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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회담 열어 군축 선언하자

냉전 구조 혁파·평화 체제 마련이 ‘최고 방안’… 경제난·식량난 맞물려 논의 적기… ‘선 군비 축소, 후 신뢰 구축’ 필요

기자 ㅣ 승인 1999.05.06(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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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변화의 기운은 싹트고 있다. 군축과 평화를 주창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남한의 경제난과 북한의 식량난이 맞물린 지금 상황이야말로 군축을 논의할 최적기라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금기를 깨는 작업이기도 하다.

97년에 닥친 IMF 구제 금융 한파는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긴축과 구조 조정을 강요했다. 국방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가 지난해 건군 이후 처음으로 국방 예산을 감축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배경도 6·25 이후 최대의 경제 위기 상황 때문이었다. 물론 국방과 사회 복지의 상치(相馳) 현상에 대한 논의는 선진국에서도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온 문제이다. 국방비는 대표적 경직성 경비이면서도 유비무환의 ‘보험료’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총이냐 빵이냐’ 하는 선택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로 인식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국방 예산 삭감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어 온 풍토에서 올해 국방비 예산(13조7천4백90억원)을 전년 대비 0.4% 감축 편성한 것은 작지만 의미 있는 출발로 간주될 만하다.

“한국이 먼저 군사비 삭감 단행하라”

이같은 출발은 국내외에서 점점 더 커지고 있는 평화 군축을 요구하는 목소리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해 5월 잇달아 발표된 △경실련의 평화 군축 촉구 성명 △한반도 평화 군축을 촉구하는 2백인 선언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 여성의 날’ 기념 여성 3백인 선언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남북한의 끊임없는 군비 경쟁이 오늘날 북한의 식량난과 남한의 경제난을 초래했다고 진단하고, “평화 군축 실현으로 남한은 실업대책 기금과 사회복지 예산을 증액할 수 있으며 북한은 아사 상태의 식량난에서 탈출할 수 있다”라고 해법을 제시했다.

그뿐 아니다. 국제통화기금 캉드쉬 총재도 이미 군축을 경제 위기 극복의 해법으로 제시한 바 있고, 한국개발연구원(KDI)도 98년 4월 방위비 삭감을 주장했다. 또 국민 여론도 경제를 회생시키려면 국방비를 줄여야 한다는 쪽이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가 지난해 11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군축에 대한 여론은 찬성 59.1% 반대 36.9%로 나타나고 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나타난 뚜렷한 변화는 미국의 대외 정책에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는 학자들의 ‘개입’ 양상과, 한국이 먼저 군비 축소를 단행할 것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셀리그 해리슨(미국 우드로 윌슨 연구소 연구위원)은 지난해 1월 국내 언론에 기고한 ‘김대중 당선자에게’라는 제목의 글에서 올해 국방비를 줄이고, 북한이 밝힌 남북한 상호 병력 감축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실업 위기에 처한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중소기업 확충을 촉진할 방도가 없을 것이라며 병력 감축을 결단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대통령직의 성공적 완수 여부는 월가(街)의 금융 자본을 어떻게 상대하느냐 뿐 아니라 북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한국 내부의 남북 화해 반대 세력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충고했다.

해리슨에 이어 미국 의회 부설 평화연구소(PI)의 스캇 스나이더 박사 또한 미국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긴장 완화를 위해 한·미 양국이 먼저 군사력 후방 배치와 유엔사령부 해체를 단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 관심을 끌었다. 또 〈워싱턴 포스트〉 외교 전문기자로 활약했던 돈 오버도퍼는 지난해 3월 방한 강연회에서 “남북한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위해 한국이 먼저 군사비 삭감을 단행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해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는 한·미 양국이 견지해온 ‘선 신뢰 구축, 후 군비 축소’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나이더 박사는 그 이후 자신이 작성한 ‘한반도 정치·경제 변화:한반도 평화 구축에의 도전’이라는 보고서에서 미국 의회와 국제기구가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해 북한의 군축 비용을 지원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또 얼마 전에는 컬럼비아 대학 미첼 오한론 교수가 발표한 ‘한반도 재래식 무기 군축 방안’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위해 남북한은 군비를 각각 50% 줄이고 한·미·일 3국이 북한에 50억∼백억 달러 규모의 경제 지원을 하는 포괄적 협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의 ‘신뢰 구축 최면술’에 걸린 한국

