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깔본 데 대한 무서운 보복
  • 金芳熙 기자 ()
  • 승인 1998.09.1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제 자본 통제보다 경제 개혁이 급선무
대다수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자신들의 실험이 실패했다고 자인한 지 10년도 채 안되어, 자본주의 체제가 이렇게 비참해졌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오늘의 세계 경제는 <자본론>의 세계와 상당히 흡사하다. 메뚜기떼처럼 이곳저곳을 휩쓸고 다니는 국제 투기 자본 때문에 황폐해진 나라들. 세계는 공황 위기에 직면하고, 국제 금융 시장을 지탱해 온 국제통화기금(IMF)과 서방 선진 7개국 체제도 속수 무책이다.

과연 자본주의가 구조적인 한계를 드러낸 것인가. ‘만일 성급하게 그렇다고 단정한다면, 사용하고 난 목욕물과 함께 소중한 아기를 던져 버리는 것이다.’최근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가 내린 결론이다(9월1일자 렉스 칼럼). 하루에만 1천1백억달러(약 1백50조원)에 이르는 국제 자본의 이동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제 자본이나 자본주의 구조의 탓이라고만 여겨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우선 최근 위기를 맞고 있는 아시아와 러시아를 생각해 보자. 자본주의 체제를 뒤늦게 수입한 이 나라들은 한결같이 자본주의 체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정착시키지 못한 나라들이다. 소수 지배층이 정부로부터 국영 기업과 국유지를 헐값에 불하받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도둑 자본주의(robber baron capitalism)는, 정경 유착으로 대변되는 아시아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의 러시아판(版)일 따름이다. 진정한 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먼 체제였다.

아직은 <자본론> 펼칠 때가 아니다

게다가 자본주의 체제를 만만하게 본 나라일수록 고통의 정도가 심했다. 90년대 초반의 혼란기를 겪고 나서 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러시아 정부는 지난 몇년 동안 자신들의 자본주의 실험이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오판했다.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은 지난 10여 년 간의 고도 성장에 취해, 자신들이 순수한 의미의 자본주의보다 더 탁월한 변종을 만들어냈다고 으스대기까지 했다.

최근 세계 경제가 불안정해지는 과정을 되돌아보면 도미노 게임이 연상될지도 모른다. 그런 게임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그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손을 미국으로 보든 아니면 국제 자본으로 생각하든, 이런 가설에는 결정적인 맹점이 있다. 궁극적으로는 놀이를 하는 손도 다치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 경제는 세계적인 경기 침체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고, 조지 소로스 같은 국제 투자가(혹은 국제 투기꾼)들도 이번의 러시아 사태에서 수십억 달러를 날렸다.

그러나 국제 자본에 대한 피해 의식에 시달리는 나라들로서는 당연히 외국 자본의 유출입을 통제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국제 자본 시장이 형성되기 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몇몇 나라들은 이미 이런 조처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말레이시아는 마치 90년대 이전 한국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강력한 외환 규제 정책을 시행 중이고(48쪽 참조), 러시아 역시 고정 환율제를 비롯한 규제책을 검토하고 있다.

이런 실험이 성공을 거둘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다수 경제 전문가들은 회의적인 편이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 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는 이러한 견해를 대변하며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7월16일자 사설). 첫째는 80년대 이후 외국 자본을 철저하게 통제했던 칠레 같은 나라들이 별로 효험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통제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이를 피하는 방법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 자본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엄격한 자본 통제는 오히려 자본 도피와 부정 부패를 조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국제 자본을 악의 화신으로 보는 시각에는 논리적 결함도 있다. 최근 위기를 겪고 있는 아시아 각국이 누린 고도 성장의 원동력은 외국 자본이었다. 국내 자본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이 나라들은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경제를 일으켰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문제가 국제 자본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썼느냐에 있다는 <파이낸셜 타임스>의 지적은 정확하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과 러시아는 모두 정부와 민간 부문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외국 자금을 빌린 다음, 이것을 자기 돈인 양 흥청망청 써버린 나라들이다. 이들이 갚아야 할 돈이 바닥 나면서 현재의 세계 경제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국제 자본의 초단기적 이동이 문제라는 시각과, 그것을 막으려는 국제적인 수준에서의 논의는 설득력이 있다(각국이 외환 규제를 할 경우에는 자본이 도피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국제적인 논의가 최적이다). 하지만 국제 자본을 적대시하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얘기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또 한 가지 교훈도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이경태 원장은 “일부 국가에서 나타나듯, 국제 자본을 통제하려는 논의가 국내의 경제 개혁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이상한 논리로 둔갑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한다.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게 해주는 금융기관 구조 조정은 위기를 겪고 있는 모든 나라들의 필수 과제이다.

결국 누군가가 최근의 도미노 게임을 주관했다면, 그가 세계에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더욱 완벽한 자본주의를 추구하라는 뜻일 것이라는 얘기다. 아직 <자본론>을 다시 펼칠 때는 아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