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개혁 “죽어야 산다”
  • 蘇成玟 기자 ()
  • 승인 2000.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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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금융 지주회사 방안 모색…“부실 은행 수명만 연장” 비판 쏟아져
올해 연속된 은행장 인사 파동을 통해 드러났듯이 그동안 정부는 ‘물밑’에서 지속적으로 은행권에 개혁 압력을 가해 왔다. 최근 금융 시장이 급속히 불안해지자 정부는 드디어 ‘금융 지주회사’라는 대안을 드러내며 16대 국회가 열리는 6월 안으로 관련 법안을 통과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금융 지주회사 방안은 공적 자금이 투입된 한빛·조흥·외환 은행을 지주회사 아래 한데 묶어 급속한 합병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실추한 신뢰도 회복하겠다는 전략이다.

문제는 지주회사 방안이 땅에 떨어진 금융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정부 발표가 나온 뒤 각계 의견을 타진했으나, 정부나 일부 부실 은행 임원들말고는 지주회사 방안 지지자를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반면 비판과 우려는 넘쳐난다.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장 김상조 교수(한성대·경영학)는 “금융 지주회사 방안은 정부가 위기를 관리하는 데만 매몰되어 원칙을 훼손하다 보니 나온 미봉책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지주회사안은 부실 은행들을 합병할 시간을 벌자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는 부실만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국책 연구소에서조차 회의적인 반응이 나오기는 마찬가지다. 한국금융연구원의 한 선임연구위원은 “답답하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구체적인 구조 조정 방식이 아니라 바른 개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현재 국내 부실 은행들의 경영 실상과 경쟁력 수준부터 국민에게 정확히 알린 뒤 근본적인 개혁 정책을 펴야 한다”라고 토로했다.

금융 지주회사는 원래 미국에서 시작된 제도이다. 가계 금융 전문 은행과 투자 전문 은행처럼 영업 분야가 다른 은행들을 한 회사 아래 묶어 상승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제도이다. 이는 업무 영역을 넓히려는 은행들이 주(state) 경계를 넘어 은행 영업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맥파든법’(1980년대 후반 폐지)을 피하려는 데서 출발했다.

미국의 대형 은행들이 지주회사 형태로 합병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추진해 온 데 비해, 이를 모방한 일본의 ‘미즈호 금융 그룹’은 현지 시장과 외국 투자자들로부터 실패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업 분야나 고객 기반이 비슷해 상승 효과가 발휘되기 힘든 데다, 부실한 은행들끼리 뭉쳐서 부실 규모만 키운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국금융노동조합 하익준 정책부장은 정부가 지주회사 방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대형화와 민영화 두 가지로 나누어 분석했다. 대형화를 추구해 명분을 얻으면서 훗날 이를 민영화해 투입된 공적 자금을 제대로 회수하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부실 은행들을 강제 합병할 경우에는 노조의 반발도 부담스럽지만, 공적 자금 역시 큰 손실을 피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은행 합병 30건…성공률 겨우 25%

그는 “대기업의 은행 겸업을 금지하고 있는 실정에서 지주회사를 민영화하려 해도 그 큰 기업을 누가 인수할 수 있겠는가. 대기업의 은행 겸업을 허용하겠다는 복안 없이는 불가능한 발상이다. 무엇보다 금융 산업의 판도를 바꿀 중요한 제도를 다양한 정책 토론 과정도 없이 정부의 소수 당국자들이 일방적으로 추진해도 되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물론 금융 지주회사 제도는 아직 확정된 방안이 아니다. 지주회사 추진안이 발표된 뒤인 5월24일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은 사석에서 “은행 구조 조정 방안을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검토하고 있는데 곧 경제 부처 조율을 거쳐 안을 확정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그가 말한 세 가지 방안이란 첫째, 금융 지주회사에 부실 은행(한빛·조흥·외환·평화 등)을 묶은 뒤 1∼2년 시간을 두고 합병하는 안이다. 둘째, 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그 은행들을 강제로 합병하는 안이다. 셋째, 배드 뱅크를 만들어 여기에 부실 채권을 모두 모으고 기존 은행은 클린 뱅크로 운영하는 안이다.

둘째나 셋째 방안은 정부가 당장 정치적인 부담을 안아서 그렇지 금융 전문가들은 적극 지지하는 것들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한국금융연구원 등 국책 연구소도 외압 때문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지 못할 뿐, 내부적으로는 둘째나 셋째 방안을 지지하는 실정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부실 채권을 털어내지 않으면 악순환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한 외국계 컨설팅 회사 임원은 “1998년 처음 은행을 수술할 때부터 확실히 공적 자금을 투입해 클린 뱅크를 만들었어야 한다. 어중간하게 만들어 놓고 경영만 잘 하라고 하니 아무리 열심히 해도 수익을 내기 힘든 은행이 많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부실 은행은 어떤 식으로든 정리해야 하지만, 우량 은행들까지 반강제로 ‘합병’하도록 몰아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물론 금융업에도 ‘규모의 경제’가 중요하다. 하지만 상승 효과보다 합병에 따른 부담이 더 클 경우 역효과가 날 가능성도 크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최근 독일의 금융 전문 월간지 〈디 방크〉는 1997년 이전에 전세계적으로 추진된 주요 은행간 합병 사례 30건 가운데 성공적인 경우는 2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1998년 이후에 성사된 합병 20건도 주식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패 원인은 합병이 정치적인 고려에 따라 추진된 나머지 효율적인 고객 관리나 새로운 경영 전략 수립 등 중요한 목표를 등한시한 데 있다고 〈디 방크〉는 풀이했다.

정부가 합병의 당위성을 역설할 때마다 주요한 근거로 제시하는 ‘점포 난립’도 인구 생산성에 따른 은행 점포 수 통계를 보면 큰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도표 참조). 최근 국내 시중 은행에서 외국계 은행으로 옮긴 한 간부 직원은 “금융 전문가가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대형화만 추진한다고 갑자기 국제적인 경쟁력이 생기는가”라고 반문했다.

은행 관계자들에 따르면, 현재 합병할 경우 상승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은 영업 분야와 고객 기반이 큰 차이를 보이면서도 기업 문화는 비슷한 하나은행과 한미은행 정도이다. 하나는 개인, 한미는 기업 영업에 강점을 보이며, 하나는 충청권, 한미는 수도권 지역에 점포가 밀집해 있다. 나머지 은행들은 어떤 조합으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다.

최소한 금융 지주회사 방안만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 당장 합병으로 덩지를 키우는 것보다 클린 뱅크부터 조성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정부의 결단이다. 또다시 은행 개혁에 ‘정치적 결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면 한국 금융 시장은 수렁을 헤쳐나오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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