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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유니폼 된 청바지

성별·연령·직업 경계 허무는 ‘대중의 기호’로 정착

李文宰 기자 ㅣ 승인 1995.10.12(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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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퍼에서 시작하자. 치마에서 바지로 옮아간 복식사의 혁명은, 엉덩이나 허리 옆에 있던 지퍼 혹은 단추가 ‘남자들과 똑같이’ 앞 쪽으로, 성기 쪽으로, 더 정확하게는 상대방을 향해 정면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 이동은 청바지가 수행했다. 여성들이 청바지를 입기 시작한 것이다.

성의 혁명은 다른 말로는 청바지의 등장이었다. 청바지는 슬로건이었다. 성 문제에서 이제 여성들은 더 이상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는 선언이었다. 등이나 허리 옆에 달린 지퍼나 단추는 타인의 손길을 전제한 것이었다. 이 때 여성의 옷은 타인이 입혀주거나 벗겨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바지가 지구의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지퍼나 단추는 여성 자신의 것이 되었다.

청바지의 지퍼는, 단추가 관리해온 ‘단계’를 일시에 무너뜨렸다.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는 행위는 과정이고 절차였다. 전통과 관습의 복습이었다. 단추를 하나씩 채우면서 ‘생각’을 해야 했다. 지퍼를 장착한 청바지는 달랐다. 단 한순간에 지퍼를 내리거나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과정과 절차가 생략되는 시대적 흐름의 ‘주범’은 지퍼 달린 청바지가 아니었을까.

통기타·생맥주·장발과 함께 70년대 청년 문화의 상징으로 각인된 바 있는 청바지가 20년 만에 다시 붐이다(73~74쪽 관련 기사 참조). 젊음이 모이는 거리는 청바지의 거리다. 열에 예닐곱은 청바지다. 성별·연령·직업은 물론이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청바지는 출몰한다. 20대 여성의 옷장에는 보통 다섯 안팎의 청바지가 걸려 있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0.25,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청바지를 갖고 있는 것이다.

“편하잖아요.” 왜 청바지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청바지 소유자의 답이다. 이 답은 부담이 없다, 멋있다, 아무 옷하고나 어울린다, 질기다… 등으로 번져나간다. 이 청바지 예찬론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이 시대가 치르고 있는 ‘육체와의 전쟁’이 펼쳐진다. 청바지는 그 자체로 치열한 무기이면서, 스스로 피도 흘리는 부상자이다.
청바지는 우선 늘씬하게 빠진 다리와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다. 이른바 ‘롱다리’에 대한 갈망과 피해 의식은 매우 강해 보인다. 다리가 긴 여성 혹은 남성에게 청바지는 자신감이다. 그러나 다리가 짧은 사람도 청바지를 입는다. 입는데, 바지 단을 땅에 끌릴 정도로 내려서 입는다. 신체의 확장이다. 다리가 늘씬하지 않은 사람은 일부러 펑퍼짐한 청바지를 택한다. 신체의 위장. 제 2의 피부, 제 2의 신체인 청바지를 통해 이 시대 육체 미학이 강요하는 아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청바지에 배꼽 티, 새로운 성적 표현 창출

청바지는 흑인 랩 가수들에서 유래했다는 힙 합 패션을 만나면서 지퍼 이후 새로운 성적 표현을 획득한다. 이른바 배꼽 티는 청바지를 짝으로 한다. 허리단을 최대한 아래 쪽으로 끌어내려 배꼽을 드러내는 이 청바지 연출법에서 여성들의 성적 자각이 엿보이기도 한다. 성을 규정한 태생의 흔적, 태어나면서 아무런 기능이 없는 그 흔적을 드러내 보이면서 ‘내가 여성인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이것은 쓸모없는 흔적일 따름이다’라고 발언하는 것 같다. 청바지는 마침내 육체에 대한 금기까지 파괴한 것이다.

청바지는 살갗을 보호하고 가린다는 전통적인 옷의 기능을 배반한다. 여름에는 반바지로 탈바꿈하고, 오래 입어 해져도 깁지 않는다. 일부러 찢어서 살갗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청바지 앞에서 옷의 전통과 예절과 기능은 의미가 없다. 뜯어진 청바지는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은 없다’‘통제, 억압하지 말라’는 젊은 세대의 항의이고 주장이다. 청바지 앞에서 기존의 모든 경계는 무너져 버린다. 이 때 청바지는 젊음의, 젊음에 의한(또는 젊음을 희망해 마지 않는 소년 및 기성세대) 표현 장치다.