탈냉전 이후 국내에서 가장 앞서 공개적으로 ‘선 군비 축소, 후 신뢰 구축’ 이론을 주창한 이는 지만원 박사(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 소장)이다. 상대방을 안심시킬 수 있는 이른바 ‘신뢰의 군사력’ 개념에 기초한 지박사의 군축론은 국방부에서는 ‘인기’가 없지만 민간 부문에서는 상당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지박사는 한국이 군축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를 한마디로 미국의 ‘신뢰 구축’논리에 최면당해온 데서 찾는다.

군축 반대론자들은 북한이 믿을 수 없는 집단이라는 점을 내세워 신뢰가 형성되어야 군축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박사에 따르면 이는 틀린 말이고 오히려 진실은 그 반대편이다. 군축이 먼저 이루어져야 신뢰가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선 신뢰 구축론은 88년 12월 고르바초프의 일방적 군축 선언에 의해 거짓으로 드러났고, 한반도에서도 94년 10월 미·북한 간의 제네바 협정 사례를 통해 거짓으로 판명 났다는 것이다. “군축 중에서도 가장 예민한 분야가 ‘핵 군축’인데, 신뢰가 군축의 전제 조건이라면 북한과 미국 사이에 언제 그만한 신뢰가 형성되었던가?” 지박사의 반문이다. ‘신뢰 구축론의 최면술’을 깨려는 지박사의 비판적 이론은 최근 학계의 실증적 군축 이론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이철기 교수(동국대·국제관계학)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군축을 논의하고 추진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대북 인식과 군축과 관련해 이미 고정 관념화한 4개의 도그마이다. 북한 붕괴 도그마·북한의 군사적 우위론 도그마·대남 무력 적화통일론 도그마·주한미군 도그마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도그마는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80년대부터 수행해온 ‘남북한 전쟁 능력 비교’ 연구 작업의 연장선에 있는 젊은 학자들의 실증적 연구에 의해 점점 깨어지는 추세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아시아사회과학연구원(원장 이장희 교수)이 주최한 ‘남북한 군사력 평가와 적정 군사력 수준’을 주제로 한 학술시민포럼은 눈길을 끈다(41쪽 상자 기사 참조).

함택영 교수(경남대·정치외교학)는 앞서의 도그마에 기초한 군사력 균형 이론이 얼마나 일관성이 없는지를 이렇게 지적한다.

“북한이 국내의 정치·경제 상황과 남북한 군사력 균형의 변화에 구애됨이 없이 수십 년간 꾸준히 무력 통일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 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런데도 남한의 군사력 증강은 항시 북측의 군비 증강에 대한 방어적 수단으로 합리화되어 왔다. 남침 위험 논리도 70년대에는 ‘힘의 균형’ 이론이 지배적이었으나, 이후에는 남북한간 국력 격차가 커지기 전에 남침할 것이라는 ‘예방 전쟁론’ 혹은 ‘힘의 전이’ 이론이 대두했다. 또 최근에는 ‘굶어죽느니 전쟁이나 하고 보자’는 북한 주민의 자포자기 심리를 들어 전쟁 위험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이론적 일관성을 결여한 것이다. 또 북한의 능력보다 의도만을 강조하는 논리는 현실주의 이론의 전제와도 상치된다.”

결국 앞서의 도그마들에 따르면, 북한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쟁을 벌이는 ‘전쟁 미치광이’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남침 위협설을 뒷받침해온 북한의 군사적 우위론과, 이제 더는 버틸 힘이 없기 때문에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이판새판 전쟁론’의 근거인 북한 붕괴 임박설은 그 도그마들이 서로 피할 수 없는 논리적 충돌을 일으키고 있음을 쉽게 보여준다. 이철기·함택영 교수의 남북한 국방비(투자비+운영 유지비) 누계 분석 등에 따르면, 오히려 북한은 더 이상 남한과 군비 경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더욱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군비 경쟁에서 더욱 처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므로 군사력의 열세가 더 확대되기 전에 군비 경쟁을 끝내야 할 처지이다. 결국 북한이 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군축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군축은 경제난 극복뿐만 아니라 남북 관계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철기 교수의 지적이다.

