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일본 연예계 ‘완전 정복’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r)
  • 승인 2004.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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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앞에 ‘전설·신화·황제·여왕’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일본 연예인 가운데 절반은 재일동포이다. 연예인 지망생의 2분의 1도 한국계이다. 일본 연예계가 ‘한국계의 바다’가 된 것이다. 일본 열도를 휩쓸고
일본의 한류 열풍이 거세다. 원 빈에서 출발한 한국 꽃미남 스타 열풍은 배용준을 거쳐 이제 비와 권상우에까지 닿아 있다. <서편제>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등 한국 영화에 ‘인이 박인’ 일본인들은 <스캔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의 개봉을 앞두고 가슴 설레고 있다. 보아를 보면서 한국 가수의 가능성을 확인한 일본 연예기획사들은 다른 한국 가수를 찾기 위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이제 한국 드라마는 공중파 방송은 물론 지역 방송이나 위성 방송에서도 특별 편성되고 있다. 잡지사들은 한국 연예인 관련 특집호를 다투어 내고 있다. 때아닌 한국어 열풍에 영어학원마다 한국어 특별반이 편성되고 있고, 서점에는 한국 연예인과 한국어 관련 서적 특별 코너가 마련되었다.

이같은 한류 열풍은 일본을 대중 문화의 종주국으로 여기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재일동포들에게는 일본인들이 한국 연예인을 좋아하는 현상이 새삼스럽지 않다. 이미 한국계 연예인들이 일본 연예계를 휘어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계 일본인들은 사실상 일본 연예계를 장악해 왔다. 단지 일본인들의 혐한 감정 때문에 재일동포임을 밝히지 못했을 뿐이다.

연예기획사, 근성 있는 재일동포 선호

한국계 일본인의 활약상은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다. 과연 얼마나 많은 한국계 연예인이 일본에서 활동할까? <시사저널>은 일본의 한류를 새로운 각도에서 규명하는 채널로 한국계 일본 연예인의 활약상을 알아 보았다.

교포 3세인 도쿠나가 겐지 씨(24·한국명 정현사)는 연예인 지망생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을 꾸려가는 프리터인 그는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연예기획사를 찾아간다.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다. 오디션을 볼 때마다 그가 빼먹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이 재일동포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재일동포라고 말하면 심사위원들이 ‘재일동포니까 끼도 있고 근성도 있겠구나’ 하고 선호하기 때문이다.

도쿄의 대표적 번화가인 신주쿠나 시부야의 클럽에서는 정씨처럼 연예인을 지망하는 재일동포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통해 실력을 기르며 스타 탄생을 준비한다. 정씨는 “재일동포 출신 연예인 지망생이 전체의 3분의 1 정도다. 귀화하거나 혼혈인 사람까지 합하면 거의 2분의 1에 이른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이 재일동포 출신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들이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재일동포 출신 연예인 중에는 정상에 오른 연예인이 적지 않다. <재일 한국인의 저력>을 쓴 전직 언론인 우에다 다카히코 씨는 일본 연예계가 ‘한국계의 바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블루스의 여왕’ 와다 아키코, 전후 최고 가수로 꼽히며 죽어서 전설이 된 미소라 히바리, 미소라 히바리와 쌍벽을 이루었던 미야코 하루미를 모두 한국계 연예인으로 꼽았다. 이밖에도 그는 엔카의 일인자 이쓰키 히로시를 비롯해 니시키노 아키라·사이조 히데키·조니 오쿠라가 한국계 연예인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에서 사는 르포 작가 유재순씨 역시 일본 대중음악계에서 재일동포의 입지가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랫동안 인기를 누리는 일본의 정상급 가수는 대부분 한국계라며 “NHK <홍백 가요전>은 한국계 없이 치를 수 없다. 한국계 연예인이 없으면 프로그램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영화계에도 한국계가 많이 진출해 있다. 등 일본 대중문화 소개 서적을 많이 쓴 이규형 감독은 일본의 전설적인 배우로 <블랙 레인>에 출연했던 마쓰다 유사쿠(작고)와 <철도원>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다카쿠라 켄이 한국계라고 주장했다.

영화계에서 한국계로 알려진 또 다른 인물은 영화배우 겸 감독으로서 쇼 프로그램 진행자와 개그맨으로도 활동하는 비토 다케시이다. 비토 다케시는 한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외할머니가 한국인이라며, 자신이 ‘4분의 1 한국인’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영화계에서는 이밖에도 마쓰자카 게이코·스기와라 분타·가네다 겐이치·이시다 히카리·미야시타 준코·구도 유키 등이 한국계로 알려져 있다. 백 룡이나 양석일씨 등은 진작부터 한국계임을 밝히고 활동하고 있다. 브라운관에서는 탤런트 겸 인기 모델인 이가와 하루카·야스다 나루미·시이나 깃베·니시키 나와키 등이 한국계로 알려져 있다.

