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는 더이상 古都는 없다
  • 공주·부여·경주/成宇濟 기자 ()
  • 승인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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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부여·경주, 무차별 개발로 “연중 무휴 훼손”… 지방자치체 실시 이후 속수무책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부여는 2만7천여 명이 사는 작고 고즈넉한 고도(古都)이다. 해마다 백만에 가까운 외지인이 찾아드는 조용한 이곳에서 몇 개월 전부터 산을 깎는 소음이 시끄럽게 들리고 있다. 부여에 처음 들어서는 고층 아파트(10층 8개 동) 공사 현장의 소음인데, 금성산이라는 나지막한 산기슭에서 한창 터를 닦는 중이다.

내년 8월에 완공되는 이 아파트 단지는, 서울·공주·대전·논산에서 부여로 들어오는 초입에 들어선다. 그때가 되면 아파트 단지가 고도 부여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얼굴처럼 외지인을 가장 먼저 맞이하게 된다. 공사 현장 바로 곁에서 30년을 살아 왔다는 한 주민은 “군수가 뭘 보고 허가했는지 모르겠다. 산의 바위를 깨느라 다이너마이트까지 터뜨리는데, 산신령께서 날마다 우실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 아파트 단지는 부여라는 소도시에 작지 않은 충격을 주고 있다. 유물·유적이 나온 지역이 아니어서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부여 읍내에 처음 들어서는 고층 건물인 데다 ‘3층 넘는 건물을 지으면 안된다’며 고도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살아온 부여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저것 하나로 끝난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선례가 될까 봐 걱정이다. 부여는 그래도 덜 망가진 고도인데, 앞으로 주민들이 고층 건물을 짓겠다고 하면 반대할 명분이 없다”라고 서오선 국립부여박물관 관장은 말했다.

‘풍납토성 사태’ 날마다 벌어져

풍납토성 훼손이 ‘사태’로까지 불리며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면, 부여 같은 고도에서는 ‘풍납토성 사태’가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그 사태가 너무나 익숙한 일이어서 이제는 관심조차 끌지 못할 뿐이다.

한국에서 고도라 부를 만한 도시는 부여·공주·경주·서울이다. 고도의 면모를 이미 잃어버린 서울에 이어, 경주·공주는 서울을 급속하게 닮는 중이며 ‘마지막 보루’로 꼽히는 부여마저 금방 함락될 위기에 놓여 있다. ‘5천년 문화 민족’이라고 자랑하는 한국이 고도 하나 지니지 못한 ‘야만 민족’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지금 공주·경주 어디를 가든 고도의 풍광을 해치는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도시 개발도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경주에 이어 ‘여기도 끝났다’는 소리를 듣는 공주에서는, 거대한 빌라촌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빌라촌이 들어선 곳은 공주의 몇 안되는 유적 가운데 하나인 공산성(公山城) 바로 밑이다.

공산성은 64년 동안 왕도를 지켜온 백제를 대표하는 성곽이다. 새로 들어서는 5층짜리 빌라 4개 동은 공주 시내와 공산성을 완전히 갈라놓았다. 숲으로 둘러싸인 공산성은 공주 시내에서 볼 때 이제 빌라촌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빌라촌이 들어선다고 해도 법적으로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발굴 조사에서 유물이 나오지 않은 데다, 사적지 100m 내에 있다는 이유로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은 공주시를 상대해 건축 시행자가 소송을 벌여 이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주는 빌라가 들어서기 전에 이미 고도의 풍모를 잃어버렸다. 중심가에 7층짜리 빌딩이 여럿 솟아 있을 뿐 아니라, 언덕배기에서는 20층짜리 교동대우아파트가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1995년 5월 사업 승인을 받은 교동대우아파트는, 고도가 어떤 경로를 통해 파괴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굴삭기로 기초 공사를 할 때 바닥에서 유적이 드러났고, 유물이 흙속에 켜켜이 파묻혀 있었다. 푹 팬 땅을 보고 박물관 관계자들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돌이키지 못할 만큼 유적이 훼손된 뒤였다. 발굴 조사 없이 공사를 강행했다는 이유로 검찰이 수사에 나섰으나, 굴삭기 기사만 벌금 5백만원을 물고 풀려나왔다.

벽돌과 토기뿐 아니라 유적까지 나왔지만, 공사 시행자가 강하게 밀어붙인 결과 아파트는 흔들림 없이 올라갔다. 이제 공주에서는 건물 지을 돈만 있으면 30층이든 100층이든 초현대식 빌딩을 올릴 수 있다. 문화재보호법으로는 막을 도리가 없을 뿐 아니라, ‘고층’ ‘사적지 부근’도 가능하다는 선례가 생긴 탓이다.

