제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응답했다(29쪽 여론조사 결과 참조). 과연 이총재는 차기 대선과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는 남북 문제에서 제대로 성적을 올리고 있는가.

지난 두 달여 동안 남북 문제와 관련해서 이총재가 보여준 노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합리적 보수’이다. 총론에서는 지지하되 각론에서는 보수주의에 뿌리를 두고 시비를 엄정하게 가린다는 것이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이총재는 남북 정상회담의 의미를 기본적으로는 인정하고 지지한다. 그러나 다들 들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균형을 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이러한 합리적 보수 노선을 통해 이총재는 차기 대권에 한 발짝 더 다가서고 있는 것일까. 반대로 3김씨가 지적한 대로 차기 대권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일까. 우선 이총재와 한나라당은 그동안 남북 문제에 대한 대응에서 ‘시(是)’를 인정하는 데는 인색한 반면 ‘비(非)’를 지적하는 데는 적극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에 대해 맹형규 기획위원장은 “아직 북한의 변화를 확신할 수 없고, 적지 않은 국민들이 조급한 대북 접근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기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도 적지 않다. 한 한반도 문제 전문가는 “정부·여당이 남북 관계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고 있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현실이 변화하는 속도에 비해 기대가 너무 앞서가고 있다”라고 우려하면서, 한나라당의 견제가 속도 조절기 역할을 하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번 <시사저널>의 여론조사에서도 조사에 응한 정치학자 가운데 66%가 정부·여당이 남북 문제를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차기 지도자 입장에서 생각해야”

그러나 이총재는 비판과 견제에 치중함으로써, 지난 총선 이후 ‘상생의 정치’를 외치며 야당 투사 이미지를 벗고 무게 있는 국가 지도자로 변신하려던 계획에 적지 않은 차질을 빚은 것도 사실이다. 한 정치학 교수는 이총재가 지난 6월9일 기자회견에서 납북자와 국군포로 송환, 탈북자 인권 개선, 핵과 미사일 폐기 등을 우선 협상하라고 요구한 것을 거론하며 “이총재의 주장대로 하면 북한과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이총재가 야당 총재로서가 아니라 차기 지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자신들의 대응이 발목 잡기로 비치는 것에 대해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소장 의원은 “이총재가 한두 번이라도 정상회담에 흔쾌하게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었다면 발목 잡기라는 비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정상회담에 정당 대표를 보내지 않은 것이나, DJ가 서울 공항에 도착했을 때 환영하러 나가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이총재가 DJ 대북 정책의 시비를 가리는 데 너무 집착해 시야를 넓히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통일 문제 전문가인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한반도 문제는 이미 국제 문제가 되고 있는 만큼 국제적 안목을 가지고 새로운 이슈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 한 예로, 현재 한반도 주변 정세에서 북·일 수교 문제가 가장 핵심적인 현안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총재가 북·일 수교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또 다른 평가 대상은 이총재의 보수 노선이다. 남북 관계가 크게 변화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보수 색채를 강하게 띠는 것이 이총재의 차기 대선 가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는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은 국가보안법 개정, 헌법 조항 개정 등 몇몇 사안에서 변화 지향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나 이총재는 일관해서 보수 기조를 유지해 왔다. 지난 6월 초 이총재 참모 가운데 일부는 한나라당이 정상회담에 너무 부정적이라는 비판 여론을 의식해 초당적 협력을 구체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한 적이 있다. 그러나 6월9일 이총재는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태도는 정직하지도 성실하지도 않았다”라며 여전히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6·25 50주년을 앞두고는 두 종류의 성명서 초안이 이총재에게 전달되었다. 그 중 하나는 ‘이번 6·25가 마지막 남은 냉전을 불식하는 역사적인 계기로 승화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의 ‘21세기형 성명서’였다. 그러나 그 초안은 논란 끝에 기각되었고 결국 ‘남북 정상회담 한 번에 50년 적을 통일의 상징인 양 찬양하는 냄비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과거를 잊으면 불행해진다’라는 ‘잊지 말자 6·25’ 식의 성명서가 채택되었다.

이러한 기조는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이총재와 한나라당 자체의 성향이 보수적인 데다가 남북특위 등 대북 정책을 논의하는 당내 기구의 인사들은 물론이고 이총재가 자문하는 외부 전문가 그룹이 보수 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당의 주요 지지층인 보수층을 대변해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도 이총재의 보수 노선을 뒷받침하고 있다. 맹형규 기획위원장은 “아직 우리 사회는 보수층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정상회담 이후 들뜬 분위기 때문에 얘기를 못하고 있을 뿐이다”라면서 한나라당이 이러한 층을 대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정치학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비전향 장기수 문제와 국군 포로·탈북자 문제를 연계해야 한다’ ‘자유 민주체제로의 통일을 분명히 해야 한다’라는 한나라당의 주장에 대해 각각 응답자의 62%, 67%가 공감을 나타냈다. 정치학 교수들이 대부분 40대 이상이고 대체로 보수 성향이 우세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나라당의 보수 노선이 적지 않은 공감을 얻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다른 주장도 나온다. 원래 한나라당의 지지 기반인 보수층은 결국 다음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지지할 것이기 때문에 대선 전략을 위해서는 중도적인 유동층을 끌어들이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당 지도부의 다수는 남북 정상회담 이후 기존 한나라당 지지층인 보수층마저도 충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 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전통적인 보수층과 이총재의 연결 고리를 더욱 다져 표의 응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층보다 유동층 끌어들어야”