아이돌 스타 중에서도 한국계 연예인이 많다. 전설적인 일본의 록그룹 엑스 저팬의 프로듀서 겸 드러머로 그룹의 리더 구실을 했던 요시키와 보컬 도시도 한국계로 알려졌다. 멤버 한명 한명이 모두 대형 스타로 성장하며 아이돌 스타의 전형으로 떠오른 그룹 스맵의 멤버로서 일본 여성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기무라 다쿠야 역시 한국계로 알려져 있다. 스맵 멤버였던 구사나기 쓰요시(한국명 초난강)는 한국 진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 연예계에 한국계가 많은 이유에 대해 교포 사회에서는 단순히 한국계의 외모가 뛰어나고 가창력이나 연기력이 좋아서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한 조총련 간부는 “직업 차별이 심한 일본에서 한국계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연예인이었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던 한국계가 그나마 살아 남을 수 있는 분야가 연예계였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인에게 차별받는 오키나와 출신인 아무로 나미에나 그룹 스피드 등이 대형 스타로 큰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계 연예인 중에는 유독 고학력자가 많다는 사실이다. 메이지 대학 출신인 다카쿠라 켄과 비토 다케시를 비롯해 한국계 일본 연예인 중에는 명문 대학 출신이 많다. 일본 대중 문화 연구가들은 학력 수준이 높은 한국계 연예인들이 연예계 오피니언 리더로 떠오르면서 일본 연예계에 지성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상자 기사 참조).
한국계 일본인은 또한 연예기획자나 프로듀서, 감독으로도 많이 활동하고 있다. 비토 다케시와 함께 일본 영화계에서 선두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최양일 감독은 ‘최양일 사단’이라고 불릴 만큼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음반계에서도 하마 게이스케 등 많은 한국계 작곡가들이 스타 제조기로 분투하고 있다. 이밖에 일본의 유력 극단으로 성장한 ‘신주쿠 양산박’의 김수진 대표나 연이어 히트 작품을 내고 있는 극작가 스카 고헤이도 한국계로 알려져 있다.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연예인은 대부분 자기가 한국계임을 밝히지 않는다. 일본인들의 이중성 때문이다. 일본에서 유학하는 위정훈씨(34·도쿄 대학 연구원)는 “일본인들은 어떤 연예인의 음악이나 연기를 좋아하다가도 그가 한국계로 밝혀지면 거부감을 갖는다. 자신의 스타가 일본인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연예인에게 재일동포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은 치명적일 수 있다. 한국 드라마 수입 업체인 코리아엔터테인먼트 성칠룡 대표는 “한국계임을 드러내는 것은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것만큼 연예인에게 부정적이었다. <소문의 진상>과 같은 월간지에서는 거의 매년, 한국계 연예인을 밝히는 특집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가와 하루카와 같은 탤런트는 한국계임을 밝혔다가 큰 파문이 일었고, NHK 아침 드라마 <봄이여 오라>에 출연하던 야스다 나루미는 한국계라는 이유로 중도 하차해 문제가 되었다.

어려운 여건에서 한국계임을 밝히고 민족 음악의 정체성까지 지키면서 연예 활동을 하는 한국계 연예인들도 있다. 사와 도모에·히로세 유고(박 보)·이정미와 그룹 산타의 리더 민영치가 바로 그들이다. 특히 사와 도모에는 대학로에서 콘서트까지 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런 가수들은 대부분 조총련과 관련되어 음악 활동을 하는데, 북·일 관계가 악화하면서 이들의 활동 반경 또한 좁아졌다.

1995년 TBS <레코드 대상> 시상식에서는 한국계 연예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TBS <레코드 대상>은 시청률이 30%를 넘는 인기 프로그램으로 NHK <홍백 가요전>과 함께 일본 가요계를 결산하는 프로그램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 날 심사위원들은 일본 대중음악계의 여신으로 떠오른 아무로 나미에를 제치고 한국계 귀화자인 아라이 에이치(한국명 박영일)에게 대상을 주었다.

심사위원들은 박씨에게 대상을 준 이유를 ‘일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어서’라고 설명했다. 아라이 에이치에게 대상을 안긴 곡은 <청하 아리랑>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일본으로 징용 온 길을 되짚어 가는 길에서 받은 느낌을 담은 곡이다. 심사위원들은 그가 일본 연예계에 경종을 울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 사회가 바뀌면서 신세대 가수들 중에는 데뷔할 때부터 자신이 재일동포임을 밝히는 경우가 늘고 있다. 테크노 음악 DJ 도와 데이(한국명 정동화), 그룹 엠 플로의 래퍼 버발, 댄스 가수 크리스탈 케이 등은 자신이 한국계임을 밝혔다. 이 외에 아이돌 스타 소님과 재즈 가수 가와무라 가스미(예명 ‘눈’)가 한국계임을 밝히고 활동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국계 연예인들은 뒤에서 조용히 한류의 우군이 되고 있다(상자 기사 참조).

일본에서 활동하는 재일동포 연예인에게 최근의 한류는 많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종사하는 김현근씨(31)는 “한국계 일본 연예인들은 아직 한류를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연예인에 대한 호감이 한국계 일본 연예인에 대한 호감으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씩 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재일동포 연예인 지망생 중에서는 고국을 기회의 땅으로 여기고 찾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류 스타가 되어 다시 일본 열도를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제이브엔터테인먼트 이영일 대표는 “쓰루오카 마이라는 일본 여고생이 연습생으로 들어와 있다. 제2의 보아가 되어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며 맹연습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서울문화예술전문학교에 다니는 도쿠나가 겐지 씨는 “재일동포라는 것이 싫어 부모에게 귀화하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반드시 한국에서 성공해 일본에 금의환향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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