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취재]파란의 대북 사업가, 장석중은 누구인가
  • 崔寧宰 기자 ()
  • 승인 1998.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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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업자·정보원 등으로 활동하다 남북 모두에게 버림 받아
수사하면 할수록 안기부와 여권을 난처하게 만드는 인물.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의 장석중씨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누구이며 어떤 활동을 벌였을까. 그의 활동은 △남북한간 무역을 해온 사업가 △북한 전문가로서 민간 경협 중개 및 자문역 △청와대와 안기부의 정보원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그가 가장 힘을 쏟은 분야는 남북한 무역이다. 그는 ‘대호 차이나’라는 무역 회사 대표로서 북한산 농수산물을 한국으로 들여왔다. 그래서 1차 북풍 사건 때 등장한 안기부 에이전트 ‘흑금성’과 달리 주요 활동 영역은 경제 분야였다.

장씨는 원래 주방 가구를 만드는 ㅎ회사 무역부에서 근무했다. 90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중국으로 건너가 수산물 도입 사업을 하다가 대북 사업에 뛰어들었다. 김진송이라는 확실한 줄을 잡은 것이 계기였다. 조선족인 김진송의 어머니는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한 서순옥이다. 서순옥은 어머니 없이 자란 김정일·김경희 남매를 키워 준 의(義)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또 김일성을 독대할 수 있을 정도로 북한에서는 ‘힘’이 있었다. 김일성이 사망한 후 ‘효자’ 김정일은 서순옥을 평양 근교 별장으로 불러들여 최근까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을 구술케 했다.

조선족 김진송 만나면서 대북 사업 시작

김진송은 이러한 어머니 덕분에 북한을 마음대로 오가고 고위층도 거리낌 없이 만날 수 있었다. 이런 김씨에게 장씨는 생활비를 보내 주고 아파트까지 사주는 등 뒷바라지를 하며 대북 사업을 시작했다. 김진송이 북한에서 중국으로 수산물과 한약재를 가져오면 중국 현지에서 장씨가 밀가루를 주고 이를 받는 물물 교환 방식이었다. 그가 김진송을 매개로 장씨와 거래한 북한쪽 파트너는 인민군 후방총국이 운영하는 룡흥무역(사장 김양구)이었다. 이 때 장씨는 북한측의 요구로 장백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중국을 통한 남북한 중개 무역을 계속하던 장씨는 95년 7월7∼21일 안기부 묵인 아래 필리핀 사람으로 위장해 ‘필립스 장’과 ‘장백산’명의로 된 여권을 만들어 김진송과 함께 중국 단둥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를 통해 북한으로 들어갔다. 최초의 입북이었다. 장씨는 평양을 거쳐 금강산 부근 철책선까지 둘러보고 중국으로 빠져나왔다. 이 시기에 장씨는 김진송의 이름을 딴 배 진송 1호와 진송 2호로 남포와 인천·군산을 오가며 북한 수산물을 실어 날랐다. 사업 파트너인 룡흥무역은 남포 외항에 이 배를 위한 접안 시설까지 따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96년 무렵 장씨와 김진송의 사이가 멀어져 장씨는 북한 대외경제위 전일춘 부위원장과 직접 거래하게 되었다. 그는 북한의 주요 외화 획득원이 송이버섯이라는 사실을 주목했다. 송이버섯은 김정일의 자금 조달원이었다.

96년 1월, 장씨는 남포에서 인천으로 송이버섯 1t을 들여왔다. 송이버섯의 최대 소비국은 일본이다. 북한산 송이버섯은 한국산보다 원가가 훨씬 낮아서 장씨는 이 버섯을 일본에 수출해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그러나 북한은 송이버섯 저장·수송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장씨는 96년 8월과 9월 한국의 이이한씨가 개발한 송이버섯 냉동 저장 기술을 가지고 북한에 들어갔다. 획기적인 이 기술 덕분에 장씨는 북한 당국자들로부터 신임을 단단히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강릉 잠수함 사건이 터져 장씨의 대북 사업은 얼마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북 강경 정책이 풀리기 시작한 97년 말부터 최근까지 장씨의 사업 행적을 보아도 되는 일이 제대로 없었던 것 같다. 그는 하는 일마다 손해를 보았고, 진송 2호마저 빚 때문에 지난 8월까지 단둥에 압류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씨의 두 번째 주요 활동은 한국의 민간 기업을 북한에 연결해 주고 대북 경협 사업을 자문하는 컨설팅 업무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96년 3월 북한과 합의한 ‘북한 원산지 표시 증명 제도’이다. 당시만 해도 중국산 농수산물을 북한산이라고 속여 파는 경우가 많아 대북 무역 업자들이 파산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장씨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김운근 박사, 구속된 오정은씨(당시 청와대 행정관), 북한의 대외경제위 리철운 과장과 이 문제를 토론한 뒤 남북한을 오가며 협상을 벌여 북한산 농수산물의 원산지 증명 제도를 정착시켰다. 슈퍼 옥수수로 유명한 김순권 박사를 북한으로 데리고 가서 남북한 농업 협력의 물꼬를 튼 것도 그의 주요한 공적이다.