“남북한 군축 제안과 이의 실행말고는 현재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남북 관계에 돌파구를 마련하고 남북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대북 유인책이 뚜렷이 없는 실정이다. IMF 한파 속에서 남한이 처해 있는 경제 현실을 고려할 때, 대규모 경제 원조나 정부 차원의 대규모 식량 지원도 어렵다. 따라서 대북 유인책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바로 군축 제안이다. 또 군축 제안은 사문화해 있는 남북 기본합의서를 복원시키고, 한반도 문제 협상 구도의 중심축을 현재의 미·북한 축에서 남·북 축으로 바꿔놓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상호 군축 협상에 앞서 몇 가지 일방적인 군축 조처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는 상호 신뢰 분위기를 조성하고 상호 군축으로 나아가는 귀중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미·소 간의 지루한 협상에서 보듯 군축은 풀기 어려운 난제이다. 특히 일방적 군축 선언은 이른바 기득권층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 국민적 지지 여론을 업고 있는 금강산 관광에 대해서도 여전히 ‘북한에 돈을 주고 평화를 산다’고 비판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유지했던 북한 조기 붕괴론의 시각에서 벗어나 북한을 공존공영의 대상으로 삼아 변화로 이끌겠다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은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일본·중국으로부터 ‘가장 현실적인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북한이 지난 2월 초 고위급 정치회담을 올해 하반기에 갖자고 제의해 올 만큼 북한측으로부터도 상당 부분 신뢰를 얻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김대통령은 이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지난 1월 4일 국가안보회의에서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 문제를 거론하며 이것을 올해 한반도 정치의 화두로 삼겠다고 밝혔다. 집권 2년째인 올해부터는 한반도 냉전 해체를 위한 행보에 본격 나서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이어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은 2월10일 경실련 통일협회 초청 강연에서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를 위한 다섯 가지 해법을 제시해 김대통령의 구상을 뒷받침했다. 그 해법은 ①남북 적대 관계를 화해·협력 관계로 전환 ②미·북한, 북·일 관계 정상화 협조 ③북한과 외부 세계와의 협력 체제 형성 ④대량 살상 무기 제거 및 군비 통제 실현 ⑤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 등이다. 이 가운데 ①②③은 한국 정부의 전향적인 대북·외교 정책으로 실현될 수 있는 과제이고, ④⑤는 남북 대화 및 4자회담에서 해결할 수 있는 비교적 장기적인 과제이다.

8·15 남북 정상회담 추진?

이런 관점에서 새해 첫 국가안보회의에서 김대통령이 올해를 ‘한반도 문제 평화적 해결의 해’로 선언한 뒤에 진행된 임동원 수석의 미·일·중·러 4국 연쇄 방문은 한반도 냉전 구조 해체를 위한 다섯 가지 해법에 대한 협조를 구하기 위한 행보로 간주되고 있다. 김대통령이 3·1절 경축사에서 “한반도 분단에 책임 있는 강대국들이 한반도 평화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라고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는 처음 강대국 책임론을 공식 언급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치권과 학계에서는 올해 8·15 경축사에서 어떤 선언이 나올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나라당이 김대통령의 주한미군 지위 변경 발언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한나라당 통일정책특위는 이 발언 배경에 대해 김대통령이 올해 ‘8·15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목표로 남북 관계 정상화의 핵심인 군사·외교 관계를 급진전시키기 위해 깔아놓은 중요한 포석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같은 분석에 대해 청와대는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을 통한 군축 선언’은 한반도 냉전 구조를 평화 체제로 전환할 가장 바람직한 카드로 관측되고 있다. 협상보다는 국가 지도자들의 통치 철학과 결심에 의해 해결된 과거 미·소나 유럽의 재래식 군축 협상에서 보듯 정상회담을 통한 군축 실현은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해결 방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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