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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주, 화합 주역으로 다시 선다

5·18 17주년 맞아 새 묘역 갖추 고 항쟁 정신 전국화·세계화 박차…“정치적 장애물 더는 없어야”

丁喜相 기자 ㅣ 승인 1997.05.22(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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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항쟁 17주년을 맞는 올해 5월 광주는 변화의 물결에 젖어들고 있다. 변화의 방향은 5·18의 전국화·세계화로 모아진다. 이런 모습은 우선 지난 17년간 5·18의 상징적 장소로 자리잡아온 망월동 5·18 묘역의 변모에서부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동안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은 외부에 ‘투쟁’과 ‘한’의 공간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찾는 사람도 주로 전국의 운동권 인사와 이 지역 주민이었다. 그러나 올 들어서 5·18 묘역은 더 이상 투쟁의 성지라는 과거의 옷만 입기를 고집하지 않았다. 외지인 관광객과 초중고교 수학여행단의 새로운 ‘여행 코스’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다.

헌혈·장기 기증 통해 ‘나눔정신’ 계승

때마침 5·18 묘역 성역화 사업에 따라 5·18 신묘역이 완공됨으로써 그동안 망월동 광주시립묘원 3묘역에 안치된 5·18 희생자들의 유해 이장 작업도 이루어졌다. 이장이 한창이던 5월6일 경북 번호판을 단 관광 버스 3대가 망월동 묘역에 도착했다. 제주도 관광을 가는 길에 누군가 5·18 묘역을 둘러보고 가자고 제안해 처음 와보았다는 김정배씨(56·경북 경산시)는 “별 생각 없이 따라나섰는데 막상 묘역을 둘러보니 그동안 말로만 듣던 것과 달리 아직도 5·18의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5·18 묘역이 새로 완공됨에 따라 구묘역에 있던 희생자들의 유해는 5월16일까지 신묘역으로 모두 이장된다. 총공사비 2백86억원을 들여 새로 조성한 5·18 묘역은 ‘민주 광장’ ‘참배 광장’ ‘유영 봉안소’ ‘추모탑’을 갖추고 산 역사 교육장 노릇을 하게 된다.

변화의 물결이 묘역에만 찾아든 것은 아니다. 광주시와 5·18 유관 단체를 중심으로 한 민간 차원에서는 17주년을 맞는 올해 5·18 기념식 및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올해는 행사 자체가 질적으로 바뀌었다. 지난 4월 말 국무회의에서 5·18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함으로써 올해 5·18 기념식은 사상 처음으로 정부가 주도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내무부가 주관하여 광주시에 위임한 5·18 기념식은 3부 요인을 포함해 국내외 2천여 초청 인사들이 참석해 치른다.
물론 5·18 기념 기간에 치러지는 행사는 민간단체들이 주로 진행하지만, 여기에서도 과거 투쟁 일색 행사로부터의 ‘탈색’이 두드러진다. ‘5·18 민중항쟁 17주년 행사위원회’(위원장 명노근 전남대 교수)는 올해 행사 기조를 ‘5·18 문제의 완전 해결 도모’ ‘5·18 정신의 역사적 의의 정립’ ‘5·18 항쟁의 세계적 연대 강화’에 두고 전국민과 세계 속에 친숙하게 파고들겠다는 목표를 잡고 있다.

광주 시민과 5월 단체들이 그동안 줄곧 촉구해온 것은 ‘광주문제 해결 5원칙’이었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명예 회복, 국가 배상, 광주 정신 계승 등이 그것이다. 이중에서 광주 정신 계승을 뺀 나머지 네 가지는 사건을 마무리하는 성격인데, 광주 시민은 이 문제가 대체로 가닥이 잡힌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5·18 정신 계승 쪽으로 초점을 이동한 것이 올해 행사의 특징이다.
5·18 정신을 계승하자는 기치로 광주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다양하다. 이들은 80년 5·18 당시 ‘나눔정신’ ‘대동정신’을 현재로 계승한다는 뜻에서 5월21일을 ‘헌혈의 날’로 제정해 시민들을 상대로 대규모 헌혈 운동을 전개한다는 방침이다. 5·18 항쟁 당시 총상 부상자들을 위해 너도나도 헌혈을 자원했던 광주 시민의 생명 존중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이다. 이 운동은 이미 5월 초부터 ‘5·18 민중항쟁 구속자회’와 광주·전남 적십자 혈액원이 공동 주관해 연일 수백 명씩 참여하고 있다. 더 나아가 장기 기증 운동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는데, 이미 구속자회 회원 20여 명이 ‘사랑의 장기 기증 운동본부’에 장기 및 각막 기증을 약속했다. 이들은 5월2일~26일 일반 시민과 5·18 관련 단체 회원 전체를 상대로 장기 기증 운동을 확산해 나갈 계획이다.

