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보도는 앞자리 제재는 뒷자리
  • 런던·韓准曄 편집위원 ()
  • 승인 1996.12.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알리고 나서 혼난다” 전통 완고…정부 ‘황색 매체’ 규제에 골머리
서양에서 가장 먼저 언론·출판의 자유를 보장한 나라는 영국이다. 17세기 말 검열법을 폐지한 것을 계기로 판례나 학설 같은 보통법 형태로 보장하고 있다.

영국에서 개인의 명예 보호는 주로 민사 소송을 통해 다루어진다. 언론사가 명예훼손죄로 기소되는 경우, 보통법은 언론사에 준열한 책임을 묻는 대신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안전판을 마련하고 있다. 즉 피고인의 방어 무기인 항변권과 면책 사유를 최대한 확대 허용하는 것이다.

지난날 언론과 정부가 맞붙은 명예 훼손 사건에서 영국의 법관들은 신문과 잡지가 공공의 관심사를 논할 경우에는, 비록 피해자에 대한 사실 보도가 명예 훼손에 해당하더라도 언론사의 면책을 인정하고 있다. 사법부가 언론의 논평이나 사실 보도에 대해 면책 사유를 폭넓게 인정하는 것은 언론이 우월적 지위를 누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의 보통법과 관습법은 수백 년 전부터 명예 훼손이나 권리 침해에 대해 민·형사상의 처벌 규정을 마련해 왔다. 1776년 ‘치안 방해 및 명예 훼손·중상 처벌에 관한 법’이 제정된 이후 각종 관련 법을 제정해 왕실을 비판하는 자를 처벌하고, 타인의 명예와 개인의 사생활, 국가의 기밀과 안전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언론 및 출판업자에 대한 형사 처벌을 강화해 왔다.

그같은 법률은 사전·사후 검열 제도가 폐지되어 통제력이 약해진 왕실과 정부가 신문과 잡지의 비판·견제 기능을 약화시키기 위해 쳐놓은 법적 올가미였다. 따라서 언론 자유를 향한 영국 국민의 투쟁은 바로 형사상 명예훼손죄 구성의 범위를 좁히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법원도 왕실과 정부가 공익이나 공공 질서를 내세워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형사 책임 범위를 넓혀온 데 맞서 싸워 왔다. 이것은 모두 언론 자유를 신장하기 위한 값진 노력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최근 예가 90년의 <스파이 사냥꾼> 사건 판결이다. <스파이 사냥꾼>은 영국 비밀 정보 기구 MI5 요원 피터 라이트가 퇴직 후 호주에서 저술한 회고록이다. 내용은 나세르 전 이집트 대통령을 암살하는 데 연루된 70년대 MI5의 비밀 공작을 기록한 것이다. 영국 정부는 법원의 일시 중지 명령을 얻어내 영국에서 이 회고록이 출판되고 그 내용이 신문에 연재되는 것을 막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3년 간의 재판 결과 영국 정부는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영국 최고 법원이 정부에 보도 금지 명령을 철회하라고 결정한 것이다.

왕실·정치인 사생활 폭로에 법 대응 서둘러

국가 정보기관의 비밀 공작 활동이 사후에 일반에 공개된 것이 결코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다는 최고 법원의 판결이 나온 뒤, 보수당 정부는 비밀 정보를 개방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그동안 영국 언론은 정부의 정보 개방 추세와 함께, 검열 제도나 언론 규제법에 의해서도 간섭 받지 않고 무한대의 자유를 누려왔다. 그런데 지금 영국에서는 사생활 보호법 제정을 둘러싼 논의가 점차 구체화하고 있다. 구미 다른 나라가 이미 경험한 것을 영국은 이제야 뒤따라 가고 있다.

영국에서 사생활 보호 문제가 직접 제기된 것은 92년 이래 왕실 가족과 정치인의 사생활을 타블로이드 신문들이 경쟁적으로 폭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왕정 지지파와 보수파 정치인들은 황색 저널리즘을 규제하는 언론 규제법 제정을 서두르고 있다. 그렇지만 존 메이저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는 지난 3년 동안 이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재집권을 노리는 그로서는 언론과 필요 없이 마찰을 빚을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같은 속사정은 야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오는 5월 총선을 치를 때까지 사생활 보호법 제정 문제는 물밑으로 가라앉을 것으로 보인다.

총선이 끝난 뒤 정부가 국민 여론을 등에 업고 언론에 올가미를 씌우려고 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럴 경우에도 ‘먼저 보도하고 나중에 제재당한다’는 영국 언론의 오랜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신문사가 모여 있는 플리트가(街)의 후예들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신성한 사명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력자와 가진자들의 치부를 과감히 폭로하면서 부정·부패·허위와 권력 남용을 향해 짖어대는 감시견 구실을 다할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