남북 경협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인 물류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해주와 인천 사이에 직항로를 뚫으려 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진행된 사업이었다. 현재 서해안의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북한의 물자들은 대부분 남포항에서 선적된다. 20피트짜리 컨테이너를 남포를 통해 인천으로 들여오면 경비가 천 달러 이상 드는데, 코스를 해주로 바꾸면 6백 달러 이하로 비용이 떨어진다. 장석중씨는 이 사업을 대한통운과 함께 하기로 하고 이 회사 관계자와 함께 지난 9월 중에 방북하기로 정부로부터 승인받았으나 안기부에 구속되면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돈벌이 위해 브로커 역할도

그러나 브로커 역할로 돈을 챙기려 한 경우도 많았다. 이는 장씨가 대북 사업을 하는 민간 기업이라면 닥치는 대로 중간에 끼어든 사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는 현대·삼성·대우 같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대북 사업을 하는 기업이라면 가리지 않고 다가가 확실한 북한쪽 줄을 이어 주겠다고 제의했다. .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중간 과정에서 따돌림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협중앙회와 같이 할 계획이었던 감축 어선 북송 사업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98년 6월 무렵 장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해양수산부 박규석 차관보의 소개로 수협의 대북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나 배제되고 말았다. 수협측에 따르면, 장씨가 말만 그럴싸하지 실력은 없는 사기꾼 같아서 접촉 채널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수협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남북농업협력교류위원회에서도 고문 자리를 얻으려다 따돌림을 당했다.

장씨가 한 세 번째 역할은 청와대와 안기부에 북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는 문민 정부 시절에는 아주 유능한 안기부 첩보 수집원 노릇을 했다.

문민 정부 초기 남북 정상 회담 이야기가 나오던 무렵 그는 북한의 주석궁 내부를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안기부에 건넨 적이 있었다. 그의 사업 파트너인 김진송이 찍어 준 것이었는데, 이 자료는 정부에서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에 가면 경호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주석궁의 내부 구조를 알아야 했고, 하다못해 김일성이 건배를 제의할 때 오른손으로 할지 왼손으로 할지 미리 아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대북 사업가 장석중. 그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그는 ‘외환 유치죄’라는 엄청난 혐의를 쓰고 수사를 받고 있다. 유죄 여부는 법원이 밝히겠지만 재판 결과 못지않게 중요한 점이 있다.

남북 관계에는 국익을 위해 숨기고 보호해야 하는 기밀 사항이 많다. 특히 대북한 비선들은 여야의 정치적인 이해 관계를 떠나서 우리 정보 기관이 보호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안기부는 최근‘정보는 국력이다’라는 부훈을 내세웠다. 그러나 북풍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안기부의 최근 행보는 정보를 누설시켜 국력을 탕진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비판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대북 정보 주도권을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국가 최고 지도자의 대북 공식 채널이 없다는 점이다. 5공 때는 장세동, 6공 때는 박철언 같은 정부의 공식 대북 채널이 있었다. 그러나 문민 정부는 이런 공식 채널을 모두 잘라 버렸다. 그러다 보니 장씨 같은 자칭 대북 사업가들이 비선으로 끼어들어 남북 관계 자체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김대중 정부의 최근 행적을 보면 이런 비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정부 차원의 대북 공식 채널을 하루빨리 구축하는 것만이 이용만 당하다가 버림받는 제2의 장석중을 만들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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