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를 위해 울어 주는 버드나무>
  • 남진우(문학 평론가) ()
  • 승인 1997.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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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락한 우리 시대의 살풍경한 풍경화
이윤학은 뛰어난 풍경화가이다. 그가 일상적인 언어로 그려낸 일상 풍경은 돌연 일상에서 벗어나 읽는 사람의 마음을 거세게 두드리곤 한다. 그가 집중적으로 묘사하는 ‘살풍경한 풍경’은 그 자신의 내면에 들어찬 극도의 우울과 환멸을 반영하고 있다. 내면의 황량한 정서가 외부의 잿빛 풍경과 겹쳐 초점이 잘 맞지 않은 듯한, 이 시인 특유의 흐릿한 풍경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풍경화가의 눈에는 세계의 일그러지고 허물어지고 망가진 모습만 들어온다. 모든 것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이 풀 죽은 표정을 짓고 시인의 눈앞에 진열되어 있다. 생기를 잃은 그 풍경을 스쳐 지나가며 시인은 이를 아무런 수식 없이 건조한 언어로 옮겨 놓는다. 그는 삶이라는 질병을, 세계라는 환부를 짐짓 무심한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여성성은 지독하게 병들고 더럽힌 형상을 하고 있으며, 남성성은 처절하리만큼 늙고 쇠약한 몰골을 하고 있다. <진흙탕 속의 말뚝을 위하여>라는 시를 보자. 진흙탕(여성성) 속에 박혀 있는 말뚝(남성성)을 통해 화자는 치욕적인 삶을 견디는 정신의 고통스러움을 암시한다. 무수히 망치질을 당한 뒤에도, 또 지금 현재 퉁퉁 불은 채 썩어가면서도 ‘육체와 정신의 경계에서’ 혹은 ‘허물어진 경계에 매달려’ 말뚝은 견디고 있다. 이처럼 외부에서 주어지는 고통은 그의 내면에서 독기로 전환된다. 화자는 ‘언제나 나에게 독기를 불어넣어 주는 고통이여./나를 비켜가지 말아라’라고 노래한다. 악착 같은 삶에의 의지, 고통과의 정면 승부만이 그의 자아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되고 있다. 이를 그는 <난로 위의 주전자>라는 시에서는 ‘극에 달한 고통만이,/영혼을 건져올릴 수 있다’라고 잠언풍으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파헤쳐진 연못’‘애를 긁어낸 여자의 자국’(<처절한 연못>) 같은 불모의 세계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태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자신의 생을 비틀어 짜’(<고사목>)는 노역을 계속하거나 ‘나보다 나 자신을 저주하는 인간은/이 세상에 없다’(<거꾸로 도는 환풍기의 날개>)는 식의 자학을 계속하는 것일 뿐일까. 혹시 화자 자신도 ‘터지고 쭈그러들고 있’으면서도 ‘가지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홍시처럼 ‘끝까지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겨울에 지일에 갔다 3>)는 것은 아닐까.

우울과 환멸이 두텁게 발린 이윤학의 풍경화는 아마도 잉여 인간처럼 어느 한 곳에 소속되지 못하고 사회 주변부를 떠돌아야 하는 시인의 자의식이나 소외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내면의 상처를 응시하며 형벌처럼 주어진 삶을 견디고 있다. 그가 자신을 가두고 있는 삶의 조건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면 역시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어쩌랴. 그는 갇혀 있는 죄수인 동시에 가두고 있는 간수이기도 한 것을. 애초부터 그에게는 ‘바깥’이 없었던 것이다. ‘바깥’이 곧 ‘안’인 그 이상한 감옥에서 시인은 지금도 시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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