광주에서 벌이는 ‘나눔정신’은 북한 동포 돕기 운동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5월8일 ‘5월 나눔정신을 북녘 동포에게 확산시키자’는 기치 아래 5·18 유관 단체와 시민단체들이 5·18 기간에 이 운동을 극대화하기로 합의한 이래 거리와 백화점 등에서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군인 유가족과의 만남, 전·노 사면론에 무산

각종 문화·종교 행사도 과거 학생 운동권 중심에서 벗어나 전체 시민·국민의 참여를 유도하는 프로그램으로 변화하고 있다. 5·18 전야제의 경우 그동안 단골로 등장했던 학생운동 노래패가 올해는 광주시립국악단과 MBC 소년합창단에 자리를 내주었다. 아울러 동서 화해를 겨냥해 경상남북도 불교계 지도자와 스님들이 주도해 천도제를 치른다. 행사위원회는 이같은 각종 5·18 행사들을 세계에 알리고 정신 계승을 세계화한다는 취지로 인터넷에 ‘5·18 공식 홈페이지’(주소 http://www.518.org)를 개설했다.

물론 올해 5·18 행사가 이처럼 변화했다고 해서 행사 주체와 광주 시민들이 잔치 분위기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잔치를 열고 싶어도 아직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정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5·18이 국가 기념일이 됨으로써 포괄적인 측면에서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보지만, 그것도 뿌리 깊은 고립감과 뒤섞이면서 복잡하고도 곤혹스러운 지역 심리가 형성되고 있음을 어디서나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5·18 광주민중항쟁유족회 정수만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5·18 문제가 이 정도까지 온 것은 그동안 광주의 고통을 이해하고 성원해 준 국민들 덕분이다. 당연히 전국민적 잔치로 나아가야 할 5·18이 아직도 광주에만 머물러 있는 현실이 견디기 어렵다. 이것은 5·18이 끊임없이 중앙 정치에 휘둘리고, 이 지역 내에서도 정치성에 따라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

정회장에 따르면, 5·18 피해자들은 언젠가 자기들이 화해와 통합의 주역으로 나서야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물밑 준비를 해왔다고 한다. 5·18 항쟁 당시 희생된 20여 명의 계엄군도 잘못된 역사의 공동 피해자라는 판단으로 군인 유가족을 찾아다니는 작업을 계속한 끝에 올해 5·18 행사로 ‘시민과 군인 희생자 유가족 만남’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여권의 대권 예비 주자들이 전두환·노태우 사면 복권 주장을 내세우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한다.
광주 시민들의 정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광주에서 택시 기사를 하고 있는 정운택씨(46)는 손님들의 공통된 분위기라며 이렇게 말한다. “광주 시민들도 이제 남은 문제가 싸우고 밀어붙여 해결해 내기 어려운 성격이라는 것을 안다. 또 김영삼 대통령이 정치나 경제에는 문제가 많지만 5·18 문제만 떼놓고 보면 불만은 있어도 나름으로 노력했다는 것도 안다. 그러면서도 시민들 마음 한구석에는 이것마저도 김대통령이 정략에 활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대통령선거 전에 전·노 사면이 이뤄진다면 광주는 또 한번 80년 5·18을 맞게 될 것 같다.”

“이제는 다른 지역 운동과 연결 모색할 때”

결국 광주는 스스로 화해와 화합의 길로 들어설 준비가 되어 있고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는데, 이 길을 흔드는 중앙 정치 세력 때문에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곤혹스런 속사정은 이번 5·18 광주항쟁 17주년 행사 준비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광주시와 5·18 민중항쟁 17주년 행사위원회는 당초 이번 5·18 기념식때 ‘광주 평화 선언’을 내놓을 계획이었다. 17주년을 맞는 광주가 21세기를 앞둔 세계에 인권과 평화라는 메시지를 던지겠다는 취지였다. 국민 대화합과 화해 정신을 광주가 주도해 나가겠다는 이 평화 선언은 그러나 전·노 사면 문제가 정치권에서 흘러나오면서 이와 연계되어 악용될 수 있다는 반대에 부딪혀 내부 격론을 거듭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평화 선언 채택을 주장하고 있는 광주 지역 원로 강신석 목사는 “80년 5·18 정신이 민주·평화·자주·나눔 정신이라고 볼 때 이것이 국가에 구현되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에서 광주 선언을 준비해 왔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현정부의 잇단 실정과 전·노 사면 논의가 터져나오면서 악용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반론이 비등해졌다”라고 전한다.

내부 자성론도 나온다. 그동안 5·18의 전국화와 세계화가 어려웠던 이유가 내부에도 있었다는 진단으로서, 이런 논의 자체가 광주의 변화라면 변화이다. 이와 관련해 80년 5·18 당시 주모자로 지목되어 미국으로 밀항했다가 93년 5월 수배 해제 조처와 함께 귀국한 민족미래연구소 윤한봉 소장의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지역적으로 광주, 시기적으로 5·18~5·27, 주체 면에서는 5·18 관련 당사자라는 벽에 가둬진 5·18 광주 민중항쟁을 이제 풀어버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광주와 5·18 관련 단체 내부에서 지금까지 지나치게 ‘당사주의’에 빠지지 않았나 되돌아보고, 5·18 전후의 전국 민주화 운동 및 다른 지역 운동과 연결하려는 노력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이처럼 지금 광주에서는 오랜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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