경주는 수십·수백 년 역사의 부여·공주와 달리 천년을 유지한 한국 최고의 고도이다. 1970년대 초부터 밀어닥친 개발 열풍이 고도의 면모를 조금씩 바꾸어놓더니, 1980년대 말부터는 아파트 단지가, 요즘 들어서는 도로 확장과 신축이 경주를 망가뜨리고 있다.얼마 전 유네스코 조사단이 경주를 다녀간 이후 한국이 자랑하는 경주는 국제 사회에서 문화 유산 보존에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파괴의 속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여·공주도 엇비슷한 경우이지만, 지방 정부가 들어선 이후 경주 파괴에는 가속이 붙었다. 선거에서 많은 표를 얻으려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이 규제를 조금씩 완화하거나 시유지를 팔아 넘기고 있기 때문이다(부여의 군의원 선거에서는 ‘문화재보호법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후보도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경주 분지에서 동천(東川) 건너편은 거대한 아파트 숲으로 변했다. 그 아파트 숲은 경주 북쪽의 야트막한 소금강산을 가려버렸다. 가장 먼저 들어선 동천동 우방타운의 부지에서도 공방지로 추정되는 유물이 몇 가마나 쏟아졌으나, 발굴도 제대로 못한 채 쓸려버렸다.

아파트촌과는 별개로, 요즘 경주에서 진행되는 개발은 남산 기슭에 집짓기이다. 곧 4차선으로 확장될 경주-언양 국도 옆에 경주 남산은 동서 길이 8㎞에 걸쳐 누워 있는데, 그곳에서 건물 신축·개축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차츰차츰 들어서는 집들이, 크고 작은 절터 1백59개와 탑·불상·석등 같은 문화 유적 4백60여 점이 있어 그 자체로 박물관인 경주 남산을 마치 좀먹듯 파고드는 것이다.

고도 보존에 대한 경주시의 태도는 나날이 변해 가는 고도의 풍광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1998년에 빚어졌던 ‘선도산 병원 파문’은 자치단체의 의지가 어떠한가를 잘 보여준다. 선도산은 서울의 북악산처럼 작지만 경주를 경주답게 하는 아름다운 산이다. 대구의 어느 대학이 선도산 중턱에 7층 병원을 세우려고 선도산 중턱을 경주시로부터 사들였다. 설계가 끝나고 공사 장비가 들어가 터를 닦던 참에 반대 여론이 일어나자 문화재관리국이 이 터에 고분이 있다는 이유로 건립하지 못하게 했다.

대학이 소송을 제기했으나, 현장 답사를 나온 서울고등법원 판사들이 문화재관리국측에 승소 판결을 내렸다. 경주시가 자기 몸을 스스로 훼손하려는 것을 법원이라는 외부의 힘이 막아준 셈이다.

“이대로 두면 2~3년 안에 끝장난다”

거센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경주시 손곡동에서 준비 중인 경마장과 지난해 찬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섰던 황룡사지 전시관(두 곳 모두 건립을 전제로 한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다)은, 그래도 눈에 띄어 전국적 관심을 모은 대형 사건들이다. 한국고고학회·경실련 등이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거세게 반대해도 ‘관광객 유치’를 명분으로 내건 개발 논리는 요지부동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눈에 보이는 이같은 일보다 눈에 안보이는 크고 작은 일상적인 파괴이다. 비용을 모두 감당하면서 발굴 보고서가 나올 때까지 고통스럽게 기다려야 하는 시민 또는 공사 시행자가 ‘눈 한번 질끈 감고’ 유적·유물을 수십 년째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풍납토성 사태에서도 확인되었듯이, 이 문제는 시민이나 공사 시행자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직무 유기이다. 법을 지키면 회사는 반드시 부도가 나게 되어 있고, 개인은 시간과 돈을 소모하며 하염없이 고통스러워해야 한다. 유적 발굴·보존에 관한 책임과 고통을 당국이 뒷짐만 진 채 전적으로 국민 개개인에게 떠넘긴 꼴이다.

고도 보존은 기본이고 그 지역에 떠도는 전설까지 유형 문화재·문화 상품으로 만드는 문화 선진국에 비해, 한국은 고도 보존에 관한 한 후진국 중의 후진국이다. 서울 남산의 풍치를 살린다며 외인 아파트는 폭파하고, 고도의 풍치를 죽이는 아파트는 계속 세우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 강우방 관장은 “자치단체장 개인의 이득을 위해 일제 시대보다 더 강도 높게 민족 문화가 말살되고 있다. 이것은 총체적인 문제이다. 고도보존법을 만들고 대통령과 장관이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대로 가다간 부여·공주·경주는 2~3년 안에 완전히 끝장 난다”라고 말했다. 21세기 문화 강국을 지향하는 대한민국이 세계인의 웃음거리가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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