이러한 한나라당의 계산은 최근 평양방송이 이총재에게 비난을 퍼부은 이후 더욱 힘을 얻었다. 양휘부 총재특보는 “그 사건을 계기로 북한과 우리 당의 전선이 더욱 뚜렷해져 불안해 하던 보수층이 우리 당으로 결집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한나라당 내에서는 그동안 이총재의 보수 노선에 반발하던 소장파 의원들이 이총재를 중심으로 확실하게 결속하기도 했다. 보수 노선을 대표하고 있는 김용갑 의원은 지난 7월12일 북한을 규탄하는 의원총회가 끝난 후 개혁파로 알려져 있는 김원웅 의원에게 “이제 당신만 남았어”라고 농담을 건넬 정도로 여유를 찾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이총재와 한나라당이 ‘보수 노선’의 승리에 대해 낙관하고 있지만 내심으로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그러한 낙관론이 앞으로 남북 관계가 지금과는 달리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에서 나온 것이어서 이러한 전망이 빗나간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특히 북·일 관계와 북·미 관계가 개선되어 수교 수준으로 발전하면 한반도와 동북아 상황은 근본적인 변화를 맞게 될 것이고, 한반도의 냉전 체제가 무너지는 상황도 예상할 수 있다. 이한구 한나라당 제2정책조정실장은 “북·미 수교가 핵심이다. 북한과 미국이 관계를 개선하게 되면 남북 관계는 탄력을 받을 것이고 커다란 변화가 올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이런 상황이 펼쳐지면 한나라당은 지금까지와 같은 보수 노선을 고집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총재로서는 변화를 선도하는 ‘비전의 지도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변화가 급한 ‘낡은 지도자’가 될 수도 있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총재가 앞으로는 보수 성향의 인사뿐만 아니라 소신 있고 진보적인 외부 전문가들의 조언도 들을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남북 문제를 차기 대선과 너무 깊게 연결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실제로 이번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은 통일 문제가 대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면서도 남북 관계가 진전될 경우 이총재가 대선에서 불리할 것이라고 보거나 이총재가 집권할 경우 남북 관계가 악화할 것이라고 본 응답자는 각각 30.0%, 24.0%에 그쳤다. 유승민 여의도연구소장은 “남북 문제가 정국을 주도하는 데는 큰 역할을 하겠지만 나중에 대선에서의 투표 행태는 역시 뿌리 깊은 지역 정서에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내다보았다. 그 근거로 정상회담 이후 자체 여론조사 결과,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와 남북 문제에 대한 여론의 흐름이 지역 별로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한나라당이 정상회담 후인 6월 21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호남에서는 정상회담으로 남북 관계가 개선되었다고 만족해 하는 의견이 58.3%, 혼란스러워하는 의견이 34.4%이었던 데 비해 영남에서는 만족 의견과 혼란 의견이 각각 33.1%, 59.2%로 나타나 대조를 보였다. 한나라당 자체 조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남북 문제를 보는 여론에 지역성이 얹히고 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사실일 것으로 보인다. “역시 선거는 지역 정서가 좌우”

지난 7월21일 한나라당 기획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DJ의 향후 정국 구상’을 정리하면서 한나라당의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일단 단기적으로는 답답하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남북 이산 가족 상봉, 북·일, 북·미 관계 개선, 김정일 답방 등 정부·여당에 유리한 일정이 이어져 있어 정국 주도권을 되찾기가 쉽지 않다는 분석이었다. 국정감사에서 정책 질의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자는 정도가 대응 방안으로 나온 얘기였다. 무리한 대여 공세를 통해 발목을 잡는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단기적으로는 묘안이 없는 셈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그리 비관적이지는 않다는 것이 한나라당의 인식이다. 북한은 자신들에게 당장 필요한 지원을 받으면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데탕트 기조가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조정 국면이 오면 한나라당의 노선과 역할이 돋보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남는 문제는 있다. 한나라당의 역할이 남북 관계 개선과 이미 역함수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대로 간다면 이총재로서는 2002년 민심이 ‘통일 시대의 지도자’를 택하기보다는 ‘체제 수호의 지도자’를 택하기를 기대해야 할 형편이다.

(jm@e-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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