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과 정부가 대우를 주목하는 까닭
  • 金芳熙·成耆英 기자 ()
  • 승인 1998.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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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 행보, 기업 구조 조정 시금석으로 판단
투자자용 보고서 하나가 그렇게 큰 파문을 일으키리라고는, 보고서를 작성한 노무라 증권 서울지점 고원종 조사부장(38)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20여 일이 지나 뒤늦게 보고서 내용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금융계 전체가 벌집을 쑤신 것처럼 소란스러워진 것은 물론이고, 분석 대상이 된 대우는 부랴부랴 해명성 기자 회견을 열었다. 투자자용 보고서를 작성한 애널리스트가 해당 기업으로부터 엄청난 항의를 받고 소명서를 제출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세 쪽짜리 보고서 하나가 이렇게 파문을 몰고온 이유는 단순했다. 이 보고서가 그동안 금융계에서 쉬쉬하며 떠돌던 가장 민감한 소문을 공론화했기 때문이었다. 문제의 보고서 제목은 ‘대우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 대우의 자금 상황을 분석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이 보고서를 살펴보면, 그 내용은 도발적인 제목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외국계 증권사들은 투자자용 보고서의 제목을 다는 편집자를 따로 두고 있으며, 이번 보고서의 경우 노무라 증권 홍콩 지사가 제목을 달았음). 10월28일자로 정부가 회사채 발행 한도 규제책을 발표함에 따라, 5대 그룹 가운데 대우가 가장 큰 타격을 받으리라는 것이 분석 요지였다.

이 증권사는 이런 분석을 토대로 대우중공업과 대우전자 주식을 자기들의 관심 종목(target list)에서 제외한다고 밝혔다. 노무라 증권 고원종 부장은 “보고서 어디에도 언론이 보도한 것처럼, 대우 핵심 계열사 주식을 팔아치우라는 내용은 없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그는 대우그룹에 ‘필자의 의도와 달리 선의의 피해자가 생긴 점에 대해 사과한다’는 내용의 소명서를 보내야 했다.

이 보고서가 문제가 된 것은 보고서 내용 때문이라기보다는 분석 대상이 대우그룹이기 때문이었다. IMF 체제 이후 대우그룹은 금융기관, 특히 외국계 금융기관들과 투자자들로부터 주목 대상이 되어 왔다. 더욱이 최근 대우가 금융권에서 지나치게 많은 돈을 끌어들인다는 이유로 자금 악화설까지 돌던 터였다.
노무라 증권 보고서를 계기로 자금 악화설이 공개적으로 거론되자 대우그룹은 다급해졌다. 지난 11월20일 (주)대우 장병주 사장은 기자 간담회를 자청해 자금 악화설을 적극 해명하고 나섰다. 장사장은 “지난해 인수한 쌍용자동차의 적자 폭이 크긴 하나, 올해 그룹 전체로 6천7백억원 가량 흑자가 예상된다”라고 주장했다. 장사장은 자금 악화설이 나돌게 된 원인으로 대우그룹이 최근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많이 발행한 것을 꼽았다. 이에 대해 장사장은 신용 경색으로 은행들이 대출을 줄인 데다 수출 증가로 외상 매출금이 늘어나는 바람에 불가피한 조처였다고 해명했다.

노무라 증권 보고서와 대우측 해명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현재로서는 확실치 않다. 분명히 보고서에는 분석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분석에 동원된 자유기업센터의 원래 자료는 5대 그룹의 재무 비율을 분석하면서, 다른 그룹들과 달리 대우만 2년 연속 안정적이면서도 높은 성장성과 수익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호평했다. 원자료를 내놓았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부설 자유기업센터 관계자는 이 대목이 빠진 것을 들어 보고서에 어떤 의도가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드러냈다.

외국 금융기관한테 박한 평가 받는 대우

실제로 대우그룹 내부에는 자금 악화설을 흘리는 외부 세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특히 노무라 증권이 문제의 보고서를 내기 정확히 10일 전에 삼성그룹에 호의적인 보고서를 냈던 점을 들어, 삼성그룹을 루머의 진원지로 꼽기도 한다. 그러나 기아 사태 당시 음모설의 주역으로 지목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삼성그룹은 이 문제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대우그룹 자금 악화설은 머지 않아 진위가 쉽게 판가름 날 수도 있다. 금융감독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12월15일까지 5대 그룹이 주거래 은행과 재무 구조 개선 약정을 맺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때쯤이면 해당 은행의 자금 회수 여부를 판단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자금 상황과는 상관없이 이번 촌극으로 다시 한번 확인된 사실이 있다. 대우그룹이 외국계 금융기관으로부터 박한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대우그룹을 대하는 외국계 금융기관의 태도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진작부터 대우와 거래를 하지 않는 금융기관이 있는가 하면, 최근 들어 거래를 줄이거나 중단하려는 부류가 두 번째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외국계 은행 관계자의 말이다. 게다가 대우그룹 주식은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들 사이에서 오래 전부터 경원되어 왔다.
대우로서는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법도 하다. 특히 대우는 외국계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이 세계 경영이라는 이름으로 해외에서 벌인 공격적인 투자가 가진 잠재력을 간과하고 있다(70∼72쪽 딸린 기사 참조). 사실 그런 부분은 재무 제표와 같은 회계 자료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외국계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은 왜 대우를 따돌리고 있는 것일까. 대우 출신의 외국계 증권사 조사부장이라면 좀더 솔직한 얘기를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얘기를 들어 보자. “대우는 규모는 엄청나게 크지만, 다른 그룹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게 되어 있다. 대우그룹에 대해서는 정확한 평가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돈을 대주는 금융기관이나 투자자 입장에서 그보다 더 불안한 경우는 없다.”