그러나 청바지는 자기 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지퍼에서 엉덩이로 돌아가 보자. 구미에서 청바지 광고를 만든 이들이 제일 먼저 강력하게 대중에게 입력한 청바지의 이미지는 ‘터질 듯한 엉덩이’였다. 청바지는 엉덩이를 강조하기 위해 청바지 입은 여성의 상체를 앞으로 구부리게 했는데, 이 자세를 서구에서는 ‘희랍식 자세’라고 한다.

여성에게만 강요돼온 희랍식 자세는 코르셋, 중국의 전족, 여성복의 허리받이와 더불어 여성을 억압하는 전통적인 도구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여성 해방을 주창해온 청바지가 희랍식 자세를 ‘복권’시킨 것이다. 지퍼와 엉덩이를 살피면 살필수록 청바지가 가져온 여성 해방은 진정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구심과 만난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청바지 브랜드 가운데 ‘Get Used’가 있는데, 이 청바지는 레테르를 바지 앞 지퍼 위에 박아놓았다. 굳이 번역하자면 ‘중고를 가져라’(?)가 될, 이 상표가 겨냥하는 시선은 남성일 터이다. 희랍식 자세로 둔부를 강조하는 광고 또한 결국에는 남성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다. 청바지는 앞뒤에서 남성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아직 지퍼의 진정한 주인은 여성이 아니다).
“자유와 활동 위한 새로운 코르셋”

90년대에 다시 불기 시작한 청바지 붐은 이전의 청바지 붐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60년대 미국에서 반전·반문화의 깃발이었던 청바지는 그 이념성을 급격하게 거세해버렸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신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 있던 70년대에 청년 문화의 전위였던 청바지는 80년대 최루탄 속을 질주했지만, 90년대 들어 그 저항성과 역사성을 탈색시켰다. 청바지는 이제 다양한 청바지, 즉 대량 생산되는 상품일 뿐이다.

사회에 대한 목청을 제거한 90년대 청바지(포스트 청바지?) 붐은, 80년대 이후 이 땅을 휩쓴 운동화(나이키 같은) 열풍을 연상시킨다. 테니스화를 거쳐 농구화로 옮아간 이 이상 열기는 운동화라는 본래의 기능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 이미지가 소비된다는 점에서 대중 소비 사회를 증거했다.

청바지는 그렇게 질김에도 불구하고 그 질김은 소비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젊음과 내구성은 어울리지 않는다. 대신 소비하는 기준은 ‘상표’이고 그 종류의 다양함이다. 청바지가 아니라 그 상표가 주는 기호와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와 평등, 개성과 자기 표현을 위해 입는 청바지는 결과적으로 몰개성을 낳는 것이다. 모두 다 청바지를 입는다면, 청바지를 통해 구가하려던 ‘차별성’은 사라지고 만다. 유행에 동참하는 순간 동질감·정체성·자신감은 확인할 수 있지만, 진정한 개성은 희생해야 한다.

의복과 자아개념을 말할 때 의상 사회심리학은 ‘면경 자아이론(looking-glass self)’에 기댄다.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사람들은 자기의 외모·태도·행동을 관찰하고 평가한다는 이론이다. 면경 자아이론에 따르면, 청바지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입는 것이다. 거울 앞에서 거울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선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각종 광고와 영상 매체가 주입한 이미지를 비롯해 친구·동료·이웃, 심지어 익명의 대중이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청바지는 이중적이다. 해방시키면서 다시 억압한다. 청바지 비판론자들은 ‘자유와 활동을 명분으로 하는 새로운 코르셋’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청바지는 직설법은 물론 은유와 환유, 상징의 수사학으로 지난 1세기 동안 인류를 지배해온 거의 유일한 옷이다. 청바지에 관한 한 인류는 민주주의를 완성했다고도 말한다. 성의 구분과 차별에 저항하고 기성의 가치와 제도를 비판해온 청바지는 이제 대중 소비사회를 증명하는 상품·기호·이미지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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