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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어선 ‘필승의 전사’

6월 항쟁 세대, 총파업의 핵심 ‘넥타이 부대’로 전면 부상… 각계 각층의 튼실한 ‘허리’ 역할

김은남 기자 ㅣ ken@sisapress.com | 승인 1997.01.30(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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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넥타이 부대, 비폭력, 범국민적 저항과 지지. 많은 사람이 이번 총파업 정국을 지켜보며 87년 6월 항쟁을 떠올렸던 것은 이같은 키워드들 때문이었다. 유사한 상황 전개. 그러나 총파업 ‘주력군’ 넥타이 부대는 변모했다. 사회적 존재 기반은 여전하되 세대가 바뀌었다. 10년 전 학생 신분으로 반팔 셔츠에 운동화를 신고 시위를 이끌었던 이들이 이제 넥타이 부대의 주요 구성원으로 성장한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는 결국 이길 것이라는 낙관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이번 총파업에 사무직·전문직 노동자가 적극 참여하게 된 데는 이같은 배경도 한몫 했을 것이다.” 87년 6월 항쟁 때 서강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이현종씨(<문화일보> 정치부 기자)는 이렇게 분석했다. 그가 말한 ‘낙관’이 6월 항쟁의 위대한 승리에서 비롯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총파업 계기로 ‘6·10세대 정체성’ 찾기

대학 학번으로 치면 대략 83∼87학번, 이제 막 30대 초·중반에 접어든 나이. ‘6월 항쟁 세대’ 또는 ‘6·10세대’, 운동권식 구분을 따르자면 ‘전대협 세대’라고도 불리는 이들이 새롭게 기지개를 켜고 있다. 무엇보다 올해가 6월 항쟁 10주년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지만, 이번 총파업 사태를 계기로 6·10세대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숫자로 세대를 구분하는 일에 익숙한 한국 현대사에서 이들이 ‘4·19세대’‘6·3세대’처럼 독자적인 지형을 구축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이전 세대, 가까이는 80년대 초반 대학을 다닌 세대와도 구분되는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이들은 기성 사회가 붙여준 ‘모래시계 세대’라는 별칭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가정과 생활 현장을 오가는 생활인이 되어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진 선배 세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어디서, 무슨 생각을 갖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나. 이들이 아직은 사회 주도층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나이임을 감안할 때 전체적인 구도를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다만 6월 항쟁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몇몇 사람을 통해 지난 10년 간의 궤적을 돌아보고 이들 세대의 특성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87년 6월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으로 학생운동을 이끈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6월 항쟁이 끝난 직후인 8월 ‘전대협’으로 조직을 확대·개편했다) 회장 이인영씨.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자 국문과 4학년이던 이씨가 ‘백만 청년 학도여’ 내지는 ‘4천만 국민 여러분’으로 연설을 시작할 때면 수만여 군중이 일제히 그를 주목하곤 했다. 경찰의 무자비한 최루탄 발사로 이한열군 장례식(7월9일)이 엉망진창으로 끝난 뒤 흥분한 시위대가 경찰 승용차를 불태우려 할 때 “불을 질러서는 안될 이유 다섯 가지를 설명드리겠다”라며 노상 토론회를 이끌던 그의 모습은 국민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는 지금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정치국 부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6월 항쟁이 남긴 재야의 가장 큰 자산이랄 수 있는 전국연합에는 전농·전교조·한총련 등 23개 단체가 소속해 있다. 이곳에서 그는 민족민주운동이 더욱 다양화·세분화해 성장하는 기쁨 못지 않게 쓰라린 좌절도 여러 차례 겪었다. 92년 대선과 96년 총선에서 재야가 잇달아 패배했고, 그 과정에서 노선을 달리했던 동료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는 ‘참사회’ 건설을 위해 민족민주운동이 담당해야 할 몫이 여전히 남아 있고, 또 자신은 그 길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중 운동을 주도했고, 전대협이라는 전국 규모의 학생 조직을 최초로 건설한, 역사적 청년 세대로서의 책임감이기도 하다.

93년 이씨가 초대 회장이 되어 결성한 전대협 동우회는 이같은 문제 의식의 소산이다. 조직 속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데 익숙한 6·10세대의 특성에 맞게 사회 속에서 개인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조직이다. 이인영씨의 뒤를 이어 88년 전대협 2기 의장을 맡았던 오영식씨(고려대 법학과 졸업)가 동우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우리만큼 대중의 지지와 사랑을 많이 받은 세대는 없었다”라고 말하는 오씨에게 6월 항쟁은 ‘혁명은 예기치 않은 데서 비롯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경이적인 드라마’로 남아 있다.

오씨가 기억하는 일화 하나. 6월 항쟁의 한복판인 6월18일께, 1주일째 이어진 가두 시위에 지친 오씨는 학교로 돌아와 스티로폴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새벽 4시쯤, 택시 운전사들이 몰려와 잠을 깨웠다. ‘우리 모두 싸우기로 결의했으니 고대생들은 빨리 나오라’는 것이었다. 교문 밖으로 나가 보니 택시들이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켠 채 정문 앞에서 안암동 로터리까지 1㎞가 넘는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결국 이 날 시위는 경찰이 다연발 최루탄을 난사해 여명도 채 밝기 전에 끝났지만 오씨는 민중의 분노가 모였을 때 얼마나 거대한 힘이 되는지 절절히 깨달았다고 한다.