도대체 무엇을 평가할 수 없다는 얘기일까. “예를 들어 해외 역외 시장에서 대우가 얼마나 돈을 빌렸는지 알 길이 없다. 감사 보고서에는 대우가 해외에서 벌인 방대한 투자가 단 한 줄로 적혀 있는데, 어떻게 마음이 놓이겠는가.” 앞의 조사부장이 한 말이다. 외국계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의 이러한 인식은 대우가 지난 1년여 벌여온 미국 제너럴모터스(GM) 사와의 외자 유치 협상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외국계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이 대우그룹의 행보를 기업 구조 조정의 시금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우의 예는 이처럼 외국 자본의 사고와 한국의 기업 관행이 부딪치고 갈등을 빚는 문명 충돌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외국계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의 이런 선입견을 더욱 굳혀준 계기는 정부가 지난해부터 추진해 온 제일은행 매각 협상이었다. 외국계 금융기관들은 이 협상이 지지부진한 것이 대우 때문이라고 믿는 분위기다(제일은행은 대우의 주거래 은행이다). 이 때문에 제일은행 인수 후보로 거론되는 시티 은행이 제일은행의 대출금 중 대우그룹 몫만큼은 한국 정부가 보증하라고 요구했다는 설도 있다.

대우그룹, 증시에서 자금 조달 불가능

그러나 이런 풍문은 자금 악화설처럼 확인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제일은행은 매각 협상을 주간사인 모건스탠리에 일임했고, 모건스탠리는 협상이 완결될 때까지 입을 다문다는 방침이다.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은 최근 각 언론사에 아예 두 은행의 인수 후보 자체를 거명하지 말아 달라는 협조 공문을 보내기까지 했다.
한편 정부 또한 대우를 기업 구조 조정의 상징적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징후가 있다. 외국계 금융기관이나 투자자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조 조정이 가장 시급한 그룹이 구조 조정을 위한 조처를 단 하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구조 조정이 가장 시급한 그룹이라는 근거부터 살펴보자. 대우그룹은 증시를 통한 자금 조달이 거의 봉쇄되어 있다. 상장 계열사 12개사 가운데 유상 증자를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주가를 유지하는 계열사는 대우증권 정도가 고작이다. 증시에서는 할인율 30%를 감안해, 통상적으로 주가가 7천원 이상이 되어야 유상 증자가 가능하다고 본다. 대우가 올해 들어서 5대 그룹 가운데 회사채를 가장 많이 발행한 것도 유상 증자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아래 표 참조).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요구하는 것처럼 내년까지 부채 비율을 200%로 낮추기 위해서는 과감한 외자 유치와 자산 매각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상반기 현재 대우의 부채 비율은 396%이지만, 하반기에 회사채 발행 물량이 집중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부채 비율이 꽤 높아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동안 의욕적으로 추진해 온 외자 유치 계획은 현재 지지부진한 상태이고, 자산 매각 실적도 사실상 전무하다.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자신의 발언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대우에 대해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삼성은 그동안 16건의 매각 실적이 있다. 대우는 뭘 믿고 그러는지….”

대우도 금융기관과 정부의 이런 시각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획기적인 구조 조정 계획을 일찍 발표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뇌혈종 제거 수술을 받기 전인 11월 초, 대우그룹 수뇌부에 과감한 구조 조정 방안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대우그룹은 김회장 측근을 중심으로 그룹 구조 조정을 위한 태스크 포스팀을 구성했다.

주거래 은행과의 재무 구조 개선 약정을 맺기 위해 구조 조정 계획을 수립하는 대우경제연구소에도 당초 계획보다 강력한 구조 조정 방안을 담으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재계 일각에서는 획기적 구조 조정 방안의 핵심 내용이 계열사를 절반으로 줄이는 충격적인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고 있으나, 대우그룹과 대우경제연구소는 아직 확정된 것이 없다고 밝혔다.

김우중 회장이 11월20일 수술을 성공리에 마치고 퇴원했기 때문에 획기적인 구조 조정 계획을 직접 챙길 공산이 크다. 그는 당분간 비행기를 타지 말라는 병원의 권유에 따라, 전체 일정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해 온 해외 출장을 자제할 예정이다. 대우를 둘러싼 최근 상황도 김회장의 국내 체류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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