이씨나 오씨처럼 아직 ‘운동판’ 또는 그 가까운 곳에 몸을 담고 있는 6·10세대는 소수이다. 그것은 사회주의권 붕괴 등 시대 상황의 급변이 70,80년대 운동권 모두에 미친 영향이기도 하지만, 6·10세대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이들은 ‘운동’을 ‘거대 담론’이 아닌 ‘생활 속의 실천’으로 받아들인 첫 세대이기도 하다. 이전의 운동권이라면 대학을 졸업 혹은 중퇴한 뒤 생산직 노동 현장에 ‘투신’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6·10세대에도 이러한 흐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른바 ‘애국적 사회 진출 운동’ 등의 영향으로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공간에서 최대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43~44쪽 딸린 기사 참조).

6월 항쟁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서 ‘유연하고도 유머 넘치는 총학생회장’의 새 전형을 창출해 냈다고 평가되는 우상호씨. 그는 지금 다 쓰러져 가는 출판사를 하나 인수해 경영에 골몰하고 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처럼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강점을 적절하게 배합한 소장 필자를 발굴해 ‘전국민의 정신 교양을 한 단계 높여줄’ 인문과학 서적을 펴내는 것이 꿈이라는 우씨에게서 과거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앞서의 이현종씨는 ‘총학생회장을 하면서도 학교 수업을 빼먹지 않았던 독종’이다. 개량주의자라는 눈총을 받으면서도 기자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군에서 제대한 뒤, 태어나서 한번도 그렇게 열심히 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공부를 파고들었다는 이씨는 89년 졸업과 함께 그 어렵다는 ‘언론 고시’를 통과해 평화방송에 입사했다. 경찰·법조계를 거치고 정당 출입만 3년째인 이씨는 이제 정치인 눈빛만 봐도 돌아가는 판세를 대충 그릴 수 있는 8년차 기자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우상호씨나 이현종씨 모두 속내를 들여다보면 6·10세대로서의 가치와 지향이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6월 항쟁 당시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니던 꿈을 꾼다’는 우씨는, 출판사 경영 못지 않게 청년정보문화센터(대표 임종석) 운영에 애정을 쏟고 있다. 자주·민주·통일을 꿈꾸었던 80년대의 정신을 잃지 않고 90년대 정보화 사회를 주체적으로 열어 가고자 하는 청년 모임이다. 설립 1년 만에 6백명이 넘는 회원을 확보해 이같은 성격의 조직으로는 아마도 국내 최대 규모일 것이라고 자부하는 우씨는,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게 ‘대중이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며 생활인으로서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90년대식 운동 방식이라고 강조한다.시민사회의 건전성 뿌리 내릴 수 있는 세대

이현종씨는 평화방송에 입사한 지 1년 만에 해직되는 비운을 겪었다. 파업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해직 뒤 곧바로 <문화일보> 창간 팀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95년 이 신문 파업 사태 때 그는 다시 노조 대변인으로 회사측과 맞섰다. 먼저와 달리 처자식이 딸려 갈등도 많았지만 결국 ‘고민은 짧게 하고 몸으로 부딪치는’ 6·10세대 특유의 낙관으로 상황을 정면 돌파했다는 것이 이씨의 말이다.

이같은 낙관이 때로 자기 합리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는 비판도 있다. 95년 대우그룹의 운동권 특채 때 입사한 ㄱ씨는 “당장 운동 성격을 띤 조직을 만들고 거기 소속해 있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오히려 모든 것을 망칠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피나는 자기 수련을 게을리한 채 단기적인 자기 만족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상태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6·10세대의 정계 진출 방식이다. 6·10세대가 선거에 입후보한 것은 지난해 총선이 처음이었다. 민주당 공천을 받거나 전국연합 후보로 출마한 이가 대부분이었으나, 이들은 전원 당선에 실패했다. 반면 ‘3김 중심의 기성 정치권에 편입되는 한 우리 세대가 꿈꾸는 새 정치는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방식은 시민단체·지방자치단체에 광범위하게 진출해 대중과 공감대를 다진 다음 정계로 진출하는 것이다. 95년 지자제 선거 당시 ‘참여 자치를 위한 청년 캠프’가 자체 후보 60여 명을 당선시킨 것도 이같은 구상을 고무한 요인이다.88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유송화씨는 서울시 노원구 의원이라는 자기 ‘직업’에 큰 매력을 느낀다고 말한다. 지역 사회의 정책 결정에 곧바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원구에 사는 정신대 할머니들에게 생활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조례를 개정한 일을 가장 보람 있었던 기억으로 꼽는 유씨는, 지방 자치를 뿌리 내리기 위해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노력 하나하나가 6월 항쟁 정신을 진정으로 계승하는 일이라고 해석했다.

21세기 최대 쟁점이 될 환경 문제를 지역 주민이 주체적으로 풀어갈 수 있게끔 돕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차수철씨(환경운동연합 조직사업팀) 또한 유씨와 같은 선상에서 6월 항쟁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차씨는 전대협에서 활동했던 경력을 갖고 있다. 이밖에도 경실련·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에서 6·10세대는 든든한 허리 역할을 하고 있다. 시민운동의 뿌리 자체가 6월 항쟁에 닿아 있는 만큼 이는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6월 항쟁이 범계층적·범지역적 항쟁이었던 만큼 여기서 특정 세대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헌신적이고 선도적이며 조직적인 학생들의 투쟁이 6월 항쟁의 돌파구를 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중은 여기에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보냈다. 우상호씨는, 당시 학생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같은 신뢰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의식·무의식적인 삶의 규범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진영 교수(고려대·정치학)에 따르면, 6·10세대는 ‘탈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의 공고화로 가는 과도기에 시민 사회의 건전성을 뿌리 내릴 수 있는 세대’라는 특성을 갖는다. 한국 사회의 향방은 6·10세대가 그들의 ‘보답 의식’을 시민 사회의 건전성과 어떻게 연결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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